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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특별기획] 코로나 사태, 활로는 무엇인가
없음

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비상상황이 벌써 몇달 째 계속되고 있다. 중국, 한국을 포함해서 여러 나라에서 이제 엄격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멈추려는 움직임이 시작되기는 했으나, 이는 코로나 사태가 실제로 진정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기보다, 더 이상의 경제·사회적 피해는 곤란하다는 정부 책임자들의 생각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민들의 대면적 접촉을 엄격히 제한하는 방침을 다소나마 완화하려는 것은, 의학적인 판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결정인 셈이다.

과연 이 정치적 결정이 희망대로 성공할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다소 수그러든 감염상황이 언제 다시 폭발적으로 확산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세계적 유행병의 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1918년의 스페인 독감은 그해 봄에 시작되어 그다지 큰 피해는 끼치지 않고 사라진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느닷없이 늦여름에 재발현하여 수백만에 이르는 막대한 인명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바이러스가 그간에 변이를 일으켜 악성으로 변한 탓이었다.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는 스페인 독감처럼 악성 변종이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게 몇몇 전문가들의 견해이긴 하지만, 어차피 추측일 뿐 확실성이 있는 전망은 아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정부 당국자들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생활방역체계’라는 다소 느슨한 방식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은 국가의 경제기반의 붕괴를 마냥 방관할 수 없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상당한 모험을 무릅쓰고라도, 산업생산과 소비활동의 재활성화를 시도하는 게 정부의 책임이라고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경제문제 말고도 고려해야 할 게 있을 것이다. 즉, 세상에는 장기적인 고립생활을 버텨낼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이다. 고립생활로 인한 경제적 피해도 문제지만, 고립생활의 장기화로 인한 스트레스, 불안, 우울증 등 정신적 고통을 이겨낼 수 없는 사람들도 실제로 허다하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에 국한된 현상이긴 하지만, 미국시민들 중 상당수가 몇몇 주정부의 엄격한 통제에 반발하여 거리로 몰려나와 항의를 하면서 총기까지 휘둘러대고 있다는 뉴스는 그리 놀라운 뉴스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이란 원래 이성적인 존재라기보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충동과 욕망과 정념에 휘둘려 때로는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 25일부터 이어온 국립문화시설의 휴관 조치로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이 휴관을 안내문이 붙여 있는 가운데 정부의 ‘생활속 거리두기’ 발표로 6일부터 제한적 재개관을 한다.  2020.05.03
지난 2월 25일부터 이어온 국립문화시설의 휴관 조치로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이 휴관을 안내문이 붙여 있는 가운데 정부의 ‘생활속 거리두기’ 발표로 6일부터 제한적 재개관을 한다. 2020.05.03ⓒ김철수 기자

2.
그러니까 지금 세계의 정부들은 단지 역병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이 역병에 관련해서 중대한 딜레마에 처해 있는 셈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생명이냐 경제냐 하는 선택의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의 생계를 위해서는 경제가 살아나야 하지만, 경제를 살리자니 상당한 인명 손실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딜레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명쾌한 선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 대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타협 혹은 협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면역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건강 약자들-주로 고령층과 빈곤층-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고 경제를 살리는 쪽에 역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상당한 경제적 희생을 각오하고 시민들의 생명을 지키는 방향으로 좀더 적극적으로 갈 것인가, 둘 중 하나의 형태로 해결책이 강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국가는 거의 예외 없이 전자를 택할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봐도 대체로 그 방향임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오늘날 ‘경제성장’이라는 신(神)을 섬기지 않는 국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꼭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국한된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찍이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사회계약’의 논리로써 ‘(인민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서 근대적 국가의 존립을 정당화했으나, 그 이후 실제로 국가권력은 어디서나 대다수 인민의 생명과 자유보다는 (유산계급의) 재산을 보호·장려하는 데 집중해왔다는 것은 근현대의 역사가 잘 알려주고 있는 사실이다.

