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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동남아_7] 버마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숨진 아시아 코끼리, 린왕

동남아연구를 한다고 하면 나에게 “대만도 잘 알아요?” 되묻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대만은 동남아는 아니지요.”라고 일단 답해놓지만, 사실 대만이 어디에 속하는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중국’ 정책을 내세워 마카오와 홍콩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 서겠다는 것이 아니다. 차이잉원 총통이 이끄는 민진당에 대한 대만인들의 지지를 보면 현 단계 중국 본토와는 구분된 독립지향 의견이 우세하다. 하지만 중국-대만의 양안관계(兩岸關係)의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이 두 중국의 관계는 아주 복잡하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국제정치는 나의 전공분야도 아니지만, 최근 강화되는 미-중 갈등의 장이 동아시아가 되는 것은 역내 시민으로서 그다지 달갑지 않다는 현실주의적 입장 정도만 밝혀둔다.

복잡한 현실 국제정치를 차치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해 동남아와 동북아의 연결성에 대해, 한 동안 파고들었던 이야기를 풀어내보려 한다. 시점은 2년 전이고 이야기의 실마리는 좀 특별한 코끼리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방학 때마다 집을 비우는 해외지역연구자로 오래 살아왔지만, 밖에 있는 동안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머리뒷꼭지가 당겨지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한두 번 딸을 현지조사에 동행시킨 적이 있기는 한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조사도 제대로 안 되고 딸도 오히려 방치되는 시간도 생겨나고. 그래서 그냥 방학은 ‘엄마는 부재 중’으로 참고 견디시라 하는 편이다.

다행히 2년 전에는 남편이 자체안식년을 맞이해 가족이 함께 할 기회가 생겼다. 나는 7월에 필리핀에서 3주의 조사를 끝내고 8월에는 인도네시아로 넘어가는 일정이었는데, 중간에 일주일 동안 가족과 접선해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지도를 펼쳐 놓고 어디로 갈까 탐색에 들어갔다. 후보는 3군데, 홍콩이냐 타이페이냐 오키나와이냐. 최종 결정은 대만의 타이페이. 비용도 감안했지만 최종 결정은 딸이 했다. 왜냐고 물으니, 인스타에 많이 나온다고 한다. 맛집도 많고, 사진 찍기도 좋고, 물가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아열대 분위기인데, 대중교통이나 도시의 면모는 선진국이니 안전한 가족여행지로 최종 낙찰되었다.(한여름에 왜 더운데 가냐 묻지 마시오. 당시 타이페이보다 서울의 기온이 더 높았답니다~)

간만에 마주한 가족은 반가웠고, 여행은 순조롭고 즐거웠다. 일주일의 시간을 보내고 헤어져야 할 날이 되었다. 마지막 일정은 공항행 철도를 탈 수 있는 중앙역 근처 국립대만박물관으로 정했다. 규모나 전시물은 사실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다. 전시물보다는 비교적 이른 1908년, 일제 식민시절에 건축된 2층짜리 고딕양식의 건물 자체가 오히려 관심을 끌 정도였다. 그러다 메인홀 뒤편의 복도에서 본 몇 장의 사진과 짧은 해설이 비상하게 나의 관심을 끌었다. 두 김씨(남편과 딸)가 1, 2층을 돌아다닐 동안 나는 그 사진 앞을 떠나지 못했고, 공항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자카르타에 도착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코끼리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직은 나 역시 사진으로 밖에 만나보지 못한 아시아 코끼리, 린왕의 생애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버마에서 대만으로 이어진 코끼리 린왕의 여정
버마에서 대만으로 이어진 코끼리 린왕의 여정ⓒ민중의소리

먼저 간략한 배경설명부터.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일제는 2차 세계대전의 범위를 아시아전역과 태평양으로 넓혔다. 일본의 동남아 점령도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당시 동남아는 태국을 제외하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의 식민지 상태였는데, 2차 세계대전의 주된 전장이 유럽 본토였기에 동남아에 주둔 중이던 유럽의 식민제국의 군사력은 일본의 침공에 쉽게 무너졌다. 41년 12월 타이를 시작으로 1월에는 버마,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 영국령 말라야, 필리핀에 대한 침공과 점령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42년 3~4월에는 인도양에서 일 해군이 영국왕립해군과의 교전에서도 승리하면서 연합군의 대륙부 동남아를 향한 보급로도 차단되었다.

당시 중국본토의 상황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일제에 대항해 전면항전을 선언하며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나,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 간의 갈등과 부분적 교전도 여전한 상황이었다. 중국국민당은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며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다. 이들에게도 연합군과 국민당군 간의 보급망인 일명 버마통로를 지켜내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다. 버마통로는 일제가 연합군 포로들을 동원해 건설했던 시암-버마 철도(옛날 영화 《콰이 강의 다리》의 배경임)를 가로질러 인도양과 대륙부 동남아의 연합군과 중국남부의 국민당군을 연결하는 전략적 전선이었다.

국민당군의 쑨리던(孫立人, Sun Li-jen)을 필두로 한 ‘중화국민 해외원정군’이 윈난-버마 전선에 파견된 것은 이러한 배경 하에 있다. 기록을 찾아보니, 1942년 4월 16일 쑨리젠의 부대는 일군에 승리를 거두고 7천여 명의 영국군을 구출하였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중국원정군은 13마리의 코끼리와 버마인 관리사를 함께 포획했다.

