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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의 역사로 생각하기] 이용수와 솔제니친, 흥분보다 탐구를
심용환 이용수
심용환 이용수ⓒ민중의소리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기억연대 그리고 윤미향 당선자를 둘러싼 논쟁은 이미 지나치게 뜨겁다. 미래통합당과 보수언론은 노골적이고 정략적으로 이 문제를 활용하고 있고, 무분별한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면서 사태의 정확한 실체를 가늠하는데 언론의 보도 기능은 오히려 심각한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무려 30년을 쌓아온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국민 대부분이 공감하며 받아들였던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그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인터뷰를 두 차례 했을 뿐인데 며칠 사이에 이용수 할머니를 향한 노골적인 비방과 진보운동의 존속을 명분으로 한 진영 논리는 이미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요동치고 있다.

피해자 보호라는 사회적 동의는 어디로 갔을까. 피해자의 아픔에 동감하고, 고통의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 함께 외쳤던 수많은 시간은 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일까. 피해자면서 운동의 주체이기도 했던 이용수 할머니는 운동의 방향성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기는커녕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격렬한 감정의 골만 엉뚱한 곳에서 맴돌고 있다. 대체 왜 이런 것일까.

솔제니친을 예로 들어보겠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수용소군도]를 쓴 솔제니친(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은 한 때 세계적인 명사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실상, 특히 수용소의 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소비에트 연방’은 자랑스러운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닌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버금가는 전체주의 국가라는 비난에 시달리게 된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극적인 변화였다. 1945년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만 하더라도 전 유럽의 공산당원들은 붉은 군대의 입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들이 미국과 영국군에 협력을 했던 이유는 기다리다보면 소련군이 이 곳을 해방해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만큼 소련은 유럽의 희망이었고, 공산주의는 혁명과 해방의 사상이었다.

하지만 엉뚱한 문제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스탈린은 레닌주의를 독점했고 스스로를 신성화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그리고 숙청! 1934년에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자 키로프를 비롯하여 100여 명을 총살하였고 280만 당원 중에 무려 100만 명을 체포하였다. 1936년부터 1938년 사이에는 무려 72만 4000여 명이 사형선고를 당할 정도로 대숙청이 벌어졌다. 이 시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리코프를 비롯하여 러시아 혁명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던 인물들이 모두 사라졌고 40만 명 정도가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2차 세계 대전기간 동안에는 250만명의 소수민족을 강제로 이주시켰고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수년간 반유대인정책이 집요하게 추진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수용소가 소련 전토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만행과 맞먹는 스탈린의 가혹한 인권유린
상황이 바뀌자 역사적 위인이 된 솔제니친

구소련 작가 솔제니친
구소련 작가 솔제니친ⓒ뉴시스/AP

1945년 2월 포병장교였던 솔제니친은 눈치 없는 편지 한 통을 쓴 덕분에 1953년까지 8년간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고 다시 3년간 외지에서 유배 생활을 한다. 솔제니친의 복귀는 흐루쇼프(Nikita Sergeevich Khrushchyov)가 권력을 잡으면서였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았던 흐루쇼프는 1956년 2월 스탈린 통치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을 감행했고, 비공식이라는 미명 하에 비판 전문이 전 세계에 퍼져나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또한 수용소로 끌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복권이 이루어진다. 1962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세계적으로 각광 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흐루쇼프의 정치적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작 10여년 만에 상황은 180도로 뒤바뀐다.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 후 브레즈네프(Leonid Ilyich Brezhnev)가 집권하였고 그는 스탈린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다. 1974년 솔제니친 추방. 고된 망명생활은 오히려 그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 자유와 인권을 위해 평생을 싸운 자유세계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1991년. 개혁과 개방을 외친 고르바쵸프(Mikhail Sergeyevich Gorbachyov)에 의해 포괄적인 복권령이 내려지면서 20년 넘게 망명생활을 했던 솔제니친은 비로소 조국에 돌아간다. 서방언론은 그를 찬사하기에 급급했고 반공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의 망령과 싸운 자유의 투사! 솔제니친의 궤적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맞아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해진 솔제니친?
이용수 할머니는?

