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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눈보라 치는 날 제주 종달리 비념에 넋 잃은 사진가의 ‘살암시민 살아진다’

제주도 시골 마을을 걷다 보면 한적한 오솔길 한 귀퉁이에 오래된 팽나무 하나가 심어져 있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이 나무의 열매를 딱총 총알로 쓰곤 했는데, 총알이 나가는 소리가 ‘팽~!’한다고 하여 팽나무로 불리게 됐다(?)는 유래가 있다. 그런데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됐던 이 나무가 그 이름의 유래와는 어울리지 않게 마을에선 꽤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는 경우가 많다. 마을사람들의 안녕과 바람을 들어주는 신목(神木) 역이다.

처음 장엄하게 서 있는 이 나무를 본다면, 그 존재감에 좀처럼 눈을 떼기 힘들다. 나무의 형상은 보통의 나무와는 조금 다르다. 보통의 나무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느낌이라면, 이 나무는 하늘을 품으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여기에 흰 천이 나뭇가지에 묶여 있고, 그 앞에 초까지 놓여 있으면 영락없는 신목이다.

제주도에선 이런 나무나 갈라진 바위틈, 현무암을 깎아 만든 궤 등을 신(神)이 깃든 신체(神體·신령을 상징하는 신성한 물체)로 여기고 그 앞에서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바라는 굿을 펼치곤 했다. 그리고 이곳을 신당(神堂)이라고 불렀다. 신당은 지금도 제주도 곳곳에 현존한다.

책 ‘제주도 신당 이야기’의 저자 하순애 철학박사에 따르면, 천주교·일제강점기의 신당 파괴와 박정희 정권의 미신타파 운동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는 여전히 350여 곳의 신당이 있다고 한다. 현대의 정서에는 맞지 않을 것 같은 신당 수백 개가 보존돼 있다니 의아할 수 있지만, 놀랍게도 이곳에선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바라는 굿이 지금도 해마다 펼쳐진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게 된다)는 제주도민들의 말처럼,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맥을 이어온 것이다.

물론 신당이 도시 확장과 난개발 등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신당의 신성성 또한 점점 무속신앙이나 보존해야 할 문화쯤으로 치부되면서 본래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강건 작가 설명:사백년 된 팽나무 아래에 제물 바구니들이 놓여 있다. 단골들은 새해가 되면 본향당신께 인사를 드리고 한 해의 번영을 기원한다. (소박한 성소 p114-115)
강건 작가 설명:사백년 된 팽나무 아래에 제물 바구니들이 놓여 있다. 단골들은 새해가 되면 본향당신께 인사를 드리고 한 해의 번영을 기원한다. (소박한 성소 p114-115)ⓒ강건 사진작가

눈보라 휘날리던 2015년 1월1일
우도 향해 비념 하던 식당주인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강건은 2014년부터 올해까지 제주도 전역에 있는 350여개 신당 중 189곳을 답사하며, 제주 신당의 신성함을 사진으로 담아왔다. 그리고 올해 3월 20일엔 신당을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 96점을 수록한 ‘소박한 성소’(열화당)를 발간했다.

25일 강건 작가와 진행한 비대면 인터뷰를 통해, 어쩌다 신당 사진을 찍게 됐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광고사진을 찍는 스튜디오에서 일을 배우던 그는 2012년 제주도로 이주하는 지인을 돕다가, 제주도에 정착하게 됐다. 그는 제주도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목수 일부터 시작해 제주위클리·제주환경일보에 사진·글을 기고하는 등 다양한 일을 했다. 2013년부터 2년간은 제주도 중산간 마을을 돌아보고 사진으로 기록하는 ‘제주도 중산간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를 하던 중 그는 서귀포 남원읍 하혜리 마을에서 신당을 처음 접했다.

