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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나의 한사람 이야기] 내가 능력이 있어서 벌어먹고 살았지

“그때는 동네에 라디오 있는 집이 없었어. 우리 집에 라디오가 있었거든. 라디오에서 뭐 재미난 걸 한다고 온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몰려오고 그랬단 말이야. 그러면 더러운 발로 온 집안에 사람이 들어차. 나는 그게 싫었어. 그래서 우리 엄마한테 사람 좀 못 오게 하라고 신경질을 부리고 그랬지.”

1929년생인 소자 씨는 뽀얗게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수업에 나왔다. 젊을 때 미모가 출중했다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외모였다. 나이를 먹으면 다들 엇비슷하게 생겼다고들 하지만, 소자 할머니는 사람이 아흔이 넘어도 예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게 해 준 미모였다. 나는 농담반으로 젊을 때 김지미 닮았다는 소리 좀 들으셨겠다고 말했다.

소자 할머니를 만났던 수업은 서울 중심가의 저소득층 노인을 대상으로 연 강좌였다. 사랑방 같이 편안한 분위기의 주택에서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쯤 만났다. 노인들은 두툼한 외투에 목도리를 칭칭 감고 나타났는데, 소자할머니는 하얀 스웨터에 빨간 바지와 도톰한 회색 모자를 쓰고 보행기를 끌고 수업에 왔다. 손톱도 깔끔하게 다듬어 빨간 메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소자 할머니를 만났던 생애사쓰기 수업 장소 (2017년 1월, 서울)
소자 할머니를 만났던 생애사쓰기 수업 장소 (2017년 1월, 서울)ⓒ필자 제공

“남편이 신흥학교 출신이었어. 우리 오빠 친구야. 학교만 끝나면 맨날 우리 집에 와. 연애를 했지. 그때는 연애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고. 남편은 학도병으로 갔다가 대학생 출신이라고 장교가 됐어. 군대 있을 때 그냥 결혼을 했고, 식은 전쟁 끝나고 올렸어. 그 다음에도 군대에서 계속 훈련을 받으러 다녔지. 나는 남편 군번도 외워. 자기 남편 군번 외우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 거야.” 소자 할머니는 1로 시작되는 일곱 자리 숫자를 말했다.

“휴가만 왔다 가면 애가 생겨. 처음에 쌍둥이를 낳고, 그 다음에도 계속 애들을 낳아서 내가 여섯을 낳았어. 처음에 혼자 애 놓고 있는데 신랑이 다니러 왔지. 이불을 들춰보더니 아이쿠 하고 깜짝 놀라. 왜 그래요? 하니까, 이렇게 작고 빨간 줄은 몰랐다는 거야. 애기는 낳자마자 뽀얗고 통통한 줄 알았다나. 쌍둥이가 한 배에 들었으니 더 작은 걸 모르는게야.

애를 여섯이나 낳았는데 애 아빠가 나 스물 아홉에 죽어버렸어. 그냥 갑자기 무슨 병에 걸렸는지 손도 못 써보고 죽었어. 막내는 기어다니고, 큰애가 겨우 1학년 들어갔을 땐데. 내가 부잣집 출신에, 신랑 만나서도 부족한 거 없이 살았다고. 그러니까 할 줄 아는 게 없어.

처음엔 보험회사에 나와보래. 그래서 갔더니 월급은 말도 없고, 설탕 한 푸대를 주더라고. 그런데 우리 셋이 갔거든. 동네 여자들. 우리 데리고 간 여자만 설탕 한 푸대를 가지고 가서는 우리는 나눠주지도 않아. 그래서 뭐 이런 데가 다 있나 싶어서 안 나가버렸어. 그 다음에는 누가 명동 다방에 가서 일을 해보래. 그래서 찾아갔지. 일하러 왔다고 하는데 나보다 어린 이도 있고 비슷한 이도 있어. 남자들이 커피를 받아 마시면서 커피 갖다 주는 레지들 엉덩이를 막 주물럭거려. 깜짝 놀라서 뛰쳐 나왔지. 그랬더니 누가 또 한일은행 청소 자리가 있대. 내가 기술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데 청소가 뭐 어렵겠냐 싶어서 청소를 다녔어. 한 한달 지났더니 2층 청소를 하라는 거야. 나는 그게 뭔지도 모르고 그냥 2층에 갔지. 큰 방이 있어. 보니까 은행장실이야. 청소하라니까 그냥 청소를 했는데 같이 일하던 여자들이 아우성이야. 지들은 몇 년을 일해도 은행장실 청소자리도 안 주는데, 들어온 지 한 달밖에 안된 게 은행장실 청소한다고. 별의 별 얘기들을 다해. 누구하고 뭐 했냐, 무슨 관계냐 그런 지저분한 소리들만 하더라고.”