그러나 명예로운 귀환 이후 솔제니친은 종종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낙후된 러시아의 현실을 두고 대통령과 불화를 겪었고, 뒤늦게 민족주의에 경도되어 서방의 자유주의자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무엇보다 그는 아내를 버리고 젊은 여성과 재혼을 했는데 이 부분은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솔제니친이 변질한 것일까? 따져보면 비난의 원인은 솔제니친 개인에게 있다기 보다는 세계 정세에 있었다. 푸틴 이후 러시아의 민족주의가 강화가 되었다든지, 그간 관심이 덜했던 젠더 이슈가 부상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운동의 문제는 마치 할머니들이 바라는 것들이 다 같다는 식으로 단순화하고 오히려 할머니들의 자기 결정권을 빼앗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해. ‘피해자가 원한다’라는 말을 내세워 왔지만 그 자세가 피해자를 억압하고, 오히려 피해자의 의견도 묵살하게 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었던 거지.”

친한 선배의 인상적인 조언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애초에 복합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강제 징용, 징병과 더불어 끔찍한 인권 유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인 문화로 인해 40여 년 간 침묵을 강요받았다. 1970년대 초반 배봉기 할머니가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누가 관심이나 가졌던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가능했던 힘은 여성학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여성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윤정옥 등은 10대 시절 ‘정신대 근로령’에 동원될 뻔 했던 경험을 추적하여 위안부 문제를 복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88올림픽 당시 소위 ‘기생관광’을 돈벌이로 삼으려했던 흐름에 대응하여 여성단체의 주도로 피해자를 찾았고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 오늘날 수요 집회의 기원이었다. 여성, 여성 인권, 여성 운동을 빼놓고 현재를 설명할 방도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다수에게 수요 집회는 어떤 의미였을까. 반일, 반일. 오직 반일. 일본 극우파의 망언, 그로 인해 치밀어오르는 분노 그 이상으로 무엇을 공감하고 있었을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할머니가 25일 오후 대구 수성구 인터불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05.25.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할머니가 25일 오후 대구 수성구 인터불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05.25.ⓒ뉴시스

할머니들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강제 동원은 대부분 취업사기로 이루어졌고, 상당수의 민간 업자가 존재했고, 10대 중반부터 20대까지 다양한 피해자가 있었고,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 취약 계층이고 상당수는 가정불화가 심했으며 교육비를 마련하고자 취업을 원했던 이들이었다. 취업 사기도 강제 동원이 유형이고, 조선인이 포함된 민간업자는 일본 정부가 통제했고, 위안부를 비롯한 징용, 징병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가난한 계층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화 [귀향]에서 자극적으로 묘사된 15세 소녀, 군인에 의한 위협적 동원, 끝도 없이 강간과 고문을 당하는 조선의 불쌍한 처녀들 외에 어떤 이미지가 있을까.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언사가 오갈 때마다 등장하는 것이 독일이다. 하지만 독일이 프랑스, 폴란드 등과 역사교과서를 개발하고, 학생들이 함께 수학여행을 하는 등 역사적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벌일 때 피해 국가였던 프랑스와 폴란드 국민들이 그보다 더한 의지로 독일과 어울렸다는 사실에는 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일까.

이용수 할머니를 솔제니친 취급하기는 쉽다.

‘이 분 변했네’

하지만 친한 선배의 조언처럼 애초에 상황은 복잡했고 운동을 이어가는 것은 그리 만만한 과정이 아니다. 만약, 진심으로 이 문제에 관심이 있고 조금이라도 해결의지가 있다면 보다 근본적인 노력에 천착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아있는 17명의 할머니와 함께 차분하게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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