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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기억과 공간] 오월걸상에 앉은 5.18

“작년 오월 박경리, 재작년 오월 권정생과 피천득이 이 계절 한가운데서 작별을 고했고, 이제 흠모해오던 그이마저...
잔인한 오월!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으나
사랑하는 이여, 이제 그대는 영원히 오월 속에 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그대 지금 오월 속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썼던 짧은 글입니다.

짙어진 녹음(자료사진)
짙어진 녹음(자료사진)ⓒ사진 = 뉴시스

그리고 오월이면 언제나 생각나는 시가 있었습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로 시작하는 피천득의 ‘오월’입니다. 이 시는 뭔가 모를 인생사의 덧없음, 청춘의 헛헛함과 강한 생명력으로 제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스물 한 살 나이였던 오월...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나는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이제 5.18입니다. 신록을 바라다보다가도 살아남지 못한 이를 떠올리면 참으로 원통합니다. 연한 녹색이 나날이 번져 가지만, 대검을 착검하여 총부리를 겨눈 이들은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렇게 신록은 짙어지고 말 것이나,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유월이 되면 녹음이 우거지고 정열의 태양이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경기도청 정문 도민쉼터에 자리잡은 오월걸상
경기도청 정문 도민쉼터에 자리잡은 오월걸상ⓒ사진 = 경기도

지난 11일 다섯 번째 오월걸상이 목포, 부산, 명동성당, 마석모란공원에 이어 경기도청에 세워졌습니다.

경기도청 오월걸상은 홍성담 화백의 판화작품 ‘횃불 행진’(1983)이 새겨진 큰 돌을 뒷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월걸상을 만든 돌은 경남 함안 마천석이라 하고 뒷 배경을 만든 돌은 경남 거창석이라고 합니다. 경상도의 돌이 광주 사람들의 그 때 그 정신과 희생을 기억하는데 쓰인 셈입니다.

오월걸상은 1980년 광주 5.18민주화운동(민중항쟁)의 정신을 담은 상징물입니다. 전국 각지의 이 조형물엔 공통적으로 ‘오월걸상 1980.5.18 – 5.27’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 외엔 아무런 표식도 없이 저마다 다른 형태와 다른 글귀를 담은 오월 걸상들이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의 격렬했던 그 때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 마석모란공원 내 설치된 오월걸상
경기도 남양주 마석모란공원 내 설치된 오월걸상ⓒ사진 = 오월걸상위원회

오월걸상 기획자 중 한 사람인 서해성 작가는 작품의 취지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월을 불러내 한 개 걸상으로 만들고자 한다. 오월이라는 시간의 뼈에 걸터앉은 우리 시대를 말하고자 함이고, 오월의 이름 위에 우리가 몸과 시대와 양심을 의탁하고 있음을 일상에서 깨우치고자 함이다.
오월은 오월 밖으로 불러낼 때만 생생한 현재로써 오월일 수 있다. 오월의 시간을 일상에서 만날 수 있을 때만 오월은 오월이다. 그러므로 오월은 광주라는 공간에 갇힐 수 없고 어느 해 오월이라는 특정한 시간에 한정될 수 없다. 역사에서 오월은 늘 ‘장기(長期)’ 오월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오월이다. 그 거룩한 헌신과 희생에 걸터앉아 우리 시대는 창조되었다. 오월을 일상의 공간에 한 개 걸상으로 불러내는 까닭이다.
더 광주 밖으로, 더 오월 밖으로 불러낸 오월 걸상에 앉아 날로 오월을 벼리어내고자 하는 뜻이다.
기억의 배신과 맞서기 위하여 이 봄날, 팔도에 오월걸상이라는 인간양심과 시간의 나침반을 놓는다.
스스로 죄 있는 자라고 믿는 손길은 깊다.”

서울 명동성당 정문 앞에 높인 오월걸상
서울 명동성당 정문 앞에 높인 오월걸상ⓒ사진 = 김명식

오늘 저는 목포를 시작으로 부산, 수원, 남양주를 돌아 명동성당 오월걸상에 걸터앉습니다. 시대의 인파 사이에서 “더 광주 밖으로, 날로 오월을 벼리어내고자” 앉습니다.

이제 오월엔, 매년 찾아오는 오월이 되면, 그리운 사람들과 오월의 시가 생각나기보다는, 5.18이 걸터앉은 이 ‘오월걸상’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 같습니다.

김명식 건축가 · 건축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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