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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노동이야기] 포스트잇이 던진 질문

4년 전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같은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에 수많은 포스트잇이 나붙던 와중이었다. 19세 스크린도어 수리공의 죽음에 슬퍼하며 사람들은 수많은 포스트잇을 붙였다.

그 중에는 이한빛PD의 것도 있었다. 그는 당시 CJ E&M에 입사해 tvN 드라마 ‘혼술남녀’ 제작팀에서 조연출로 일하는 중이었다. 격무에 시달리던 이한빛PD는 그해 10월26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이한빛PD가 김 군에게 남긴 포스트잇의 내용은 “오늘도 수고했다”였다. 그는 구의역에 다녀와 자신의 페이스북에 “얼굴조차 모르는 그이에게 ‘오늘도 수고했다’는 짧은 편지를 포스트잇에 남기고 왔다. ‘오늘’이라 쓰지 않으면 내가 무너질 것 같기에 오.늘.이라 힘주어 적었다”는 글을 남겼다.

1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역에 마련된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 희생자 추모 장소에 시민들의 추모 메시지가 적힌 수백장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2016.06.01
1일 오후 서울 광진구 구의역에 마련된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 희생자 추모 장소에 시민들의 추모 메시지가 적힌 수백장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2016.06.01ⓒ양지웅 기자

오늘도 수고해야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오늘도 살아남는 것은 우연인 세계. 노동의 수고에 상사의 모욕과 동료들의 일상적인 해고와 초를 다투는 성과의 과도함을 욱여넣어, 수고로움이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이 세계에서 고 이한빛PD는 자신에게, 그리고 구의역 김군에게 수고로움을 전했다.

‘힘을 들이고 애를 씀’이라는 뜻을 가진 수고는 본래 ‘고통을 받음’(受苦)이라는 어원을 가진다. 오직 노동의 수고로움에 가격이 매겨지는 사회란, 노동이 가치있는 행위로 인정받는 사회가 아니라 노동의 수고로움조차 헐값에 매겨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노동의 영어, 스페인어 단어 ‘Labor’의 어원은 고문이나 속박을 뜻한다. 성경에서 노동을 ‘신이 내린 형벌’로 묘사한 이래, 노동과 고통을 연결하는 모든 유구한 철학적 의미들을 다 모아놓는다 해도, 오늘날 노동의 고통을 두고 노동에 내재한 본질이라고 규정하는 모든 시도들은 틀렸다.

오늘날 노동이 고통스런 이유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최적의 생존법이라는 믿음이 허상인 것을 알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는 궁지에 우리들의 삶이 몰렸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잇지 않으며, 나의 생존을 타인의 삶에 연관시키지 못한다. 오늘, 그 다음의 삶이 주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오늘의 노동에 과도하게 부착된 고통을 ‘수고로움’으로 낙관하게 만든다.

'2020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에서 산재사망 사고로 세상을 떠난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 위 놓인 하안 국화. 2020.04.27
'2020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에서 산재사망 사고로 세상을 떠난 노동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구조물 위 놓인 하안 국화. 2020.04.27ⓒ김철수 기자

페미니스트 연구자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는 ‘실현이 불가능하여 순전히 환상에 불과한’ 대상에 대한 애착, 끔찍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되는 상황으로 되돌아가려는 애착심이 가지는 삶의 태도와 감정에 대해 ‘잔혹한 낙관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 면에서 구의역의 포스트잇은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의 수고로움으로 포장된 낙관이 은폐해왔던 고통이 되어버린 노동의 기념비이다. 각자 수고하는 와중에 짧게 써내려 간 포스트잇들 사이에 포스트잇을 덧붙인 이한빛PD는,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은 스크린도어 수리공의 죽음 위에 자신의 수고로운 고통을 덧붙였다. “오늘도 수고했다”는 메시지는 아직 살아있는 노동과 때 이른 죽음을 연루시킨다.

김용균 노동자 사망 1주년 전시회에서 작가 노순택은 포스트잇으로 가득 메워진 2016년의 구의역 대형 사진을 전시했다. 사진 속 스크린 도어 위에는 “김용균은 구의역에서 죽었다”는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고, 작품을 본 사람들로 하여금 구의역 포스트잇 위에 김용균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을 덧붙이도록 했다.

포스트잇이 덧붙여질수록 그 내용이 구의역 김군의 것인지 김용균의 것인지 식별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무수하게 덧붙여진 메시지의 과잉이 포스트잇 자체를 커다란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오게 한다. 수많은 포스트잇들이 구축한 기념물은 이 사고들을 19세, 24세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명명하지 않는다. 우연한 불운에 의한 죽음이란 규정은 개인과 사회가 이 죽음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표시할 뿐이다. 이 ‘책임없음’의 자리에서 노동의 수고는 잔혹한 고통이 되며, 무엇보다 제도화된 고통이 된다.

23일 구의역참사 4주기 추모식 뒤 구의역 승강장에 붙은 포스트잇.2020.05.23
23일 구의역참사 4주기 추모식 뒤 구의역 승강장에 붙은 포스트잇.2020.05.23ⓒ민중의소리

우리 사회가 이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포스트잇들이 이들 죽음의 책임을 묻는다. 국가와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이들 죽음의 책임에 더해 살아있는 우리의 위험을 연관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개별의 수고와 고통을 연결시키지 않은 죽음의 애도란 허구적인 안전에 대한 감각만 사회에 확산시킨다.

이들의 노동이 나의 노동과는 무관하다는 인식, 나의 노동은 저만큼 위험하지 않다는 인식은 ‘나’의 안전을 확증한다. 위험에서 최대한 회피하려는 노력이 개별화될 때, 그에 따른 안전감은 자신의 일상적인 위험을 위험으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오인된 감각이 된다. 그 안전한 거리두기에서 위험은 무능력한 집단의 열악한 노동이 감수해야 할 것으로 배제된다.

각 노동의 차별적 지위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사회에서, 노동자가 위험을 알리는 신호는 사회적으로 순환되지 않는다. 국가는 그러한 사회 위에서 당장 해결할 위험과 당장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위험을 구별한다. 기업은 정확하게 사회가 용인해 준 범위 내에서 위험에 관한 합법과 탈법, 편법을 선택한다.

전주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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