그는 “좁고 긴 올레(‘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를 지나서 나오는 안온한 공간 속에 마을 주민들의 정성과 흔적이 가득했다”며 처음 신당을 접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그는 마을이장으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아프거나 큰일이 생길 때마다 조용히 이곳을 찾곤 비념(작은 규모의 굿)을 드리고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 뒤로, 제주도 곳곳에 있는 신당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신당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2015년 1월 1일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이날, 우도가 보이는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의 한 신당(생개납돈짓당)에서 우연히 마을 주민들이 비념을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비념을 위해 신당을 찾은 마을주민을 ‘단골’이라고 부르는데, 당시 단골은 우도에서 새로운 식당을 여는 사장이었다고 한다. 사장이 우도 내 신당이 아닌 바다 건너 종달리 신당에서 굿을 하는 이유는 궂은 날씨로 배가 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날짜를 바꾸면 되지 않냐”고 물었더니, 사장은 “태풍이 와도 제일(祭日·제사 지내는 날)은 바꾸지 않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그때 찍은 종달리 신당 사진은 사진집 ‘소박한 성소’(p.78-79)에도 담겼다.

바다 위로 쏟아지는 눈에 안개처럼 희미해진 바다를 배경으로, 흰 눈이 덮인 현무암 사이에 오방색으로 치장한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사진이다. 그는 이 사진을 가장 아꼈다.

강건 작가 설명: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바닷가에 솟은 바위가 눈에 띈다.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우묵사스레피나무에 물색과 지전을 걸어 놓는다. 바다와 관련된 생업을 지닌 단골들이 다니는 당이다. (소박한 성소 p78-79)
강건 작가 설명: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바닷가에 솟은 바위가 눈에 띈다.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우묵사스레피나무에 물색과 지전을 걸어 놓는다. 바다와 관련된 생업을 지닌 단골들이 다니는 당이다. (소박한 성소 p78-79)ⓒ강건 사진작가

성소에 끌렸던 이유

사진집 ‘소박한 성소’ 가장 뒷장(p.163-165)에 그려진 제주도 지도엔 189개의 검은 점들이 빼곡하게 찍혀있다. 그가 탐방한 신당이다. 강건 작가는 5년 전 시작한 신당 사진 작업을 올해도 이어가고 있다.

신당에서 치러지는 당굿은 현장에 가본다고 쉽게 찍을 수 있는 행사가 아니다. 마을이장이 허락을 해주더라도, 당굿을 이행하는 심방(‘무당’의 제주방언)이나 신당을 찾아 소원을 비는 마을주민들이 허가해 주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다. 실제로 2018년 서귀포시 보목동 신당(조녹잇당)에서 펼쳐지는 굿은 마을이장의 허락을 받았으나, 심방과 주민들이 허락해주질 않아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서 펼쳐지는 잠수굿의 경우 해마다 굿하는 시기에 촬영 허가를 요청하다가 2019년에서야 겨우 허가를 받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단골인 마을 해녀들에게 신뢰를 쌓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10대 때부터 무속인의 길을 걸어온 한 당맨심방(마을의 당을 관리하고 굿을 도맡아 하는 무당)은 “따지고 보면 나도 마을의 하청이기 때문에, 내 의견보단 단골의 의견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그는 전했다. 이는 마을 신당의 주인은 심방이 아니라 마을 주민이라는 말이라고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마을주민들이 이처럼 사진을 찍는 일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그만큼 이 일을 애정을 다해 준비하기 때문이다. 강건 작가는 “동김녕 잠수굿은 그 마을의 해녀 중에서 몇 사람을 선정하여 일주일 전부터 굿에 필요한 음식, 식기 등을 준비하면서 정성을 들인다”라며 “다른 해녀들도 각자가 부정 타는 행동을 하지 않고 정성을 들여서 마을굿을 맞이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삼일 전부턴 고기와 술을 먹지 않으며, 작은 곤충도 죽이지 않고, 죽은 것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어떤 경우엔 어르신이 ‘요 며칠 어떤 사진을 찍었냐’고 물어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부정적인 사진을 찍은 경우엔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굿을 하기까지, 마을사람 모두가 마음과 정성을 들이는 셈이다.

