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이하나의 한사람 이야기] 내가 좀 더 똑똑했다면

이 씨는 예순일곱 살이었다. 흔히 여성 노인들을 대하는 복지관계자들은 쉽게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나도 별생각 없이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쉽게 써 왔다. 남성노인에게도 쉽게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어르신’이라고 부르자니, 어르신이 대체 몇 살부터인지 너무 노인 취급하는 것 같다는 이유였다. 60대 노인은 80대 노인에게 ‘어르신’이라고 부르지만 80대 노인이 60대 노인에게 ‘어르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젊은이들은 ‘아주머니’와 ‘어르신’ 사이를 메꿀 단어로 ‘어머님’을 선택했다.

이 씨의 신상이력을 보니 ‘어머님’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이 씨는 결혼한 적이 없었다. 자녀도 없었다. 담당자는 이 씨가 주로 적극적인데 가끔 갑작스럽게 침체되어 우울증이 염려된다고 했다. 이 씨는 담당자가 전한대로 자신이 우울증인 것 같다고 말했다.

“몸이 많이 아파요.” 이 씨는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말로 첫 만남을 시작했다. 나는 이 씨에게 특별히 불편하신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 씨는 당뇨를 앓고 있었다. 류머티즘 관절염이 있어 일하기 쉽지 않은데도 복지관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씨의 가족은 모두 어딘가 아팠다. 7남매로 태어난 이 씨의 남매 중 넷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자신과 남동생, 유방암을 앓는 언니가 있었다. 조카도 유방암 수술을 받아 이 씨가 자주 조카네 집에 가서 살림을 돕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pixabay

이 씨의 아버지는 변기와 세면대를 팔고 설치도 하는 장사를 했는데 경제적으로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몸이 약했다. 아버지는 저녁 늦게 들어와 자녀들을 무릎 꿇게 하고 하루 일과를 물으며 훈계를 했다. 오빠와 언니들 모두 공부를 잘했다. 바로 위의 언니는 아버지에게 가끔 대들기도 했는데 오히려 아버지는 그렇게 대드는 언니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이 씨는 아버지가 큰 소리만 조금 내도 두려워서 고개 한 번 똑바로 든 적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통금시간이 엄격했기 때문에 학교 끝나고 해가 벌겋게 떠 있을 때도 달려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친구를 만나면서도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두려워 노는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점점 밖으로 나가는 횟수를 스스로 줄였다.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느니 그냥 집에 웅크리고 있는 게 나았다. 혼자 집에 머물며 할 수 있는 일은 소설책을 읽거나 일기를 끄적이고 라디오를 듣는 게 전부였다. 이 씨가 방에서 혼자 소설책을 읽고 있으면 아버지는 “쓸데없는 짓 한다.”고 윽박질렀다. 언니가 대차게 아버지에게 대들 때는 조마조마하면서도 부러웠다. 하지만 이 씨는 언니처럼 단 한 번도 아버지에게 고개를 빳빳이 세운 적 없었다. 한 번은 학교 밖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참가하려고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했다. 아버지는 백일장 장소가 너무 멀어 돌아오는 길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다. 이 씨는 그날 혼자 방에서 오래 울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니 오빠들은 모두 명문대에 입학했다. 이 씨는 어디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풍족했으나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 못한 유년
가족들 속에서 아픈 가족 돌보며 보낸 세월
“내가 좀 더 똑똑했으면. 우리 언니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씨는 수예를 배웠다. 작은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도 해봤다. 위로 오빠 둘이 모두 의대를 들어갔는데, 큰오빠는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져 학업을 중단할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가 큰오빠에게 제화점을 차려주었고 둘째 오빠가 졸업 후 병원을 열었다. 오빠의 권유로 둘째 오빠 병원에서 원무과 일을 했다. 간호사 자격을 딸 필요도 없어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냈다. 직원들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오빠가 아버지보다 더 살갑게 이 씨를 챙겼다. 이 씨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다. 병원을 다닐 때, 이런저런 선자리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선자리가 들어오는 족족 퇴짜를 놨다. 부족함이 많은 자식이니 좋은 자리에 시집을 가야 한다며 신랑감을 계속 골랐다. 이 씨가 서른을 넘기자 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몸져누웠고 이 씨에게 어울릴만한 신랑감을 구해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이 씨는 퇴근 후에 서예도 배우고, 수예도 배우고 꽃꽂이도 배우고 수영장도 다니며 나름대로 즐겁게 지냈다. 어머니는 그 정도 배웠으면 가게라도 하나 차려 독립하라고 했지만, 이 씨는 딱히 뭔가를 꼭 열심히 해서 가게까지 차려 독립할 필요를 못 느꼈다.

