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사행동 보류”.
북의 움직임이 일단 멈췄다. 전단살포문제로 험악해지던 남북관계가 일촉즉발(一觸卽發)의 벼랑 끝에서 숨구멍을 텄다. 물론 공은 이쪽으로 넘어온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깊게 숨을 쉬고는 윤 비서관을 불렀다. 우선 미국 쪽 동향을 알기 위해서였다.
- 유엔사 쪽은 여전히 강경합니다. 한미워킹 그룹 내의 분위기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
생각보다 다소 거칠게 나온 북쪽에 사실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개성의 남북 공동연락 사무소를 단숨에 폭파해버린 것은 얼마나 북이 격노했는지를 전해준 실체였다. 기대만큼의, 또는 약속했던 만큼의 성과가 없었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에 뿌린 전단 내용은 북으로서는 최고존엄에 대한 모욕이었다. 탈북단체의 전단살포 행위를 좀 더 강하게 통제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통령은 그 찬란했던 봄과 가을을 떠올렸다.
2.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공동성명은 7.4 이래 제1원칙인 자주를 더욱 분명히 강조했다. 그해 9월은 뜨거웠다. 날씨가 그런 것이 아니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 모인 평양시민들의 열기가 그랬다.
이들은 대통령의 연설에 열광했다. 만일 김정은 위원장이 남쪽에서 연설하면 우리도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찰나에 스친 생각이었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했습니다.....이번 방문에 나는 평양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았습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북녘동포들이 어떤 나라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는지 가슴 뜨겁게 보았습니다....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며 끝끝내 스스로 일어서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를 보았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자 평양시민들이 눈물을 흘린다. 고난의 행군, 그 시절이 이렇게 남쪽 대통령에게 격려와 찬사를 받았다는 감동이었다. “평양의 놀라운 발전상”, 그건 고난의 열매였다.
“평양 시민 여러분, 동포 여러 분 우리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지진이 일어나는 줄로 알았다.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친 15만 평양시민들은 당장 통일이라도 된 것처럼 뛸 듯이 기뻐했다.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렇게 확신했다. 인민군의 사열까지 받게 된 남쪽 대통령이다. 전쟁의 여지는 이제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평양 시민들 앞에서 아이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걸머진 근엄의 무게를 잠시 내려 놓은 순간이었다. 분단 70년의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데도 마음이 만나는 일은 이렇게 순식간에 가능하구나, 하고 대통령은 잠시 황홀감에 빠졌다. 그날 대통령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

3.
판문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 김정은 위원장이 했던 말이 지금의 정세 속에서 더욱 뼈저렸다. “그동안 북과 남 사이에 수 많은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실행 아니겠습니까?”
2년이 지난 지금, 모든 게 여의치 않았다.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엔사와 워킹그룹 그리고 미국쪽 네오콘의 방해 책동은 상상 이상이었다. 에라 그냥 저지를까 싶은 생각이 한 두번 든 것이 아니었다. 사사건건 꼼짝 못하게 했다.
9.19 군사합의가 있자 득달같이 압박을 가했다. 전시작전권은 미국 손에 있는데 무슨 군사훈련 중단을 약속했는가라는 항의였다. 아니 그건 지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틈을 비집고 뭔가 하려는 순간, 미국이 가진 온갖 카드가 폭풍처럼 날아올 것이다. 당장 경제는 질식할 지경이 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모험을 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가는 것은 결국 남북관계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 19의 비상정국이다. 하지만 이 두 사태는 함께 풀어야 할 숙제다.
대통령은 다시 윤 비서관에 물었다.
“남북 관계의 역사에서 말이지, 가장 한국적인 풍경이라면 뭘 들 수 있을까?”
물론 그의 마음에 대답은 이미 있었다.
- 아, 그야 정주영 회장이 소 떼 몰고 북으로 올라간 광경이죠.
“그렇지?”
윤 비서관은 대통령의 얼굴에 뭔가 결연한 빛이 감도는 걸 놓치지 않았다.
- 저, 그런데...
뭔가 머뭇거리는 윤 비서관에게 대통령은 괜찮아, 편하게 말해봐, 라는 표정을 지었다.
- 볼턴이 사고를 친 것 같습니다.
볼턴이라....대통령은 그자를 떠올리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졌다. 다 되어가던 북과 미국 사이의 합의과정을 파토놓은 인물이다.
윤 비서관은 볼턴의 회고록 번역판 파일을 대통령의 책상 위에 놓고 물러가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우리에 대한 비난이 적혀 있습니다.
대통령은 볼턴의 책이 그렇지 않아도 쉽지 않은 남북관계에 폭탄이 되겠다 싶었다. 한반도 관계가 적힌 대목에 윤 비서관이 언제나처럼 세월호 상징이 그려진 책갈피를 꽂아놓았다. 더는 참혹한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속으로 되 뇌인 대통령은 전쟁종식 노력이 후퇴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우울해졌다.
