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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나의 한 사람이야기] 누가 함부로 삶을 말하라 하는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고흥 반도는 순천만과 보성만 사이에 있는 남해안으로, 다이아몬드형의 돌출된 반도다. 고흥 반도는 청정해역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고 해산물이 풍부한 고장이다. 그곳 우리 마을은 100여 가구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사는 농어촌마을이었다. 처음에는 산 아래 바닷가에 초가집을 짓고 주민 대부분은 해산물로 생계를 꾸렸다고 했다. 밀물 때는 처마 밑에서 파도가 넘실거리고, 썰물 때는 아스라이 잿빛 갯벌이 드러났다고 했다. 그러던 중 간척사업을 통해 택지와 농지가 늘어나고, 마을 가구 수도 점차 증가했다. 마을 앞 간척지에는 객토를 한 후에 논두렁을 쌓고 벼농사를 지었다. 높은 지대는 밭을 일구어 보리. 콩. 마늘. 고구마 등의 농작물을 심었다. 그곳에서 생산한 농작물은 계절 따라 결실의 물결을 이루었다. 마을 뒤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농어업이 조화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가고 있었다.”

첫문장이 예사롭지 않아 제출자를 다시 바라봤다. 작년이었다.

2014년 촬영한 전남 고흥 모습
2014년 촬영한 전남 고흥 모습ⓒ필자 제공

도서관에서 ‘노인 생애사쓰기 강좌’를 열겠다고 했다. 나는 굳이 노인으로 국한하면, 지역 특성상 많이 모이지 못할 것이라 의견을 제시했다. 예상대로 70세 이상 노인들의 지원이 적어 연령대를 55세 이상으로 낮췄다. 이 지역의 특성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1기 신도시,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주로 도서관을 이용한다. 중산층이 모인 지역이라 나름대로 지역 자부심도 있는 곳이다. 복지관은 담당자들이 여러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이용자들을 설득하고 꼬드겨서 자리에 앉히는 일도 있지만, 도서관의 경우 담당자가 프로그램 운영에 크게 집중하기 어려운 근무조건 탓에 자발적으로 사람이 모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발적으로 중산층, 고학력자들이 생애사쓰기 프로그램에 모이면 글을 제대로 배우고 책으로 묶어 나오길 바라는 구체적 열망이 표현된다. 유려한 글쓰기로 원고를 만들어온 박 씨는, 이미 절반 이상의 원고를 만들어놨다고 했다.

바닷가 시골마을의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월사금을 내지 못해 몰래 학교를 빠졌거나 혼자 울었다는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70대 이상의 고령자들 10명을 만나면 그중 세 명은 월사금을 내지 못했고, 다섯 명은 아예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두 명 정도가 월사금 걱정을 하지 않고 학교에 다녔다. 미술 시간에 크레용과 도화지를 가져가지 못했던 이야기도 수두룩하다. 그때는 학교 수업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가정이 챙겨야 했다. 지금은 학교에서 도화지를 비롯한 물품을 거저 준다는 것에 노인들은 깜짝 놀라곤 한다. 이들은 그럴 때마다 혼란에 빠진다. 공산당 세상이 된 것인가, 공산주의는 공짜로 주고 똑같이 가난하다고 배웠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말인가. 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잠시 숨을 멈췄다가 입을 닫는다.

고흥에서 태어난 박 씨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엄격한 부모님 아래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이후 광주의 고등학교까지 진학하는 데 성공한다. 그가 중학교 때 살던 마을에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했다. 대통령의 방문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어린 박 씨에게도 큰 감동이었다. 절대 권력자의 방문은 우리 마을을 ‘굽어살피는 임금’을 알현하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 씨는 취업에 실패하고 군 입대를 한다. 김신조의 출현으로 복무 기간이 늘어났다. 국군의 날 행사에서 사고가 일어나 동료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다. 박 씨는 제대 후 중소기업에 취업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공개채용을 통과해 포항제철에 입사한다.

2014년 촬영한 전남 고흥 모습
2014년 촬영한 전남 고흥 모습ⓒ필자 제공

실패하면 영일만에 뛰어들자는 ‘우향우정신’
‘산업역군’의 삶 고스란히 담은 인생사
“가족이 아픕니다. 마지막 선물로 제 책을 주고 싶어요.”
힘겹게 고백한 이야기가 사장되는 안타까움

