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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노동이야기] 서울시는 차라리 책임지지 말라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 진상조사와 관련한 서울시의 행보가 피해자 지원 여성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지난 13일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했고 “서울시는 사건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조사단을 구성하여 진상을 밝혀야 한다”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서울시는 이틀 뒤인 15일 “여성단체, 인권전문가, 법률전문가 등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민관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철저한 진상규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시측 제안을 거부하며, 조사단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언뜻 보면 피해자 지원단체의 요구에 서울시가 응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지원단체의 ‘참여 불가’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지원단체들은 ‘조사대상’이어야 할 서울시가 ‘조사주체’로서의 책임을 자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서울시의 위치는 무엇이어야 할까.

황인식 서울시대변인 15일 오전 시청 브리핑룸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 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발표를 마친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2020.07.15
황인식 서울시대변인 15일 오전 시청 브리핑룸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 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발표를 마친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2020.07.15ⓒ민중의소리

서울시는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지원단체들이 요청한 것은 서울시가 조사주체가 되어 진상조사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고 박원순 시장과 피해자, 두 당사자 간의 사건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원단체들은 16일 입장문에서 서울시의 위계적이고 가부장적인 조직문화가 일상적인 성추행을 증식시키는 텃밭이 되고 있음을 짚었다. 이는 그러한 조직문화가 노동환경과 노동조건에 미치는 영향, 그것이 성추행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 서울시가 책임을 통감하고 ‘조사 대상’으로서의 공적 책임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는 함의를 포함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관성화 된 민주주의적 책임의식을 바탕으로 책임지겠다고 나섰고, 그 순간 그들은 ‘조사대상’의 위치에서 ‘조사주체’의 위치로 손쉽게 이동했다. 그러니 여기에 지원단체가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원단체가 입장을 바꾼 것이 아니다.

돌아보면 2016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고 당시에도 서울시는 그랬다. 시민대책위원회(시민대책위)가 구성되었고, 유가족과 함께 진상규명을 서울시에 요구했다. 서울시는 유족과 합의를 진행하며 시민대책위와는 사전 논의 없이 이번과 비슷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 명단을 발표했다. 시민대책위가 반발하자, 그제서야 서울시는 진상규명위에 들어오라고 했다. 결국 시민대책위는 서울시가 만든 진상규명위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고, 현장 노동자가 참여하는 독자적인 진상조사팀을 만들었다. 그래서 구의역 사고 조사보고서는 진상조사팀과 진상조사위가 각각 제출해 두 개가 되었다.

당시 박원순 시장이 이끌던 서울시는 민관합동 거버넌스를 매우 중시하며 시민단체와의 소통을 강조했기 때문에 왜 일방적으로 진상규명위를 꾸리고 조사위원 명단을 발표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서울시는 구의역 김군의 사망사고에서 ‘조사주체로서의 책임 과잉상태’였던 것 같다.

그들은 보수 세력처럼 노동자를 깔아뭉개거나 폭력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서울시, 전문가들의 의견을 언제라도 청취할 수 있는 서울시, 노동자들이 참여 요청을 하면 거부하지 않는 서울시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기꺼이 자부했다. 그렇지만 구의역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서울시에 ‘제대로 된 진상조사’를 요구한 노동자와 시민단체들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 사건을 온전히 책임져야 할 주체였기 때문이다.

책임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혹은 가해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직문화를 만들어 온, 혹은 암묵적으로 그에 가담해 온 사람들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다만 그 책임의 내용과 형식이 다를 뿐이다.

산재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기업에게 정부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노동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박 전 시장 사건의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책임을 물었다. 피해자가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은 가해자와 사회에 책임을 묻는 일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시청사
서울시청사ⓒ서울시

그렇다면 서울시의 책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많은 산재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들이 기업이나 정부에 책임을 묻는다. 그 책임의 시작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 자신을 어느 위치에 놓는가의 문제이다. 가해자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객관적 해결 주체의 입장에서, 사건의 연루된 자리가 아니라 사건과 무관한 자리에서, 사과가 없이 이뤄지는 책임의 절차는 관성화된 책임 거버넌스를 통한 매끈한 책임회피의 과정일 뿐이다.

산재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들이 사고 원인 규명 만큼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해당 기업에게 제대로 된 책임 위치에 있는지를 묻는 과정이기도 하다. 보통 가해자와 해당 조직은 온 힘을 다해 사과를 회피하거나 최대한 유보하려고 한다. 진상조사는 이러한 사과를 유보하거나 협상하는 카드로 종종 제시된다.

서울시는 이번 사건의 민관합동조사단을 구성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며, 피해자를 ‘피해호소직원’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면서 ‘서울시에 공식적으로 피해 관련 사실을 알린 바가 없기 때문’이라는 매우 형식적인 이유를 댔다. 지난 4년 간의 피해를 한 순간에 가벼운 솜털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이 여느 대기업의 산재 대응 매뉴얼 못지 않았다. 피해자에게 교묘하게 책임을 지우는 말들은 사건을 좁혀 당사자들의 문제가 되게끔 한다. 그리고 난 후에 살아남는 것은 서울시라는 ‘조직’일 것이다.

서울시는 차라리 책임지지 말라. 서울시는 이 사건의 조사 주체가 아니다. 조사 대상으로서 책임을 통감할 능력이 없다면, 사고 조사에 협조하고 조사 업무 지원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이후에 사건 해결을 위한 과제를 받을 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낫겠다.

전주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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