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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특별기획] 일상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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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 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대학 수업의 한 학기가 끝나간다. 우리 학교는 건물 내에서 모두가 마스크를 쓴다. 절대로 마스크를 벗으면 안 된다. 나는 아직도 학생들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서로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두 눈 뿐이다. 눈빛만으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기는 참 힘들다. 열심히 글을 써 온 학생에게 보란 듯이 웃어주고 싶지만 마스크를 쓰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웃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번 여름까지, 어쩌면 가을까지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신입생이고, 모두 작가를 꿈꾼다.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2020년, 마스크를 쓰고 수업을 듣고,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걷고, 마스크를 쓰고 친구를 만나는 스무 살의 예비 작가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사람과 사람이 멀어지고 끊어지는 시대에는 어떤 이야기를 써야할까요? 누군가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지만, 멀어지고 끊어지는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아요.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코로나19로 등교 개학이 미뤄진 지 80일만에 등교를 시작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첫 등교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인사를 하고 있다.  2020.05.20
코로나19로 등교 개학이 미뤄진 지 80일만에 등교를 시작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첫 등교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인사를 하고 있다. 2020.05.20ⓒ김철수 기자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하다 보니 사람에 대한 피로가 극심했다. 한 차례 작업이 끝나고 나면 며칠 동안 집에 틀어박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연락이 없다고 연락이 오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유 없는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 필사적으로 연락을 하고 싶어진다. 나와 연결되어있던 사람들이 언제 어느 때 끊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내가 그들과 끊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상상이었다. 습관으로 주고받던 안부에 조금씩 진심을 담게 되었다. 잘 지내는지, 밥은 먹었는지, 몸은 괜찮은지. 그리고 반드시 건강하자고 말한다. 어제 만난 사람을 오늘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간지러워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나는 고맙다
이 모든 고통을 감당하면서, 이 모든 한계를 극복하면서,
어떻게든 ‘각자의 일상’을 회복하려고 하는 수많은 체온들에게.
체온과 숨결이 잠시 차단되어도,
사랑의 감정은 차단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일상이 있다. 그 사람의 존재는 그 사람의 일상을 통해서 빛이 난다. 각자의 일상은 각자의 우주다. 나의 우주는 극장이다. 연극을 시작한 이십대부터 마흔이 된 지금까지, 나의 삶은 집과 극장을 오가며 흘러갔다. 때때로 이 반복이 지겨워서 훌쩍 떠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었다. 공기처럼 여겨지던 일상이 불쑥 무너지면서, 어디론가 떠날 수도 없고 어딘가에 머물 수도 없는 악몽이 식은땀처럼 반복되었다. 극장은 개막과 폐쇄를 반복하고, 공연은 재개와 연기를 반복한다.

나는 두렵다. 이 반복이 일상이 될까봐. 나는 무섭다. 이 반복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아직까지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슬프다. 이 반복의 반복 속에서 불가항력으로 극장에 모였다가 흩어졌다가를 반복하는 배우와 스태프를 보며. 나는 미안하다. 이 불가항력의 반복 속에서 묵묵히 예매를 하고, 체온을 재고, 문진표를 작성하고, 마스크를 쓰고, 최소한의 숨소리로 객석을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그러다 불쑥 극장이 폐쇄되면, 다시 묵묵히 발길을 돌리는 뒷모습들에게. 그래서 나는 고맙다. 이 모든 고통을 감당하면서, 이 모든 한계를 극복하면서, 어떻게든 ‘각자의 일상’을 회복하려고 하는 수많은 체온들에게. 나는 이 두려움과 무서움과 슬픔과 미안함과 고마움을 마음 가득 담아서 먼 훗날의 일상을 상상한다.

오세혁 작가의 연출작 창작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한 장면. 코로나19 사태로 2주간 공연이 중단됐으나 철저한 방역과 준비로 102회차 공연을 최근 마쳤다.
오세혁 작가의 연출작 창작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한 장면. 코로나19 사태로 2주간 공연이 중단됐으나 철저한 방역과 준비로 102회차 공연을 최근 마쳤다.ⓒ뉴시스

우리가 삶을 이어가는 동안, 아마도 우리의 삶에는 계속해서 또 다른 재난이 찾아올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는 또다시 그 고통을 감당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 극복의 방향 때문에, 우리의 삶의 방식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그 달라진 삶의 방식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삶의 방향을 같은 곳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순간에도 사랑이야기를 상상하는 작가를 보며, 취소된 신혼여행 비용을 모두 재난극복기금으로 기부한 배우를 보며, 자가격리중인 사람들을 위해 아파트 발코니에서 연주회를 음악가를 보며. 어두워진 세상의 곳곳에서 자신만이 뿜어낼 수 있는 빛으로, 조금씩 빛나는 우주를 회복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 또한 끝없이 달라지며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삶의 방식은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하는 방식을 통해 우리의 삶의 방향을 다시 한 번 지켜낼 것이다. 몸과 몸이 잠시 떨어져도, 마음과 마음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체온과 숨결이 잠시 차단되어도, 사랑의 감정은 차단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믿기 위해 그렇게 상상한다.

[창간20주년 특별기획]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모아보기

오세혁 극작가,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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