그런데 막상 진행되는 굿이나, 신당의 모습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는 제주도 신당을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지만,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또 신당에서 펼쳐지는 당굿에 대해 “심방(‘무당’의 제주방언)에 따라 각자의 특색으로 굿이 치러지지만, 공통적으론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드러나고 애정과 정성이 보이며 모든 것을 존중하는 태도로 감동을 준다”고 했다.

강건 작가가 신당 사진을 찍기 시작한 이유도 이런 ‘소박한 정성’에 끌렸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집 ‘소박한 성소’에서 하순애 박사는 “모든 당에는 신을 상징하는 신체가 있는데, 각 당마다 다르다. 나무가 가장 많고 그 외에도 자연석, 자연적으로 조성된 구멍, 특정한 물건 등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신체들마저도 소박한 자연성을 그대로 품고 있다”며 “제주 출신이 아닌 사진가 강건의 걸음을 수년간 신당으로 이끌어 온 것 역시 이러한 소박한 자연성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강건 사진작가의 제주 신당 사진집. 올해 3월 펴냈다.
강건 사진작가의 제주 신당 사진집. 올해 3월 펴냈다.ⓒ열화당
집 개조 중인 강건 사진작가
집 개조 중인 강건 사진작가ⓒ강건 페이스북

소박한 바람

제주에서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주의 땅은 온통 돌밭이다. 농사를 짓는 땅에 가보면 한쪽 구석이나 밭 중앙에 성인키 높이로 쌓인 돌탑을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농부가 농사를 짓기 위해 땅에서 돌멩이를 골라내다 보니 탑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골라냈건만, 그래도 밭은 돌밭이다. 그만큼 제주도는 척박한 땅이었다. 거기다가 매해 풍해(風害), 수해(水害), 한해(旱害)가 끊이질 않았다. 그나마 바다가 있어서 먹고살았다.

조선시대엔 중앙 관리와 지방 토호의 이중 수탈,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했다. 조선시대 정부는 제주에서 제주 특산물을 안정적으로 얻기 위해 도민들이 제주를 탈출하지 못하도록 ‘출륙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엔 일본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해방 뒤엔 제주도 전체가 빨갱이 섬으로 몰려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됐다.

제주도민들이 억척스럽게 지켜낸 삶을 생각해 보면, 신당은 도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그래서인지 책 ‘소박한 성소’에서 “신당에 들어서니 기승을 부리던 바람이 잔잔히 가라앉는다”는 작가의 말처럼, 신당은 바람이 몰아쳐도 안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고 한다. 그곳은 제주 사람의 삶을 품은 정신적 의지처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제주도민들이 신체에 빌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저 소박한 ‘안녕’이지 않았을까.

서면 인터뷰에서 강건 작가에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1년 계획도 잘 세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감동적인 말을 잘하고 싶어서 이런저런 공부를 해볼까 한다. 아! 농부가 되는 꿈이 있다. 마당이 생겼으니 텃밭도 가꿔보고, 특히! 닭을 몇 마리 키워볼까 한다.”

참 소박한 답변이다.

사실 강건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2012년 2월이다. 네이버 블로그를 탐문하다가 그의 사진에 매료됐었다. 그러다 올해 8월 제주 애월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사진과 글을 보면서 들었던 상상 속 그의 모습도 그랬지만, 만났을 때 모습도 소박하고 담백했다. 제주가 고향인 기자보다 더욱 제주를 닮아 있었다.

강건 작가는 지난 2018년 9월 제주에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나 결혼했다. 내 집 마련의 꿈을 키우던 중 7월 말에 애월에 구옥을 샀다. 최근엔 구옥의 껍데기를 다 벗겨내고 새로운 살을 입히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는 “상상만 하던 일을 실현 중에 있다”라며 “우리 부부의 색이 드러나는 구조로 바꾸고 싶어서 기존의 인테리어를 전부 철거하고 내부 공사를 하고 있다. 목공 작업뿐만 아니라 철거부터 설비, 미장, 도장, 타일, 마루까지 최대한 직접 공사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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