하기는 ‘경제성장’이라는 주술은 국가뿐만 아니라 다수 민중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일반대중의 뇌리에는 경제가 성장을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깊이 박혀져 왔고, 그러한 세뇌작용의 연장선상에서 지금 코로나 환란의 와중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은 정부 당국자 못지않은 걱정과 불안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렇기에 지난 수개월간 코로나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정신적 상해를 입은 사람들의 존재는 단지 그날그날 방역당국이 발표하는 수치 이외의 별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지도 모른다. 하기는 오늘의 세상인심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외국의 예이긴 하지만 국가경제를 위해서는 고령층이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희생되어도 좋다는 파시스트적인 사고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은밀히 내비치는 정치가들도 적지 않은 세상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국가가 경제 살리기에 열중하는 것은, 이렇게 하면 조만간 코로나 사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 경제적 활력을 되찾을 것이라는 암묵적인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기대는 합리적인 것일까?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코로나 이전의 경제라는 게 과연 되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산업생산과 소비활동이 둔화하거나 정지되는 상황이 몇달 째 계속되자 우리는 참으로 뜻밖의 경험을 하고 있다. 즉, 대기가 청명해지고, 하늘과 바다가 조용해지고, 도심이 한가로워지고, 자연만물이 생기를 되찾은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의 삶이 매우 부자유스러워졌다고는 하지만, 코로나 이전의 우리의 삶은 미세먼지 지옥에 갇혀 있었다. 그 지옥 속에서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까지 뛰놀지도 못하고, 건강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불안 속에서 조마조마한 나날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WHO의 추산에 의하면, 최근 몇년 동안 세계적으로 미세먼지로 인한 추가적인 사망자의 수효는 연간 400만을 넘는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예상되는 기간 동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의 수효를 훨씬 능가하는 수치이다. 더욱이 산업문명의 전 지구적인 팽창으로 인한 생태계의 손상-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은 대기오염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코로나 이전의 상황으로 복귀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위쪽의 2019년 10월 28일 사진과 아래쪽의 4월 20일 사진을 비교해보면 코로나19 사태로 경제활동이 크게 줄어든 이후 인도 전역의 대기 오염이 크게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인도 뉴델리의 인디아 게이트 앞.
위쪽의 2019년 10월 28일 사진과 아래쪽의 4월 20일 사진을 비교해보면 코로나19 사태로 경제활동이 크게 줄어든 이후 인도 전역의 대기 오염이 크게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인도 뉴델리의 인디아 게이트 앞.ⓒ뉴시스/AP

‘생명이냐 경제냐’ 선택의 딜레마 겪는 세계 정부들
경제성장의 주술은 다수 민중에게도 강력한 영향력 행사
미세먼지 가득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까

3.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단순히 코로나 이전의 생활로의 복귀를 바랄 것이 아니라, 코로나 사태가 무엇을 말하는지 좀더 근원적인 깨달음을 얻을 필요가 있다. 이미 많은 과학자들은 코로나 사태의 원인이 기본적으로 야생동물들의 서식지에 대한 파괴에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코로나 사태도 결국 생태적 재난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고대, 중세에도 역병은 창궐했다. 그런데 조금 자세히 보면, 기원전 430년 고대 아테네에서 정체모를 역병이 창궐한 것이나, 14세기 중엽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각기 당대에 가장 인구가 밀집되어 있던 지역, 즉 교역활동이 성행하는 무역항이나 지중해 연안 상업도시들을 거치면서 들불처럼 번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인간사회를 괴롭히는 역병 창궐의 배경에는 언제나 과도한 도시화, 상업화, 교역활동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알려준다. 현재의 코로나바이러스가 고대, 중세의 역병에 비해 차이가 있다면, 감염속도가 매우 빠르고 그 확산 범위가 전 지구적이라는 점인데, 이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로 지구화된 세계경제 탓임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많은 전문가들은 코로나 사태와 유사한 상황이 앞으로 빈발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게 예상하는 것은 첫째 오늘의 인류사회가 지구의 구석구석까지 촘촘한 교역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2∼3세기 동안 화석연료 대량소비와 기계기술시대를 거치면서 세계는 지금 인구과잉 상태이다. 거기에 세계를 압도하는 경제성장 논리는 필연적으로 온갖 환경파괴를 수반한다. 이런 모든 조건을 감안할 때,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들이 인간사회로 근접해올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따라서 인간과 동물의 빈번한 접촉에 의한 역병의 창궐은 충분히 예견되는 재난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의 이러한 예견이 실제로 현실이 된다면, 지금부터 적어도 몇 십년간 인류사회는 어떻게 될까? 기후변화라는 파국이 이미 닥친 상황에서 역병까지 빈발하면, 경제활동은 물론, 사회적 생활이 전면적으로 정지되는 사태가 끊임없이 벌어질 것임은 불문가지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태의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단이다. 즉, 코로나 사태의 원인은 기후변화의 원인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명확하다. 즉, 기후변화를 초래하는 원인인 화석연료 의존적 경제에서 벗어나 재생 에너지와 자원의 순환적인 활용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로 신속히 전환하는 방법 말고는 없는 것이다(기후파국을 막으려면 2030년까지, 앞으로 10년 동안, 현재의 화석연료 사용량의 절반을 줄여야 한다는 게 다수 기후과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환의 노력보다 어쩌면 선행돼야 할 보다 중요한 것은, 성장논리에 입각한 현재의 산업경제가 얼마나 어리석고 자멸적인 것에 대한 통절한 인식일 것이다. 왜냐하면 생계를 부양하는 방법이 생명·생존의 궁극적 토대인 자연세계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산업경제의 정체를 똑똑히 인식해야만 이 시점에서 그러한 ‘전환’이 왜 절실한지에 대한 사회적·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는 근년에 들어 기후위기에 관련해서 기존의 화석자원 기반 경제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부쩍 커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예컨대 ‘그린뉴딜’이라는 아이디어가 새로이 부각되고, 재생 가능 에너지의 신속하고 광범한 보급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석에너지에서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만이 전부일 수는 없다는 점을 또한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아니, 그 전환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으로서도, 아마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삶’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숙고된 질문일 것이다.