나는 얘기를 들으면서 아마도 소자할머니의 빼어난 미모가 그런 걸림돌을 만들었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이야기를 듣던 다른 어르신이 “할머니가 예쁘니까 그래! 샘들 하느라고!”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내가 그래서 어떻게 하나, 누가 생선을 팔아보라고 하더라고. 그게 괜찮다는 거야. 도매시장 어디 어디를 가면 장사할 생선을 준대. 다라이도 사야한대. 생선을 받았어. 머리에 이고 길을 나섰는데 ‘생선 사세요’ 소리가 안 나와. 죽어도 안 나와. 하루종일 이고만 다녔어. 목이 꿀렁꿀렁 하는데 말이 한 마디도 안 나와. 내가 그 다라를 삼일 이고 다녔어요. 나중엔 생선이 다 썩어가지고, 구데기가 잔뜩 끼었더라고. 몰래 내버렸지.”

‘생선 사세요’ 소리가 죽어도 안 나와서, 구더기 낀 생선을 버렸다는 소자 할머니
‘생선 사세요’ 소리가 죽어도 안 나와서, 구더기 낀 생선을 버렸다는 소자 할머니ⓒ필자 제공

소자 할머니는 연신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때는 다들 먹고 살기 어려워서 구세군에 가면 강냉이죽도 주고 옷도 주고 그랬어. 근데 여자들이 가면 옷을 잘 안 주려고 해. 여자들은 그걸 받아다가 몰래 판다는 거야. 구세군에서 옷을 받아다가 남대문에 가서 팔았어. 돈이 좀 되더라고. 근데 남대문 시장에 칸칸이 작은 옷가게가 막 생겼어. 그러니까 그것도 못 해먹겠더라고. 또 뭘 하나 싶어서 이렇게 보니까, 서대문에 상 고치는 사람들이 있었어. 밥상 같은 거 말야.”

소자 할머니는 그때부터 밥상 고치는 기술자들을 따라다니며 고칠 밥상을 잡아오는 일을 며칠 했다. 가만히 보니 밥상 고치는 기술자가 몇 명인데, 가구도 고치고 피아노도 고칠 줄 알았다. 소자 할머니는 며칠 기술자들을 따라다니다가 2층 3층 양옥집만 골라다녔다.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 ‘사모님 계세요?’라며 낯선 집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머리가 좀 좋아. 그깟 밥상 몇 개 하면 뭐하냐고. 나는 자개농 있을 만한 집만 골라다녔어. 대문 딱 보면 알아. 사모님 계세요? 하고 문 열고 자연스럽게 들어가서 장롱 흠집난 거 살펴보고 피아노도 고치셔야겠다고 조율도 하셔야겠다고 하면 내가 훨씬 더 많이 벌었어. 내가 그거 해서 이제 좀 먹고 살만 해졌지. 내가 그걸 환갑까지 했어.”

애를 여섯이나 낳고 젊은 나이에 죽어버린 남편
보험회사, 은행 청소, 생선 장사 거쳐
부잣집 가구 수리로 자리잡아 일본, 미국에 베이비시터까지
여섯을 먹여살렸으나 돌보지 못해

할머니는 갑자기 일제 강점기로 시대를 건너뛰었다.

