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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은희의 내가 만난 동남아_4] 인도네시아 서쪽 끝에서 다면체로 변신을
아시끼의 중학교에서 여학생들과 함께
아시끼의 중학교에서 여학생들과 함께ⓒ필자 제공

적도를 따라 동서로 길게 늘어선 군도 국가 인도네시아는 3개의 시간대에 걸쳐있다. 자카르타가 포함된 서부시간은 GMT+7, 발리로 대표되는 중부시간은 GMT+8, 파푸아는 동부시간인 GMT+9에 속한다. 작년 대선 직후 인도네시아 수도이전 논의가 급진행 중이다. 그런데 현 수도 자카르타와 새 수도예정지 발릭파판 간에 1시간 시차가 있다. 이걸 확인하고 혼자서 남의 나라 수도이전 후 행정처리 문제가 어떻게 될지 쓸데없이 길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오늘은 인도네시아의 오지 파푸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 보려한다. 낯선 현장에 오래 머물러도 당췌 익숙해지지 않은 채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할 때도 종종 있다. 나에게 이 현장은 흥미로운 관찰만큼 심적 방황도 많았던 곳이다. 갈피는 못 잡겠고 상념만 많았던 어느 밤에 이곳이 한국과 시간대가 같다는 게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그래 결론을 쉬이 찾지 말자. 동시간대 한국사람으로 이 현장을 잘 관찰하고 기록해보자. 그렇게 현장 일기장에 적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인의 영토인식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면, 인도네시아인들은 ‘사방에서 머라우께까지(dari Sabang sampai Merauke)’다. 서단에 해당하는 사방은 반다아체 앞 웨 섬의 작은 도시이고, 머라우께는 파푸아주의 동남단 도시이다. 인도네시아에서 파푸아로 부르는 지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섬을 자로 잰 듯 직선으로 나눈 후 서편에 위치한다. 사실 국경이 그어져 있으나 인도네시아의 파푸아주나 흔히 PNG로 줄여 부르는 파푸아뉴기니독립국이 인종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국경도 부분적으로 열린 곳이 많아 양국의 인적 교류도 자연스러울 만큼 적지 않다. 다만, 식민의 역사(네덜란드와 영국)와 지역화(아세안지역공동체)의 과정을 거치며 파푸아는 (동남)아시아에, 뉴기니는 오세아니아에 관념적으로 분리되어 속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배했던 네덜란드는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패망하자 이 땅에 재진입하려 했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를 상대로 4년의 독립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마지막까지 파푸아만은 제 땅만으로 삼으려했다. 다시 양국 간 무력충돌이 이어졌고 결국과 유엔과 미국 등의 중재로 1963년 이 땅은 인도네시아 영토로 선언되었다. 토착민 중 일부는 이미 1961년에 독립을 선언하며 분리독립운동에 나섰지만, 일부 대표자들의 투표를 통해 1969년부터 최종적으로 인도네시아 영토로 편입되었다.(물론 분리독립 세력은 여전히 존재하고, 최근까지도 유혈사태가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파푸아로 이동하는 날 공항 가는 택시의 아저씨가 말했다. “파푸아에 간다고? 여사님(Ibu)이 거기를 왜? 거기는 오랑 히땀(Orang Hitam, 초콜릿빛 피부의 사람)이 사는 곳이야, 위험해요.” 택시기사 아저씨도 (성격 급한 한국인과 유사한) 수마트라 바딱족이라면서 그런 말을 했다. 비유하자면 목포 아저씨가 울릉도 촌이고 위험하다 걱정하는 격이었다. 갓 입 뗀 초급 인도네시아어로 대화를 길게 나눌 수는 없었지만, 인도네시아 주류사회의 파푸아에 대한 인종적 편견과 차별의 시선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파푸아는 인도네시아에서도 최고 오지다. 옛명칭 이리얀자야는 위대한 성공 혹은 승리의 땅을 의미하며 자바 중심의 ‘내부식민지적 시선’이 그대로 드러났었고, 그래서 2002년 파푸아로 섬 명칭이 변경되었다.

자카르타를 출발해 마카사르-자야푸라를 거쳐 일차 목적지 머라우께까지 이동시간만 12시간 이상 소요되었다. 환승지마다 어김없는 연착/연발도 더해졌다. 비행기가 끝이 아니다. 나름 도시테가 나는 머라우께를 벗어나 비포장 오프로드를 타고 북쪽으로 6시간 정도 더 이동해야 했다. 그날은 중간에 유실된 다리도 있어 자카르타 숙소 떠난 지 꼬박 하루만에 최종목적지에 이르렀다.


