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식량 자원으로 취급하는 인식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 동물 역시 생명이고, 고통을 느끼는 존재다”
모든 동물이 학대당하지 않고 죽임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더는 동물을 식량과 자원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다.
20일 수원지법 형사2단독 우인선 판사는 도계장 입구를 가로막고 동물권리장전을 선언해 업무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동물권 단체 활동가들에게 각 300만 원의 벌금을 선고하며 이같은 판단을 내렸다.
동물권 직접행동 단체 디엑스이(Direct Action Everywhere-Korea) 활동가들은 세계 동물의 날인 지난해 10월 4일 약 200kg 시멘트로 가득 찬 여행 가방 안으로 손을 결박한 채 도계장 입구에 드러누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관련기사:“살해당한 닭 대신 증언한다” 초복 ‘인간 법정’서 울려 퍼진 동물의 목소리)
9천여 마리의 닭을 실은 트럭을 멈춰 세운 이들은 동물권리장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모든 동물에게 ▲고통과 착취의 상황에서 구조될 권리 ▲보호받는 집, 서식지, 또는 생태계를 가질 권리 ▲인간들에게 이용·학대·살해당하지 않을 권리 ▲소유되지 않고 자유로워질 권리 등이 보장돼야 한다는 취지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은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비폭력적 저항운동을 한 것이므로 업무방해죄 구성요건에 맞지 않는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형법 제314조는 위력으로 사람의 업무를 방해한 자를 처벌하고 있다. 오히려 형법상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 판사는 “업무방해죄 구성요건이 반드시 유형력 행사에 국한되지 않는다”라며 “설령 피고인들의 신념에 기초한 행위라고 해도 그 수단과 방법이 상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고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물의 삶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부당하게 취급받거나 학대당하지 않아야”
“권리 평등은 개체와 종을 가리지 않는다”
우 판사는 다만 양형 이유에서 “이제는 동물의 생명도 보호법익으로 소중히 다뤄야 할 가치”라며 이러한 인식 변화의 배경에 동물을 보호 대상을 넘어 권리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세계적인 운동이 있었다고 짚었다.
우 판사는 “동물은 분명 생명체에 해당한다. 과거 인식은 동물을 식량, 의류의 수단, 자원에 불과한 것으로 한정했다. 민법상 동물을 권리의 객체인 물건으로 취급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라며 “하지만 피고인들의 주장대로 서구 사회를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과거 인식에서 벗어나 생명체로서 동물을 보호하고 나아가 권리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라고 말했다.
우 판사는 특히 “모든 동물은 생태계에서 존재할 평등할 권리를 갖고 있고, 권리 평등은 개체와 종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동물의 모든 삶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부당하게 취급받거나 잔인하게 학대당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인간에 의존하는 동물, 즉 반려동물은 생명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라며 1978년 유네스코 동물권리선언 일부를 언급하고, “피고인들이 주장하는 동물권 개념도 여기에 포함됐다”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선 1991년 동물보호법 제정으로 이 같은 인식이 반영됐다며 우 판사는 “동물보호법의 입법 취지처럼 과거와 같이 동물을 식량 자원으로 취급하는 것은 지양하는 것이 옳다”라며 “동물 역시 생명이고,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건전하고 책임 있는 사육문화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도축 과정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도계장 업주는 또 다른 피해자”
고통받는 동물보다 인간 재산 우선한 법원
우 판사는 동물권에 공감하면서 한편으로 인간 중심적 태도를 견지했다.
우 판사는 “동물들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건 다수의 공감과 지지이며, 피고인들과 같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동물들의 현실 개선이) 이뤄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라면서도 “그러나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면서 피고인들이 원하는 공감과 지지를 얻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이어 “위생적이지 않은 사육 환경, 생명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도축 과정만을 바라보며 이런 행동을 할 게 아니라, 행여 나의 행동으로 인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한 게 아닌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행동한다면 언젠가는 다수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것이다. 이는 피고인들이 대변한다는 ‘여름이’라는 닭의 바람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름이’는 지난해 여름 도계장에서 탈출한 닭이다. 활동가들은 여름이를 구조해 병원에 데려갔으나 병원 측 신고로 도계장에 다시 끌려갔다. 피고인 중 한 명인 향기 활동기는 최후 진술에서 여름이와 만났던 일화를 언급하며 구조하지 못했던 미안함을 드러냈다.
이날 판결에 대해 향기 활동가는 “여름이의 이름과 권리가 판결문에 적혔다. 이는 인간이 정한 법의 영역을 넘어 법정 안에 있던 우리가 여름이와 같은 동등한 동물임을 느낀다”라며 “법정에 있던 모두가 동물로서 함께 여름이가 살고싶어했다는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던 건 우리가 그날 행했던 비폭력 직접행동 덕분”이라고 말했다.
“동물 현실 반영된 판결 환영”
여전히 ‘인간 중심적’ 법원 한계도
은영 활동가는 “동물이 처한 왜곡된 현실이 반영된 선고를 환영한다. 판결에는 동물이 우리와 같은 느끼는 존재로의 생명으로 권리가 있음이 반영됐다”라며 “동시에 동물을 여전히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현행법의 한계가 담겼다. 사회가 동물의 참혹하고 부당한 현실을 인지한다면 얼마든 바뀔 가능성이 언급됐다”라고 평가했다.
동물의 권리가 법정에서 보장받기 위해선 갈 길이 멀다는 비판도 나왔다. 동물보호법을 통해 동물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판단에 대해 은영 활동가는 “동물보호법은 개, 고양이 등 반려동물에 대한 권리를 보장할 뿐”이라며 “판결에서 언급된, 독자적인 이름을 갖는 ‘여름이’로 대표되는 농장 동물의 권리는 그들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지적했다.
도계장 업주를 ‘또 다른 피해자’라고 표현한 것과 관련 은영 활동가는 “법원으로서는 현행법에 따라 제한적인 말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 현장에 있던 피해자는 부당하게 고통받고 목숨을 잃은 모든 닭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재판 과정에서 업주 측의 구체적인 피해를 산정하기 어려워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는데 이같이 언급하는 건 여전히 인간 중심적 인식을 보여준다. 업주 측의 피해가 있다고 해도 동물을 이용해 수익을 얻는 산업은 현행법의 보호를 받는다. 동물들이 부당하게 잃는 피해에 비할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활동가 측 이찬 변호사는 활동가들의 방식이 다수의 공감과 지지를 받지 못한다고 판단한 부분과 관련해 “지금까지 여러 방법으로 동물권 운동이 이뤄졌고, 이에 대한 공감이 늘고 있지만, 축산업은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자본의 힘을 업고 발전하면서 국가와 법의 보호를 받는 산업이 됐다”라며 “여기서 더 물러서서 공감을 얻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과연 효과적일까”라고 의문을 표했다.
이어 “법원은 결국 위생적이지 않은 사육 환경과 도축 과정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라며 “이번 판결은 회사의 재산상 피해가 동물들의 생명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법원은 동물과 관련된 문제에서 굉장히 인간 중심적이고 보수적이다”라고 질타했다.
은영 활동가는 “우리는 이에 항소해 멈추지 않고 더 많은 동물의 왜곡된 현실을 담은 판례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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