이 씨의 남매들은 중년을 넘기며 차례대로 아프기 시작했다. 이 씨의 고용주나 다름없던 병원을 하던 오빠가 당뇨합병증으로 사망하기 전에 병원은 문을 닫았다. 이 씨는 가족들이 보태준 돈으로 살던 동네에서 작은 가방가게를 차렸다. 자신의 가게에 있는 것도 잠시. 올케는 일하러 나가야 해서 이 씨가 올케를 대신해 오빠의 병간호를 맡았다. 그때쯤 큰오빠도 당뇨합병증이 심해졌고, 큰언니가 유방암에 걸렸다. 이 씨는 가게를 지킬 시간이 없어서 아예 문을 닫고, 본격적으로 가족들의 병간호에 나섰다. 이 씨의 두 오빠와 두 언니가 비슷한 시기에 앓고 병들고 죽었다. 그때쯤 어머니도 노쇠해 어머니도 돌봐야 했다. 오빠들이 죽고 큰언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둘째 언니도 당뇨 합병증으로 운신하지 못하다 세상을 떠났다. 곧이어 바로 위의 언니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이 씨는 다시 병간호에 뛰어들었다. 막내 언니가 항암치료를 잘 견디고 건강이 회복될 무렵 막내 언니의 딸인 조카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조카는 이미 결혼해 어린아이를 두고 있었다. 이 씨는 요일별로 언니네 집과 조카의 집을 오가며 빨래와 설거지 청소를 도맡아 했다. 언니도 교수를 지냈고, 조카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작년부터는 이 씨가 조카네 살림을 정리하고 손주를 돌보는 걸 맘에 안 들어가는 것 같다. 큰 소리 내고 한 번 싸운 뒤로 발길을 줄였다.

노인의 손
노인의 손ⓒpixabay

이 씨는 나를 만날 때쯤, 조카네도 발길을 줄이고 유방암 투병 중인 언니와 이따금 전화통화만 하며 지냈다. 이 씨는 일주일에 두 번쯤 복지관 자원봉사를 나가고 오후에는 서예를 배우러 다녔다. 관절염 때문에 손마디가 아파 예전처럼 공예를 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고 했다. 이 씨는 아버지 얘기를 하며 여전히 무서운지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유럽에 여행을 갈 때 트렁크에 짐을 넣던 때를 잊을 수 없다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당뇨에 고지혈, 고혈압, 관절염도 있고 유선염도 있어요. 언니가 죽으면 나는 이제 누구랑 얘기하고 사나 모르겠어요. 근데 선생님, 진짜 후회되는 건요, 나도 좋은 직업을 가졌으면 내가 그렇게 안 살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 언니들처럼 교수가 되거나, 오빠처럼 의사가 됐으면 아무도 나한테 뒤치다꺼리하라고 하지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전문직이고 돈도 잘 벌면 내가 식구들 아플 때마다 병원 가서 앉아 있진 않았을 거잖아요. 그렇죠? 내가 좀 더 똑똑했으면. 우리 언니처럼.”

이 씨는 가족 외에 다른 공동체에 속해본 적이 없었다. 병들고 아픈 가족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이 씨는 복지관에서 사람을 만나며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지 3년이 되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고립된 이 시기에, 이 씨가 문득 생각났다. 친구는 좀 사귀셨는지. 요즘은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지. 늦었다 하지 말고 연애도 하시면 좋겠다.

이하나 집필노동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