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IT기업이 환경 문제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공장과 매장 등 기업이 운영하는 시설이 쓰는 전력을 석탄에너지에서 재생에너지로 100% 대체하겠다는 ‘RE100’ 캠페인 동참 사례가 늘고 있다. 애플은 이미 자체 운영 시설의 모든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전환했다. 최근 대규모 풍력발전 공급 계약을 맺은 반도체 기업 TSMC도 에너지 전환을 선언하고 나섰다.
RE100 선언 기업 목록에 한국 기업은 한 곳도 없다. 주요 고객사가 한국 부품사에도 RE100 참여를 요구하면서 일부 재생에너지 전환이 이뤄지고 있지만, 글로벌 수준에 비해 미미하다. 한국 기업의 소극적인 대응에 대한 비판과 함께, 한국 전력 시장의 구조적인 문제도 지적된다.
14일 RE100(Renewable Energy100) 목록을 보면, 242곳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RE100은 기업에서 사용하는 모든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대체하겠다는 캠페인이다. 국제 비영리단체 ‘클라이메이트’와 ‘탄소 정보 공개 프로젝트(CDP)’가 주관하며, 지난 2014년 처음 소개됐다.
애플은 RE100을 주도하는 기업으로 꼽힌다. 이미 매장·사무실·데이터 센터 등 시설을 재생에너지로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2030년까지 RE100을 공급망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애플은 제품 생산을 주로 위탁업체에 맡기는데, 제품 생산 과정에서 기후 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완전히 제거할 계획이다. 애플은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75% 저감하고, 탄소 제거 솔루션을 개발해 나머지 25%를 감소시킬 계획이다.
당시 팀 쿡 애플 CEO는 “지구에 대해 모든 사람이 함께 염려하는 지금, 기업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기 위한 노력에 함께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회”라며 “기후 변화 대응은 새로운 시대의 혁신 잠재력, 일자리 창출, 탄탄한 경제 성장을 이루기 위한 기반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사업에서 삼성전자와 경쟁하는 대만 TSMC도 최근 RE100 대열에 동참했다. TSMC는 지난달 덴마크 국영 에너지 기업 외르스테드와 풍력 발전 전력 20년 공급 계약을 맺었다고 전했다. 외르스테드는 대만 해협에 풍력 발전 단지를 건설 중인데, 여기서 생산되는 전력을 TSMC가 매입하는 것이다. TSMC는 비제조 시설이 사용하는 전력을 2030년까지 100% 재생에너지로 공급할 계획이다. 2050년까지는 제조 공장을 포함해 모든 시설을 재생에너지로만 운영하기로 약속했다.
J.K 린 TSMC 부사장은 “우리는 저탄소·환경친화적 조치로 산업을 견인하는 동시에 지속가능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객사 RE100 동참 요구에 에너지전환 나서는 한국 기업
한국 기업도 RE100 기류를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저탄소를 시행하는 고객사가 한국의 부품사에도 RE100을 요구하고 있다.
애플은 71곳의 협력사로부터 2030년까지 제품 생산에 100% 재생에너지를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이 가운데 반도체를 공급하는 SK하이닉스와 휴대전화·디스플레이용 점착 테이프를 공급하는 대상도 포함됐다. TSMC도 애플 협력사 중 한 곳이다.
애플은 협력사 재생에너지 전환을 다방면으로 지원한다. 전문가를 초빙해 저탄소 계획 수립과 에너지 솔루션 도입을 돕고, 재정 지원을 제공한다. 현지 협력사 탄소 저감을 위해 중국과 일본에 태양광·풍력 발전소 건설에 투자하기도 했다.
현재 SK하이닉스도 애플과 저탄소 이행 방안을 논의 중이다. 또한, 2022년까지 중국 사업장을 대상으로 100% 재생에너지 전환 목표를 수립했으며, 재생에너지 TF를 구성해 중국 지역 재생에너지 조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 업계에도 RE100 바람이 불고 있다. RE100을 선언한 폭스바겐·BMW·GM 등 주요 완성차 기업은 배터리를 납품하는 LG화학·SK이노베이션·삼성SDI 등에 저탄소 동참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배터리 기업은 각각 일부 해외 공장에 RE100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은 지난달 ‘탄소중립 성장’을 선언하기도 했다. 2050년까지 모든 사업장의 탄소 배출량을 전망치 대비 60%(3천만톤)를 감축할 계획이다. 계획 이행을 위해 재생에너지 수급 방식과 국가별 제도를 고려한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탄소중립은 기업이 재생에너지 시설에 투자하는 등 방법으로 탄소배출을 상쇄해 실질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이다. 탄소 배출이 적은 재생에너지를 활용하는 RE100도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주된 방법이다. LG화학은 RE100 추진도 발표했지만, 아직 RE100에 정식 가입하지 않았으며, 세부 계획도 밝히지 않은 상태다.
