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어느 회사에서 사내 정신보건 사업 담당자로 일한 적이 있다. 정신건강 관련 사업 기획과 실행, 업무 관련 상담, 업무적합성 평가 등이 필자가 맡은 주요 업무였다.
어느 날 찾아온 한 분은 타 부서로 갑작스럽게 발령받은 후 우울감, 불면 증상 등이 생겨 병원 치료 중이라고 했다. 여느 회사가 그렇듯 인사 이동엔 본인의 희망사항이 반영되는 경우도 있고, 본인 뜻과 무관하게 발령 받는 경우도 있을텐데 그 분은 후자에 해당했다. 회사 경영 방침과 전략에 따라 인력을 배치할 때 사측이 최대한 개인의 의사를 반영하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인사 이동 사례는 아마도 숱하게 많을 것이다.
문제는 그 분이 발령 사실을 통보받은 ‘시기’였다. 당장 다음주 월요일부터 새로운 부서로 출근해야하는데 그 전 주 목요일에 발령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4일 전, 주말 제외하면 이틀 전인 셈이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정황상 며칠 앞서 인사 부서에서 전자결재 시스템을 통해 소속 부서장에게 내용을 전달한 것으로 짐작됐다.
사무직이 아니라서 사내 전산 시스템에 매일 로그인 할 필요가 없다보니, 당사자가 발령 사실을 인지한 시기가 더 늦어진 상황인 듯 했다. 그런데 늦어도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부서장이나 중간 관리자가 구두로라도 미리 알려줬다면 그 분이 받을 충격이 덜 했을지도 모른다. 좀 야속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배려 부족이나 세심하지 못한 일 처리를 탓하기에는 시스템의 문제가 커 보였다.

그후로도 비슷한 이유로 찾아온 분들이 여러 번 있었다. ‘저희 회사가 원래 좀 그래요’라는 체념 섞인 말을 듣기도 했다. 필자가 일하던 곳은 회사에서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센터였고, 대부분 힘들어도 참고 참다 큰맘먹고 찾아오는 직원들이 많았다. 비슷한 이유로 찾아오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 남몰래 끙끙 앓고 있을 직원들은 더 많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 차원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하고 대대적인’ 개선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발령 사실을 인지한 후 현재 업무를 잘 정리하고 새로운 업무를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할 최소한의 시간을 보장하자는 의견이었다. 당사자에게 알려야 할 최소한의 기한을 정하는 것, 그게 전부다. 최소 2주 전에는 본인에게 인사발령 사항을 알리고 직접 확인 서명을 받는 방식을 예시로 들어 경영진에게 제안할 내용을 정리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적절한 시기에 공식적으로 제안할 생각으로 어느 폴더에 저장해두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결국 그 제안은 전달하지 못했다.

좋은 의미의 변화든 그렇지 않든 모든 변화는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예측 불가능한 변화, 갑작스러운 변화라면 더욱 그렇다. 근무지 이동, 업무 변경을 3~4일 전에 통보 받는 것이 과연 상식적일까?
그런 상황에서도 어떤 이들은 며칠 혹은 몇 달 간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적응할지 모른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든 적응해보려 애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애쓰는 동안 생각보다 오랫동안 우울하거나 불안해하고,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인다. 잠들기 위해 전보다 자주 술을 찾는 사람도 있을테고, 그러다 고민 끝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찾아가기도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상식적이지 않은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노력해보라는 것, 회사의 다른 직원들도 다 겪는 일이니 극복해내라는 것은 온당한가. 구성원 대부분이 회사의 시스템, 정책과 규정을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갈수록 직원들의 정신건강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회사들이 늘고 있다는 것을 종종 체감한다. 여러모로 고무적인 일이다. 사내 심리상담실을 설치하고 명상 수업을 여는 것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조직을 합리적으로 바꿔나가는 것, 비상식적인 규정을 하나씩 수정해가는 것이야말로 사업장 정신건강 예방과 관리의 가장 기본이 아닐까 싶다.

김세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직업환경의학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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