박씨가 기록한 포항제철에서의 이야기는 산업화 시대 정부가 ‘산업역군’이라고 칭했던 사람들의 삶과 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977년 봄, 1, 2기는 상업 생산체제로 갖추어져 제품이 줄지어 이동하고, 3기는 한창 건설중이었다. 황량한 모래 벌판 위에는 생산과 건설이라는 서로 다른 분위기가 팽팽하게 맞섰다. 한쪽에서는 항타 소리가 가득하고 각종 중장비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질주했다. 또 다른 한쪽 굴뚝에서는 화염이 피어오르고, 두루마리 휴지처럼 둥그런 제품을 쏟아냈다. 회사 분위기는 대강 듣긴 들었지만, 실제 접하니 들었던 대로 군대문화라는 이미지가 금방 떠올랐다. 봄인데도 불구하고 찬바람이 스치는 듯한 냉기류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신입사원교육 때 배운 ‘우향우정신’이 떠올랐다. 그 ‘우향우정신’이라는, 포철인만이 지닌 정신적 지주로 버티고 있는 듯했다. 포철이 성공하지 못하면 영일만에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로 임한다는 의미였다. 생산이나 건설이나 할 것 없이 그야말로 불철주야 분투했다. 공장은 공장대로 제품을 많이 생산해서 즉시 출하할 수 있도록 했다. 건설은 건설대로 공기를 단축하여 하루라도 빨리 공장을 가동하도록 했다. 이는 최고 경영층에서부터 말단 사원에 이르기까지 사명감으로 버티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었다. 낮과 밤이 따로 없는 나날 속에 포철은 쇳물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전국 팔도의 사람들이 모인 낯선 환경, 젊은 박 씨는 경상도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쇳물이 바닥에 쏟아져 화재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박봉에 신혼살림을 꾸리고, 집주인의 횡포를 견디고, 전세방을 얻어 이사하고 아이가 태어나고, 직원 아파트에 입주하는 과정을 거쳤다. 밤낮없는 직장에서 부족한 기술력을 메꾸기 위해 온몸으로 직원들이 헌신했다고 적었다. 회사가 우선이었고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으며, 돌발적인 고장이나 사고가 일어나면 새벽에도 현장으로 출동하는 일을 반복했다.

박 씨는 글 전반에 거쳐 ‘좌절’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좌절’이라 표현하지 않았다. 맨땅에 헤딩하는 그 당시의 ‘헝그리정신’이 그의 회사 생활 전부를 차지했다. “책임감과 사명감이면 다 되는 줄로만 알았다. 우리의 무지에 당하고 또 당했다. 밑천이 다 드러나도록 지독스럽게 털렸다.”, “경험을 통해서 얻어낸 값비싼 희생물이었다. 모든 것이 그랬다. 매뉴얼이나 설계를 바탕에 두지 않고 몸으로 체득하려는 고집으로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오로지 사명감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꿔나가는 직장인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사명감마저 잃고 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위기감 또한 팽배했다. 회사 내에는 우리가 안고 있는 어려움과 사명감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 씨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회사의 신념에 자신을 갈아넣었다. 포항제철소에 4기, 광양제철소에 3기가 준공될 때 대통령이 참석했고, 용광로에 붉은 쇳물이 쏟아지자 직원들이 만세 삼창을 불렀다. 준공식 때마다 대통령이 참석해 경축사를 낭독했다. 힘들었던 과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1992년 포항과 광양의 2개 제철소 건설이 끝나고 박태준 회장이 퇴임하는 순간도 묘사되어 있었다. 회사가 정치적 이유로 흔들리고 회장의 퇴임식에 ‘각하’라는 호칭이 허공에 떠돌며, 박 씨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퇴임하는 회장으로부터 표창과 메달도 받았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현 포스코)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에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과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현 포스코)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에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과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포스코/자료사진

박 씨는 정년 퇴임을 한 뒤 글쓰기를 제대로 공부해 책을 내고 싶어졌다. 두 자녀 모두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했고 박 씨는 이제 남은 삶을 잘 가꾸면 될 일이었다. 2010년에 방송통신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고 봉사활동을 하고 언젠가 자서전을 내겠다는 꿈을 가지고 매달 세 권 이상 책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도서관에 드나들다 생애사쓰기 프로그램 공고를 보고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온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으신데, 결정적인 원인이 있었다면 뭘까요?”라고 물었다. 박 씨는 덤덤하게 말했다.

“가족이 아픕니다. 마지막 선물로 제 책을 주고 싶어요.”

아내의 이야기였다. 긴 직장생활 중 성실한 가장으로 살았으나 애틋한 남편인 적 없다는 흔하고 짧은 고백이 있었다. 다른 참가자들과 원고 분량만으로도 차이가 많았고, 기업의 미시사적 가치가 높아 나는 이분의 글만 따로 모아 책자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담당자에게 전했지만, 한정된 예산으로 프로그램을 운영한 담당자는 자기 임의대로 예산안을 조정하거나 예상치 못하게 보석 같은 글이 쏟아진 것에 대해 대처할 힘이 없었다. 책자 제작은 업체에 맡기게 되어 있다길래 나는 강좌만 끝내고 이들과 헤어졌다. 박 씨의 글은 내가 최종적으로 받아 보관하고 있지만, 이후 이분의 글이 어디로 흩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더라도 비작가가 쓴 글을 책으로 묶을 때는 세심한 지도와 교정·교열이 필요한데, 도서관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수년간 생애사쓰기 강좌를 공공기관에서 진행하며, 담당자들이 참가자들의 삶이 녹아든 이야기를 소중하게 여겨 정성스럽게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더러 만났다.

누가 함부로 당신의 삶을 말하라고 하는가. 때때로 힘겹게 삶을 고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장시키는 자들의 책임을 묻고 싶다.

이하나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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