LG화학은 “최근 글로벌 기업은 높은 수준의 공급망 관리를 요구하고 있다”며 “지속가능한 공급망을 구축하지 못할 경우 아무리 뛰어난 제품과 기술을 확보하고 있더라도 사업에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비자 접점이 높은 스마트폰·가전을 만드는 삼성전자와 LG전자에도 RE100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환경 문제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브랜드를 구축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부터 경기도 용인시 기흥 사업장 주차장에 1.5MW 규모의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하고 있다. 올해 완공될 예정으로, 지난달부터는 일부 사무공간에 태양광 전력이 공급되고 있다. 수원 사업장에는 1.9MW 규모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해 사용하고 있다. 미국 유럽 중국 공장은 지난해 재생에너지 비중이 92%였으며 올해 100%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태양광·풍력 발전소와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LG전자는 2030년까지 제품 생산 단계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7년 대비 50%로 낮출 방침이다. 한국 사업장에 총 6.7MW 규모 태양광 발전설비를 도입했다. 미국에서는 전체 전력 사용량 중 80% 이상을 재생에너지를 대체하고 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글로벌 기업이 RE100을 공급망으로 확대하면서 한국 기업에도 저탄소 동참 유인이 생기고 있다”며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기업 대응이 브랜드 가치로 이어지는 현상도 저탄소 확산을 가속화하는 요소”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수준에 못 미치는 한국 기업 에너지전환
전력 시장 구조 문제 지적도…정부, 녹색요금제·전력구매계약 검토
한국 기업은 나름대로 재생에너지 비중을 확대해가고 있지만, 외국 기업에 비해 대응 정도가 미미하다. RE100 기업 목록에도 한국 기업은 한 곳도 없다. 재생에너지 100% 전환을 공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기업이 자체 재생에너지 시설을 구축해 사업장 운영에 활용하고 있지만, 글로벌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문제 제기도 나온다.
한국 기업이 재생에너지 전환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비판과 함께, 한국의 전력 시장 구조가 재생에너지 확대 측면에서 갖는 한계도 지적된다. 한국에서는 한국전력공사가 독점적으로 전력을 공급한다. 기업이 자체적으로 구축한 재생에너지 시설을 통해 사업장 운영에 필요한 전력을 조달하는 건 가능하지만, 다른 사업체와 직접 전력 공급 계약을 맺는 건 제한된다. 한국전력공사는 석탄에너지와 재생에너지 전력을 구분하지도 않고 있어, 기업이 재생에너지로 만든 전력만을 사용하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다. 외국 기업이 민간 차원에서 재생에너지 전력 공급 계약을 맺는 것과 대비된다. 이를 두고 한국 기업이 외국 사업장에 한해서만 RE100을 계획·이행하는 배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정부는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재생에너지 사용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녹색요금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녹색요금제는 전기료에 웃돈(프리미엄)을 얹으면 재생에너지를 활용한 것으로 인정하는 제도다. 녹색요금제를 통한 수입을 재생에너지에 재투자해 탄소 배출 감축에 기여한다는 취지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재계와 프리미엄 수준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재생에너지 활용 인증을 받으려는 재계는 프리미엄을 낮게 책정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는 녹색요금을 지불하면 온실가스 감축 실적까지 인정하는 방안도 요구한다. 정부는 기업에 온실가스 배출 허용량을 제한하고, 허용량을 초과할 경우 배출권을 구입하도록 하고 있다. 기업 요구는 녹색요금 지불을 배출권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산자부는 지난 4월 이러한 방안으로 검토 중이나 확정된 바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녹색요금제는 한국전력공사가 전력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기업의 재생에너지 사용을 확대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면서도 “프리미엄을 지나치게 낮게 설정하거나 배출권과 연계하는 등의 과도한 인센티브는 오히려 탄소 배출 감축이라는 당초 취지에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장과 시민사회로부터 저탄소 이행 요구가 강해지면서, 재생에너지 확대는 그 자체로 기업에 시장경쟁력과 브랜드 가치 제고라는 이점이 된다”고 설명했다.
재생에너지에 한해 발전사업자와 전력 사용 기업이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기업 전력구매계약(PPA·Power Purchase Agreements) 제도화도 논의되고 있다. 재생에너지 전력 거래가 활발해지면, 기업의 에너지전환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기업 수요에 따라 재생에너지 설비가 확대되고 관련 시장 활성화로 기술이 발달해, 발전 단가가 내려가는 효과도 있다. 미국과 유럽은 석탄에너지보다 재생에너지 전력이 저렴한 경우도 있어 기업의 에너지전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임재민 에너지전환포럼 연구원은 “녹색요금제는 프리미엄이 붙어 기업 부담이 가중되지만, PPA를 도입하면 재생에너지 구매 비용을 낮춰 기업의 에너지전환을 유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한무 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