풍요로운 삶이 좋은 삶인가
기후위기는 거듭된 기술혁신의 결과이기도
우리와 다음세대의 인간다운 생존·생활의 길 찾아야

우리는 오랫동안 별 생각 없이 물자와 에너지를 흥청망청 소비하는 생활을 ‘풍요로운’ 삶이라고 오해하고, 휴가라면 으레 항공여행과 골프와 크루즈항행 따위를 떠올리면서 그게 ‘좋은 삶’이라고 믿는 정신적 빈곤 속에서 지내왔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우리에게 ‘좋은 삶’에 대해 차분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드문 기회가 주어졌다. 그리하여 싫든 좋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립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실제로 사람의 삶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인지, 무엇이 필수적이며 무엇이 사치스러운 허영인지를 부지불식간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풍요’가 아니라 ‘자유’라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당 기간의 억제된 소비생활 끝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우리의 삶에서 정말 필요한 물건은 몇 가지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건강한 먹을거리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좋은 농사와 노동, 비옥한 흙과 맑은 공기와 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좋은 인간관계와 공동체적 연대 이외의 모든 것은 결국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깨달았다. 따져보면, 현대경제가 생산하는 것은 거의 전부가 쓰레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쓰레기를 양산하고, 그런 쓰레기를 향유하기 위해서 산업문명은 하늘과 바다를 더럽히고, 생명체들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구조적으로 유린하는 만행을 끝도 없이 저질러온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에 불을 지핀 급진적 사상가 토마스 페인이 공화주의 혁명사상을 고취하려는 목적으로 썼던 팸플릿의 제목은 ‘상식’이었다. 그는 군주제가 아니라 공화제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상식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지금 새로운 상식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이윤추구의 경쟁이 아니라 공생의 윤리와 실천만이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보증한다는 상식 말이다. 생각해보면, 공생의 윤리는 인류사의 오래된 경제적 상식이었다. 역사가들이나 인류학자들이 ‘도덕적 경제’라는 이름으로 불러온 경제행위가 바로 그것인데, 그 핵심에는 물질적 이익의 증진이 아니라, 돈독한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이 경제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아이디어가 들어 있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뉴시스

다행스럽게도, 코로나 사태라는 비상상황 속에서 우리는 공생의 윤리가 새로운 상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단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기본소득이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아이디어의 실현 가능성 말이다. 아직도 오해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기본소득은 무엇보다 임금노예를 철폐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수단일 수 있는데, 그 기본소득이라는 개념이 이번의 비상상황을 통해서 꽤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다른 한편,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대면접촉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우리는 전자정보기술과 인공지능, 로봇기술의 유효성과 그 한계(혹은 문제점)에 대해서 숙고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이 더 이상 단조로운 기계적인 노동과정에 붙들려서 인생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새삼 분명해졌다.

물론,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재난지원금을 그대로 기본소득의 한 형태로 간주하기는 어렵고, 노동시간 단축의 실현이라는 과제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어쨌든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이 기회를 통해서 하나의 사회적 상식으로 떠올랐다는 것, 그리고 노동시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되더라도 생존에 필수적인 진짜 경제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점이 명확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수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것은, 국가권력과 지배층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이다. 예컨대, 지금 문재인 정부는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면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의욕을 또다시 강력하게 표명하고, 이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통해서 ‘경제선진국’을 만들겠노라고 공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사고의 발현임은 말할 것도 없다. 경제와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혁파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모든 기술혁신은 언제나 탐욕스러운 자본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할 뿐임은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입증되어온 사실이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기술혁명으로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대규모로 사라진다는 점이다.

고대 로마제국에 한 영민한 기술자가 있어서 자신이 발명한 노동절약적 장치를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데 쓰면 좋겠다고 황제에게 진언했을 때, 당시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를 칭찬하면서도 “나는 내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면서 그 기술의 채택을 거부했다. 이것은 새로운 기술을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국가운영의 책임자라면 민중의 삶에 대한 장기적이고, 깊고 섬세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다. 우리는 오늘날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적 위기는 거듭된 기술혁신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점을 잊고 또 다시 새로운 기술로써 난국을 타개하려는 것은 매우 우매한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활로는 또 다른 기술혁신에도, 새로운 국부의 창출에도 있지 않다. 뒤늦게나마,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오직 공생의 정신에 의거한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생활윤리를 철저히 습관화함으로써만 우리와 다음세대의 인간다운 생존·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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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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