4.
책의 요지는 분명했다. 볼턴은 남과 북, 북과 미국 관계에서 대통령이 미국 말을 듣지 않고 종전협정과 평화체제로 가는 길을 뚫어내려고 기를 썼다는 것이다. 북의 군사적 위협에 순진한 대응을 하고 있다는 비난과 함께.
대통령은 회고록을 덮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결단해야 한다. 고독하다. 그러나 담대하게 결단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의 길이 새삼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5.
다음 날 아침, 대통령은 집무실의 컴을 켜고 페이스북으로 들어갔다. 언론보다 더 언론다운 여론의 광장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페북의 글들을 쭉 보다가 “‘북으로 보내는 편지’/외세의 이간질을 함께 풀어나갑시다!”라는 제목의 글이 눈에 탁 들어왔다. K 대학의 M 교수가 쓴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으로 뭔가 전갈을 보내고 싶었는데 모든 라인이 다 막혀 있는 상태였다. 뭐지?
“그간 북측의 인내와 자제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번 볼턴의 책을 보면 미국의 네오콘들이 얼마나 한반도 평화를 교란시키고 전쟁의 나팔을 불어대기 위해 기도 안 찰 짓을 하는 지 절감하게 됩니다.”
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우리가 할 일은 외세의 이간질을 저지하고 우리끼리는 아무도 몰래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길을 뚫어내는 것입니다. 그걸 어느 날 쾅쾅 터뜨려 누구도 도로 되돌려놓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남과 북, 북과 남 사이에 아무도 들을 수 없고 간섭할 수 없는 정상간의 대화선을 복원, 가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 풀 건 풀면서 격의없는 이야기가 오고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읽었을까? 북이. 대통령은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남측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리고 외세의 견제가 너무나 심해서 제대로 약속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남측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드립니다. 여기서 다시 출발해보지요.”
북도 이걸 정말 읽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 그래 그렇게 다시 시작해보는 거다.
6.
윤 비서관은 어리둥절해졌다. 대통령의 지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지게를 준비하라니? 100개를. 그게 지금 어디 있다고. 달구지도 50개나 마련하라는 거다. 주어진 시간은 딱 1주일.
지난 해 인도적 차원에서 대북지원하려고 했다가 유엔사가 차량반출이라고 막은 20만명분의 타미플루를 비롯해서 코로나 바이러스 19 방역관련 물품과 함께 의료진 50명을 뽑아 대기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였다. 물론 1급 국가기밀이었다. 모든 일은 철저하게 은밀히 진행되었다.
문화계 인사들과 도지사들에게 전통공예관련 사업 추진이라고 알리고 할당을 맡겼다. 그런 한편, 남북교류, 평화통일운동 시민단체에 속한 청년들 100명을 판문점 현장교육 명목으로 모으는 작업에 들어갔다. 통일부와 개성공단의 주요 관계자들에게도 비상대기 명령을 내렸다.
7.
집결지는 개성으로 빠지는 비무장 지대로 가는 남쪽 경로, 집결시간은 모월 모일 오전 9시. 그 시각, 청와대에서 대변인의 특별 기자회견이 생중계로 열렸다.
청와대 출입기자단은 뭔가 느낌이 이상했는지 모두가 긴장한 눈치였다. 요즘 정세가 그럴 만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변인의 일성은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대통령님께서는 오늘 오전 10시, 정부 주요 관계자들과 의료진, 청년 학생들 200명과 함께 비무장 지대를 지나 개성으로 들어가십니다. 함께 이동하게 되는 물품은 모두 의료관계 물품입니다.”
기자실 한쪽 벽에 있는 대형 스크린이 켜지더니 현장에 집결한 사람들이 비쳐졌다. 기자들은 자신들의 눈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운반물자를 실은 달구지가 즐비한 가운데 대통령을 비롯한 집결 인파가 역시 짐을 실은 지게를 등에 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세상에나......
청와대 기자회견 장면을 TV로 보던 국민들도 모두 심장이 멎는 듯 했다. 도처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고 온 나라가 질풍의 도가니가 되었다. 모든 방송 일정이 중단되었다.
10시라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모두 자사에 연락을 취해 즉각 현장으로 이동해야 할 판이다.
대변인이 장내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군이 제공하는 헬리콥터가 현장으로 여러분들을 모시고 갑니다. 이동시간은 15분. 현장에 도착해서 상황을 보실 시간이 충분히 됩니다. 방송 차량들은 이미 현장에 도착해 있습니다.”