세 개의 시간대를 가진 인도네시아의 끝 파푸아의 아시끼
우여곡절 끝 한국 기업을 관찰하며 얻게 된 결론
편견 없이 예단 없이 현장이 하는 말을 들어보리라

인도네시아에서 파푸아로 부르는 지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섬을 자로 잰 듯 직선으로 나눈 후 서편에 위치한다.
인도네시아에서 파푸아로 부르는 지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섬을 자로 잰 듯 직선으로 나눈 후 서편에 위치한다.ⓒ민중의소리

민간인인 내가 이 먼 곳까지 찾아간 이유는 여기서 조업 중인 한국기업과 한국인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보벤디골군 아시끼면. 이곳엔 인도네시아 굴지의 한인기업 K사의 복합사업장이 있다. K사는 1969년 인도네시아에 두 번째로 진출한 한인기업으로 주력은 합판제조업이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이전엔 원목개발로, 이후엔 조림을 통해 원료목을 생산하고 이를 합판으로 가공해 수출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았다. K사는 1993년부터 파푸아 사업을 시작했다. 사건사고도 많은 현장이었다. 한국인 직원이 독립 세력에게 인질로 잡힌 적도 있고, 토착민과 직원 사이 칼부림 사건도 전설처럼 떠도는 곳이다. 직원들은 군대에서처럼 한달에 한 번씩 생필품 보급박스를 받는다. 이 기업에게 파푸아 아시끼 사업장은 조금 더 특별한데, 원목-조림-합판제조업의 단일 라인 이외에 ‘오일팜 플랜테이션’이란 대규모 농업을 새로운 업종으로 추가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팜오일은 ‘세상에서 가장 미움 받는 작물’이란 오명이 따라붙는 ‘문제적 작물’이다.

개인적으로 인도네시아의 K기업연구를 시작한 것은 길지 않은 연구자 인생에서 맞닥뜨린 큰 도전이었다. 인구와 면적에서 동남아의 40%에 해당하는 인도네시아라는 대국을 동남아입문 7년 만에 처음으로 진지하게 살펴야했다. 주제와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연구이력 상 확연한 분기점이 만들어졌다. 나의 주된 연구관심사는 동남아의 환경현안이었고, 그렇다보니 현지네트워크도 환경NGO의 활동가들이나 연구자그룹 혹은 현안 지역의 지역주민들이었다. 현장연구에 접근하는 문제의식도 사안을 글로 풀어내려는 나의 입장도 선명한 편이었다.

동남아 현장을 돌아다닐 때는 일부러 한인들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었다. 홀로 해외 지역연구를 나온 여성연구자들에게 한인들(특히 아저씨들)과의 접촉은 불필요한 감정노동을 유발시키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쪼개 현지 투어프로그램을 신청할 때도 되도록 한인은 없는 팀에 들어갔더랬다. 그런데 한인기업이 연구대상이 되자 만나야 하는 사람도, 네트워크를 타고 연결되는 사람들도 확연히 달라졌다.

K사와 라포를 형성하기까지 적지 낳은 긴장과 탐색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어떤 사전정보도 없이 홈페이지의 대표메일로 연구목적과 방문희망 시기를 적어 보냈는데 덜컥 답장을 받은 것은 내 편에서는 행운이었다. 약간은 느슨하게 우연적으로 진행되는 현지조사(우리는 이런 방식을 “발견적”이며, “해석적”이라 변호한다)와는 달리, 회사의 근무 일정표에 따라 함께 출퇴근 하고, 지정된 사람을 만나고, 위계적인 회식자리도 따라가 ‘술로는 지지 않으리~’ 다짐하며 말술로 친분을 쌓으면서도 한 편으로 긴장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기업의 신뢰를 얻으면서도 기업의 말과 행동을 비판적으로 봐야한다는 원칙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원목개발기업에 팜오일 플랜테이션이라니, 결과적으로 열대우림 파괴와 관련된 기업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의 신호등을 계속 켜두려 부단히 노력도 하고.

