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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의 삶과 문학] ‘그늘은 사라지고 숲의 세계는……’
- 유형진 시인의 시집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
- 유형진 시인의 시집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아시아

스무 살이 된 아이는 정동진에 가고 싶다고 했다. 노동자인 아버지와 여행할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한 번 며칠간의 여름휴가뿐이었다. 우리는 주로 바다에 갔다. 아버지와 아들은 해가 뜨기 전에 둘이서만 바닷가로 나가 일출을 기다렸다. 아들에게 그것은 아버지와 둘만의 오래된 추억이었다.

‘숲은 버섯의 오래된 그리움, 그리움의 그리움의 그리움, 혼자 쓰러져 조용히 썩어가는 참나무 최후의 친구들/기계톱 소리가 들린다 어딘가 가까운 곳’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 5_ 태풍이 지나간 자리, 쓰러진 참나무 아래, 중, 유형진

이유를 알 수 없는 긴 장마에 여름은 고유의 뜨거움을 잃었고, 이 계절의 옷으로 지나가기에는 새벽과 밤이 쌀쌀했다. 일 년에 한 번 우리가 바다에 가기로 한 날에도 큰 비가 내렸다. 도로가 물에 잠기고 산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우리의 낡은 자동차로는 비가 쏟아지는 길을 무사히 건너 바다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런 날씨에 어차피 일출은 볼 수 없을 거라고, 아들이 먼저 추억을 포기했다.

‘홈플러스 플라스틱 팩에 담긴 안쓰러운 버섯이여, 그간 나누었던 우리의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하자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어딘가 태풍이 지나간 자리, 참나무 아래 버섯이 피어 있고’
-태풍이 지나간 자리, 쓰러진 참나무 아래

바다로 가려던 길에서 방향을 돌려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십년 전 아들이 열 살이었을 때, 우리는 그곳 용문사에 갔었다. 절 앞에는 천년을 훨씬 넘게 살아남은 은행나무가 있는데, 나라를 잃은 슬픔에 신라의 마지막 왕자가 심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래서였는지 절이 불타고 나라에 재난이 와도 은행나무는 살아남았다. 그때 우리는 숙소 대신 그곳에 텐트를 쳤다. 가을이었고 옆 계곡에서는 맑은 물이 흘렀다. ‘뒤집어진 호주머니 -유형진 시인의 시 <뒤집어진 호주머니를 가진 사람’을 가진 젊은 부부와 두 아이는 귀를 대고 은행나무의 소리를 들었고, 덩굴처럼 두 팔을 벌려 서로의 손을 잡고 나무를 안았다. 십 년이 지난 후, 용문사 은행나무의 숨소리는 듣지 못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도로가 빗물에 잠기는 것과 재난을 피해 어디론가 달리는 소들의 영상을 보았다. ‘기계톱과 포크레인의 포효를 멈출 손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모르니까/유형진’ 소들은 달려 스스로 높은 곳의 어느 사찰로 모여들었다. 강이 넘칠 것 같아서 우리도 일찍 그곳을 떠났다.

‘자신의 나이는 400세가 넘은 지 오래라고 했다./(중략)/저도 아주 예전엔 당신과 같은 따뜻하고 붉은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지요. 진시황제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십니까? 수은 중독으로 죽었어요./(중략)/시황제의 무덤엔 수은으로 된 강과 바다가 흐른다고 하지요.’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 1_수은혈 중

시집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는 유형진 시인의 신작 시집이다. 각각 스물세 개의 부제가 달린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 ‘연작시’는 ‘2016년 가을부터 모이게 된 광화문 광장의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광장 촛불집회에서 휘날리던 수많은 깃발들을 보며, 퀼트 바느질에 몰두하고 있던 시인은 낡은 체크무늬 셔츠의 천들을 깁고 좋아하는 마트료시카 인형을 아플리케 하여 시침핀을 여러 개 꽂은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의 깃발을 들고 광장에 나가려 했다고, 시집 말미의 ’시인의 에세이‘에서 전한다. 열어도 열어도 계속 같은 인형이 나오는 ’마트료시카‘와, 천과 천을 연결하는 ’시침핀‘은 당시의 광장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 페이지를 열어봐도 검은 페이지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래도 그 책을 열심히 보았습니다. 검은 페이지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들을./(중략)/이젠 표지의 제목마저 사라진, 그 책의 제목은 ⌜대성당의 시대⌟였습니다.’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 3_무너지는 대성당의 시대 중

그렇게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광장에 섰던 인간들은 숲이 무너지고, 숲의 생명들이 방향을 잃고, 뜨거운 여름을 상실한 세상에서, ‘그간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를 ‘없었던’ 것으로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유형진의 시집 속 마트료시카의 시들은 상실을, 우리가 잃어가는 것에 대한 잔혹한 슬픔을 여름이 사라진 이곳에서 전해주고 있다. ‘조각을 하고 시를 짓는 우리 무명의 예술가들은 당신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려고 하네 다가올 시대를 위해’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노래, 무너지는 ‘대성당의 시대’의.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아무도 알 수 없지만/비둘기와 들쥐들이 살피는 무덤이/그의 무덤인지도 확실하지 않지만/덕수가 사라지자/’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 심포니‘는 해체되었다.’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 16_ 덕수제화 중

-유형진 시인
200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피터래빗 저격 사건>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등이 있고, 2020년 여름, 신작 시집 <마트료시카 시침핀 연구회>를 출간했다.

이수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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