“내가 결혼 전에 시경찰국에서 타이피스트를 했었거든. 그게 경력이 되는 줄을 나중에 알았지 뭐야. 한번은 우연찮게 옛날 알던 사람을 만났는데 일본어는 여전히 하지 않느냐는거야. 그래서 일본어야 자신있다고 으스댔지. 내가 환갑에 비행기를 타고 나고야를 갔어. 한국 사장들 집에 파출부 하러 가는거야. 딱 일곱 시간만 일해. 낮에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러면 다야. 나이 먹은 한국사장들인데 한국 사람만 쓴다는 거야. 비자가 안 되니까 친척이라고 거짓말 하고 다녔지. 그 일을 몇 년 했어.

그 다음엔 뭘 했느냐 하면, 미국에 베이비시터를 다녔어. 일본 같은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갔어. 그런데 가서 몇 달을 있어도 자리가 안 나. 말도 모르고 길도 모르고 완전히 미아가 되어버렸어. 그러다가 어느 집에서 베이비시터를 구한다고 해서 갔더니 애기가 7개월이더라고. 애 보면서 내가 일주일마다 애 크는 걸 다 기록해서 줬어. 애기 엄마가 아주 좋아해. 애기 하나 보면 150만원씩 벌었어. 매일 가는 것도 아니야. 세 집 다니면 450만원도 벌지. 그러면 중간에 수수료 떼주고 비행기삯 남기고 그러면 그럭저럭 할 만해. 한 번 가면 6개월 씩 있으니까.

근데 참 희한하게, 나는 미국에만 가면 병이 나드라고. 근데 병원비가 좀 비싸야지. 한번 감기만 걸려도 200불인데. 아이고 더는 못하겠다, 그 애기가 좀 클 때까지 비행기 타고 여러 번 왔다갔다 하다가 2000년에 일 그만뒀지. 내가 2000년 2월 29일에 비행기 타서 한국 들어왔어. 그때부터 노는 거야. 여기는 인연이 되어서 다니게 됐어.”

할머니
할머니ⓒpixabay

소자 할머니는 매일 돈 벌러 다니느라 자녀들은 건사하지 못했다. 딸들은 다들 인물이 좋았는데 학교를 제대로 못 보냈다고 했다. 소자 할머니는 돈 벌었던 이야기에 열중한 대신, 자녀들의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다. 여섯 자식 중 한 자식은 ‘멀리 갔다’고만 했다. 예순 다섯 된 큰 딸과 다니면 다들 자매냐고 묻는다며 웃었다.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나 환갑까지 거리에서 일을 한 소자 할머니는 60대에는 비행기를 타고 해외까지 다니며 스스로 벌어 먹었다. 많이 배운 자식이 중학교밖에 못 나왔다며 아쉬워했지만, 소자 할머니는 돈 벌어 먹고 사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애들 공부까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았지만, 듣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게 오롯이 가족 중 여성의 책임이던 시절, 소자 할머니는 열심히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건사했지만, 돌보지 못한 셈이 되었다.

여섯이나 되는 자식들은 ‘어려서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명절이 되어도 잘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소자 할머니는 늘 미소 지으며 이야기했고 잔잔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이 보행기도 성당 신부님이 줬어. 이제는 성당이나 나가고 하루 종일 티비나 보면서 살아. 재미없어. 가끔 눈물도 나고 그래.”

고등어에 온통 구더기가 끓어서 내다버렸다는 이야기가 잊히지 않아서, 나는 고등어를 볼 때마다 소자 할머니를 만났던 겨울을 떠올린다. ‘그래도 내가 능력이 있어서’ 칠십까지 벌어 먹고살았다는 소자 할머니의 삶은 늘 웃고 있어서인지, 매무새가 고와서인지, 불행해 보이진 않았다. 생애사쓰기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의 삶을 깊게 이해하긴 어렵다. 고작 몇 번 만나 그들이 말하는 것만 들을 뿐이다. 소자 할머니는 살면서 몇 번이나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자식들에겐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 한 적 있었을까. 소자 할머니를 만났던 그 동네 골목을 지날 때면, 보행기를 밀고 가던 소자 할머니의 뒷모습이 고스란히 떠오르곤 한다. 썩은 생선을 이고 골목을 헤맸을 젊은 날의 소자 할머니의 뒷모습까지도.

이하나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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