1년 반 동안 총 4차례 1~2주씩 K사의 사업장에 대한 접근을 허락받았다. K사는 남부 자카르타의 메인도로에 번듯한 본사건물도 있었지만 자원개발 기업의 특성상 주요 현장은 칼리만탄, 파푸아, 몰로꾸와 같은 원거리 섬에 위치하고 있었다. 본사에서 평판조회에 결격사유는 없었는지 반년 만에 이 회사의 현장 구석구석을 들어가 참여관찰의 기회를 얻었다. 파푸아의 아시끼 사업장은 “해외진출 한국(인)기업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주제로 한 프로젝트 공동연구를 위한 마지막 현장이자 이 기업의 본체를 이해해 볼 수 있는 핵심현장이었다.

이 사업장은 한 기업의 진출에 따라 새로운 지역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하며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기업의 관계는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관찰하기에 매우 적합한 사례였다. 이곳에 열흘 가까이 머물며 회사관계자, 현지인 직원, 지역학교, 토지의 원주인인 토착민 리더들, 자생적 상업지구의 상인들과 아이들을 폭넓게 접촉하고 관찰하였고, 내가 정리한 결론은《말레이 세계로 간 한국기업들》이란 책의 4장에 길게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60페이지 정도 되는 챕터 하나를 완성하는데 시간과 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책이 나온 해는 세월호 참사가 있던 해라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눈물바람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만 있었던 날이 석 달이 넘는다. (그 시간을 우리 모두가 그렇게 보냈잖아요.) 다른 한편으로 대상에 대한 입장을 결정하기까지 관찰의 시간, 생각의 시간, 글쓰기 시간을 곱절 이상 더 투자해야만 했다. 덜컥 시작은 했는데 나에게 기업이란 대상은 내부 회로와 동학을 전혀 확인할 수 없는 블랙박스와 같은 존재였기에 글과 논리전개가 자주 벽에 부딪쳤다. 회사의 홍보성 글로 보이지는 않을까, 명색이 연구자로 비판적 글쓰기를 해야한다는 원칙은 지켜야겠고.

팜오일의 문제는 특히 민감하다. 인도네시아의 팜오일 확대 현상은 국가와 사회의 경제적 이익만큼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K기업의 팜오일 플랜테이션도 이 논란의 구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로 한국을 대표하는 한 환경단체와 K기업 간의 갈등이 2년 넘게 이어졌고, 그 사이에서 중재라는 걸 해 보려다 나 자신이 큰 내상을 입기도 했다. 그래서 팜오일과 관련해서는 공들여 공부하고 따로 두툼한 논문도 한편 써 보았다. (“팜오일의 정치생태학” 원하시는 분께는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도네시아의 맥락 안에서 팜오일 이슈는 경제적 문제(기업의 이익)일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지방분권, 지역개발의 전초전)일 수 있다. 도덕적 판단보다는 중층적이고 맥락적 이해가 중요하고, 고로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봐야한다.”

K기업 아시끼 현장의 팜오일농장과 팜오일공장 전경
K기업 아시끼 현장의 팜오일농장과 팜오일공장 전경ⓒ필자 제공

이 현장을 다녀오고 그리고 어렵게 하나의 글을 완성한 이후 현장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조금은 변했다. 내 입장을 선악(善惡)과 시비(是非)의 선택지 중에서 급하게 한 쪽으로 기울게 하기 보다는, 일단은 편견 없이 예단 없이 현장이 하는 말을 들어보리라. 연구자의 역할은 내 입장과 판단을 명확히 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와 시민이 결정을 내리는데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되도록 풍부하게 제공하는 것에 만족해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단기성 이슈로 휘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문제의식 가지고 나의 질문을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글을 쓰다보니 파푸아의 머라우께나 아시끼라는 곳보다는 나 스스로를 변명하는 글이 되어 버렸다. 판단은 유보되고, 생각의 갈래는 쪼개지고 퍼져만 가고, 이 생각도 옳고 저 생각도 틀리지 않는 상황들이 점점 많아진다. 나이 들고 보수화되는 거잖아 비판한데도, 살아보니 그렇더라는 답이 이제는 더 많이 나온다. 초기 계획과는 달라졌지만 결론적으로 다양한 질문을 상기시키며 나를 다면체 연구자로 거듭나게 만들어 준 파푸아 현장. 박사논문 마지막 페이지에 내 안에 들어와 나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 ‘나’‘들’에게 감사한다는 문구를 적어두었다. 여전히 많은 질문을 던지는 파푸아 현장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쭉 지역연구자 엄은희의 일부이다.

엄은희 서울대 사회과학원·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지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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