기자실은 졸지에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이상하게도 CNN을 비롯한 외신기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기자들은 분통이 터지면서도 현장에 가는 팀에 빠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 외에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8.
“이제 우리 이동합니다. 북에 연락을 미리 취한 바 없습니다. 모든 연락망이 끊겨 있습니다. 그냥 가는 겁니다. 언론인 여러분들의 중계와 타전이 전 세계에 이를 알리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북에 전하는 메시지가 됩니다. 부디 잘 부탁합니다.”
대통령의 음성은 차분했다. 정부 인사들과 의료진들의 표정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고 청년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이 이동의 경로는 청년들에게만은 마지막까지 비밀이었다.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 뉴스 톱이 되었다. 그야말로 ‘K-태풍’이었다.
장관(壯觀)이 아닐 수 없었다. 달구지와 지게, 그 긴 행렬에 실린 의약품. 비무장지대 출입을 관리하는 유엔사는 자신들이 나서는 순간, 미국의 세계적 위상은 장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상상할 수 없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평시 작전권은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있다.
우리 군이 대통령과 일행이 전진하는 길 좌우로 포진하고 있었다. 전원 거수경례하는 군 장병의 모습이 생중계되자, 이걸 지켜보던 나라 안 도처에서 사람들은 뜨겁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좌와 우, 진보와 보수는 가려낼 수 없게 되었다.
9.
“대통령님!”
윤 비서관이 다급하게 대통령에게 뛰어왔다. 물론 그도 지게를 지고 있었다. 달려오는 바람에 잠깐 뒤뚱거렸으나 그는 대통령에게 메모 한 장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대통령님, 기다리고 있습니다. 볼턴 책을 읽었습니다. 이상한 자가 벌이는 괜한 짓도 때로 역사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군요. 북에 보내는 남측 학자의 편지도 읽었습니다. 들어오시는 길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김정은 위원장.”
대통령의 다리에 맥이 풀리는지 기운이 솟는지 헷갈렸다. 내 마음을 읽었구나.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소식이 행렬에게 곧장 전달되자 모두 함성을 질렀다. 생중계되고 있던 이 장면이 방송을 타자 이 이상의 절정이 있을까 싶게 대한민국 천지가 난리가 난리도 아니었다.
10.
개성 입구에 당도하자 기다리고 있던 김정은 위원장이 달려와 대통령을 뜨겁게 포옹했다.
- 아니,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히말라야 등반까지 한 몸입니다.”
하하, 두 정상이 서로 호탕하게 웃어제겼다.
- 여정이, 너도 인사해야지 안캈써? 좀 쑥스럽디? 대통령님에게 걸게 말해서리.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이 대통령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괘면쩍은 모습이었지만 전에도 보았던, 대통령에 대한 다정한 눈길 그대로였다.
“하하, 이렇게 웃으니 다 된 거지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행렬 모두가 일제히 지게를 내려놓자 이 또한 장관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김위원장이 지게대열에 쑥 들어온다.
- 저도 한번 져보갔습니다.
“아, 그러시겠다구요? 저보다 젊으시니까 어렵진 않을 겝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대통령님도 지게 다시 지시고 저랑 사진 한 방 확고하게 박으시지요.
하하, 껄껄, 호호 ~
북쪽 언론도 북새통이 되었다. 다음 날 남이나 북이나 전 세계 주요 언론이나 이 사진이 전면에 실렸다. “지게의 나라 코리아”
“김정은 위원장님, 우리 우리민족의 역사를 지게에 지고 함께 갑시다.”
- 바로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입니다.
모두가 우레와 같은 갈채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11.
다음 날, 개성에서는 두 정상의 발표가 생중계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오늘 저희들은 단 하나의 발표만 합니다.
“개성 공단을 재가동 합니다.”
모두가 열광했다.
두 정상이 함께 문건을 읽었다.
“개성공단을 세계적인 평화방역 의료 클로스터로 발전시키겠습니다.
개성은 이제 한반도 차원이 아니라
세계적 기여를 할 수 있는 평화의료 현장이 될 것입니다.”
12.
유엔사와 한미워킹 그룹이 더 이상 개입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전 세계의 여론은 두 정상 편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19의 시대에, 한반도는 지구적 방역을 위한 새로운 거점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사족 셋.
1. 스웨덴 왕립학회는 노벨 평화상 후보 선정 작업에 바빠졌다. 격론이 별로 필요가 없었다. 이미 답은 정해진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2. 이날 이후 아마존에서 “코리아 지게”가 날개 돋힌 듯 팔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위한 소형 지게도 등장했다.
3. 서울 거리에 다시 지게꾼이 등장하고 택배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1.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의 칼럼 ‘김민웅의 생각’을 새로 연재 합니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2.이 글은 필자의 바람과 상상력을 가미한 글입니다.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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