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이란 어떤 위해나 손실이 일어날 가능성을 말한다. ‘안전’이란 그 사회의 가치 기준에 기반한 맥락 속에서 수용가능한 수준의 위험을 말한다. 그러므로 위험과 안전 그 자체에는 이미 일정한 가치관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일터의 위험과 안전에 대해서도 그렇다. 노동자에게 위험이란 신체와 정신의 손상을 초래할 가능성이며 상대어는 ‘안전’이 된다. 기업에게 위험은 생산과정의 지연이나 지체에서 오는 이윤 손실의 가능성이며 자연히 상대어는 ‘이윤’이 된다. 노동자들에게 위험 관리(risk management)는 개인 혹은 집단으로서의 건강과 온전성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기업에게는 이윤 손실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된다. 노동자의 위험이 기업의 위험으로 직결되지 않고 노동자의 안전이 기업의 이윤으로 수렴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업은 노동자의 위험을 줄이는 것보다 제도적 공백을 이용해 위험을 외주화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 바로 이 때, 정부나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
일터 위험 관리 책임을 ‘알려진(旣知, known) 위험’과 ‘알려지지 않은(未知, unknown) 위험’에 관한 것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위험 노출의 결과와 관리 방법까지 알려진 위험에 대해서는 사업주나 기업이 책임을 져야 한다. 위험 노출의 결과나 관리 방법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거나 은폐돼 알려지지 않은 위험의 책임은 정부나 국가에 있다.
정부의 역할은 ‘미지의 위험’에 대한 통찰과 연구에 주력하며, ‘은폐된 위험’에 대한 조사와 감독을 수행해 기업과 사업주에게 책임을 지우는 데 있다. 사업주가 위험을 깨닫고 책임을 인지하도록 해 알려지지 않은 위험을 ‘알려진 위험’으로 바꾸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위험을 알고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경우와 위험을 은폐한 경우에 대해 강력한 처벌·규제를 통해 기업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그렇다. 이 모두가 고용노동부의 역할이다. 강력한 규제와 처벌을 시행하고, 때로는 공정한 유인책(incentive)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면서 노동자의 위험을 방치하면 기업의 위험으로 직결되고, 노동자의 안전이 기업 이윤에 수렴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6월 초 고용노동부 장관이 대법원 양형위원회를 찾아가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위반 기업에 대한 양형 기준 상향을 요청했다. 반색할 일만은 아니다. 최근 산업재해와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언론 보도가 잇따르고, 사회적 반향도 높아진 상황에서 보여준 행보였을 것이다. 이는 공을 슬쩍 사법부로 떠넘기는 일이기도 하다.
고용노동부가 사법부에 의탁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작업중지 명령’만 해도 그렇다. 산안법 위반에 대한 양형 수준이 낮은 것도 문제지만, 실제 어느 정도 양형이면 사업주나 기업이 영향을 받을지가 불분명하다. 반면 그동안 분명하게 기업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 ‘작업중지 명령’인데, 이는 고용노동부 장관의 권한이다.
법 위반에 따른 벌금이나 각종 처벌에 비해, 실제 생산라인과 영업을 멈추게 하는 작업중지 명령이 기업으로서는 훨씬 부담이 되는 조치였다. 그렇기에 기업을 대변하는 이익단체들이 산안법 전부 개정 국면 동안 작업중지 ‘완화’를 두고 강력하게 로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고용노동부는 “작업중지의 요건 및 범위와 해제 절차를 보다 명확히 규정”한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역할과 권한을 축소하고 말았다.
지난해 고용노동부는 법에서 정한 주52시간제 적용을 두고 위반 사업장에 대해 “처벌을 유예”하겠다고 하더니, 올해는 코로나19 위기를 빌미로 특별연장근로신청을 “신속히 인가”하겠다고 발표했다. 기업 입장을 대변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권한을 ‘월권’에 가깝게 활용했다.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게 아니라, 내어주는 방향으로 기업을 이윤을 보전하려 한 것이다. 이래서야 고용노동부가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에 대한 사안과 관련해 스스로의 권한을 축소하면서 사법부로 책임을 돌린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이 사법경찰로서 조사와 수사까지 가능한데도 산안법을 제대로 적용해 정책 효과를 달성하겠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도입을 주장하는 것이다. 얼마 전 발생한 현대제철 열사병 사망 의심 재해 건에 대해서도 고용노동부 지청은 중대재해로 규정하기를 주저하고 형식적인 조사만 진행했다. 그러다 노동조합과 노동안전단체들의 강한 항의에 부딪히자 입장을 바꿨던 바 있다. 재해조사를 담당하고 지휘해야 할 고용노동부가 ‘산안법 위반 수사’를 하며 경찰 수사와 어떻게 다른지 전문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흔히 보인다.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0년, 노동부의 명칭이 현재의 ‘고용노동부’로 바뀌었으며 공식 약칭은 ‘고용부’가 되었다. 군사정권 내내 노조운동의 파수꾼 역할을 떠맡다 1981년 노동‘청’에서 ‘노동부’로 승격된 지는 벌써 4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는 고용노동부가 이름값을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명박 정부 시절 노동조합과 노안단체들은 기업 유치를 빌미로 한 규제 완화를 막고 전문성을 담보할 중앙 행정부처의 기능을 기대하며 안전보건행정의 지방정부 이양을 반대했다. 현재 전 사회적으로 안전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높아지고 노동안전보건 문제가 반향을 얻고 있다. 이 때 고용노동부가 제대로 해야 한다. 제대로 못하면 지방정부의 역할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이 해내기 버겁다면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노동조합 참여가 높을수록 산업재해 예방수준이 높아진다는 것은 입증된 사실이다. 공무원이 다하지 못하겠다면 노조 안전보건활동에 대한 타임오프 적용을 풀어 역할을 주어야 한다. 지금 있는 ‘산업안전보건법’으로 못하겠다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해서라도 해야 한다. 생산 차질이 두렵고 안전·건강보다 노사합의가 우선이라면, 안전보건관련 부서는 힘없고 떠맡기 싫은 한직으로 취급할 것이라면 ‘노동안전보건청(산업안전보건청)’을 설립해 역할과 권한을 내어주어야 한다.
고용은 중요하다. 하지만 질병과 죽음을 향해가는 출근길이라면 무슨 소용인가. 노동을 살피고 안전과 건강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고용노동부의 노동안전보건 행정이 제대로 서기를 바란다.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면 이제 내어 놓아야 한다.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직업환경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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