린왕은 그 13마리 중 하나이다. 원난성에서 대륙부 동남아의 산악산림지대에 서식하던 아시아 코끼리들이 일본군에 잡혀 전쟁물자로 관리되던 중이었다. 전차가 들어가기 어려운 산악지대에서 코끼리는 포탄과 대포 등의 군사물자를 옮기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일본군이나 국민당군이나 코끼리를 대하는 용도에는 차이가 없었지만,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코끼리까지 얻은 국민당군들은 그들을 아꼈다고 전해진다. 13마리의 코끼리에 이름을 붙이고 일꾼으로 부렸는데, 그 중 힘은 센데 온화했던 한 코끼리는 아메이(阿美, Ah Mei)라는 이름을 얻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중국 원정군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산악행군 길에 13마리의 코끼리도 함께 했는데, 전쟁과 긴 행군에 지친 6마리는 죽고, 광둥성에 살아서 도착한 코끼리는 7마리였다. 코끼리는 여전히 군대의 자산이었다. 국민당군에 의해 전쟁 기념물 건설 현장에도 동원되고 전후 복구 사업 마련을 위해 베이징, 상하이, 난징, 창샤 등을 돌며 서커스에 동원되기도 했다. 아메이를 포함한 3마리의 코끼리는 쑨리젠이 이끄는 국민당군과 함께 광저우로 옮겨졌다.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중국의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 쑨리젠은 국민당군의 명을 받아 1947년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대만으로 가야했다. 그는 이 길에도 코끼리를 동행시켰다. 그런데 해협을 건너는 일도 동물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보다. 바다 이동 중에 한 마리도 죽었고, 대만의 카오슝의 군사기지에 도착한 코끼리는 아메이와 아페이라는 두 마리 뿐이었다. 카오슝의 군사기지에서도 코끼리들은 일하는 동물이었다. 운반해야 할 물건은 포탄에서 벌목된 통나무로 바뀌었지만. 51년 아페이마저 죽은 후 아메이는 이제 혼자 남게 되었다.(암수컷 구분을 하지 못했던 군인들은 아페이의 상아가 작아 암컷으로 오인해 두 마리를 꼭 함께 데리고 다녔다는 웃픈 기록도 있다).

국립대만박물관의 (1)
국립대만박물관의 (1)ⓒ엄은희

2차 세계대전부터 국공내전까지 고난을 겪은 코끼리 아메이
동물원으로 옮겨줘 린왕으로 새 삶
86세 장수를 하고 죽어서도 박제의 운명
동남아에서 동북아로 이어진 ‘밀림의 왕’ 역정

군은 1952년 아메이를 타이베이 동물원에 이양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타이베이의 동물원은 지룽강변의 유안산(圓山)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물원은 코끼리의 개명도 추진했다. 밀림의 왕을 뜻하는 린왕(林王, Lín Wáng). 동물원 측에서 봤을 때 당시 코끼리는 비주얼이 가장 우월한 동물이었는데, 아명처럼 들리는 아메이보다는 센 이름이 필요했을 것이다. 동물원은 아메이에서 린왕이 된 코끼리를 대접한다는 의미로 반려자로 암컷 코끼리 마란(馬蘭 Malan)을 함께 도입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린왕의 동물원 입주와 개명을 기사화한 기자가 발음을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코끼리의 공식 이름은 ‘밀림의 왕’이 아닌 ‘밀림 번성이’를 뜻하는 린왕(林旺, Lín Wàng)으로 공식기록 되었다.

동물원에서의 삶을 시작한 뒤로 린왕은 비교적 행복하게 살았던 듯하다.(인간 중심적 시각인 것 200% 인정) 숲을 떠나 답답하기는 했겠지만 배우자도 있었고, 대만인들의 사랑도 많이 받아,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단다. 1983년에는 린왕의 66세 맞이 성대한 생일파티도 열렸다. 이후 동물원은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을 린왕의 생일날로 지정해서 해마다 생일파티를 열어줬다고 한다. 타이베이 시정부는 도심 개발을 위해 1986년 유안산의 동물원을 시 남부 무쟈(木栅, Muzha)로 이전시켰다. 린왕이 이동하는 날 타이베이 시민들은 길거리에서 손을 흔들고 차로 뒤따라가며 이사가는 린왕을 배웅했다고 한다.

린왕은 2003년 86세를 살고 한 해 전 죽은 반려자 마란의 곁으로 떠났다. 통상적인 아시아 코끼리에 비해 20년을 더 살 정도로 장수한 셈인데, 대만인들은 거대한 추도 물결이 죽은 린왕에게 전해졌다. 린왕의 울타리 안에는 추모의 꽃이 동산을 이루었고, 그 장면은 TV 뉴스로도 다뤄졌다.

죽은 후의 린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 그는 타이베이 동물원을 떠나지 안/못했다. 사후 실물크기 표본이 되어 타이베이 동물원에 전시된 채로. 대만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더불어.

국립대만박물관의 (2)
국립대만박물관의 (2)ⓒ엄은희

군수물자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노동에서는 해방된 린왕이 암컷 마란을 만나 동물원에서 내내 행복했는지는 모르겠다. 사람이 코끼리 속을 어찌 알겠는가. 그것도 내 나이 두 배 정도 살아낸데다가 이미 저 세상으로 건너간 생명체인 것을. 박제로 남아 있는 지금의 모습도 오늘날의 동물애호가들(더 나아가 종평등주의자)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겠다.

나는 그 격동의 역사적 시대를 견뎌내고, 버마에서 윈난의 산악지대를 걸어서 넘고,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대만에 이른 린왕의 삶의 궤적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포탄 속에서 살아남았고, 동료들을 모두 잃었지만 끝내 살아남아 코끼리로는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린왕.

공식 이름은 밀림 번성이(林旺)이지만, 나는 그 이름을 밀림의 왕(林王)으로 기억하련다.

긴 여운을 품게 해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동남아와 동북아의 연결된 역사지리를 공부하게 되었답니다. 다음에 타이베이를 가게 되면 동물원으로 보러 갈께요, 안녕 밀림의 왕!

엄은희 서울대 사회과학원·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지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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