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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만난 하나님] 교회여성의 역할은 누가 정하나?
여성 안수가 허용되지 않으면서 교회는 남성에겐 ‘지도자’로서 설교와 목회를 담당하고 있는 반면에, 여성은 ‘남성에게 부종하는 존재’로서 ‘봉사와 섬김’을 해야 한다는 성역할 분업이 강조되고 있다. 2017년 열린 예장 합동 총회장 앞에서 여성안수 허용을 요구하는 총신대 여동문회 회원들. 사진 제일 오른쪽이 강호숙 박사.
여성 안수가 허용되지 않으면서 교회는 남성에겐 ‘지도자’로서 설교와 목회를 담당하고 있는 반면에, 여성은 ‘남성에게 부종하는 존재’로서 ‘봉사와 섬김’을 해야 한다는 성역할 분업이 강조되고 있다. 2017년 열린 예장 합동 총회장 앞에서 여성안수 허용을 요구하는 총신대 여동문회 회원들. 사진 제일 오른쪽이 강호숙 박사.ⓒ기타

[광고1교회에서 여성들은 어디에 있나?

현재 교회는 8.15 광화문 집회로 확산된 교회발 코로나19 전염으로 인해, 비대면 예배 외에는 성경연구회, 찬양연습, 기도회, 식사모임 등이 금지된 상태다. 코로나19 사태가 언제 진정될지 모르며 모든 모임과 행사가 멈춰버린 상황에서, 교회는 마치 어두운 터널 속 미로에 갇혀버린 것만 같다. 교계 안에서도 8.15 광화문 집회 후, 자성과 비판의 성명서들이 제출된 가운데, 한국교회기독청년(이하 ‘기청협’)이 발표한 ‘교회 향한 30개조 반박문’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기청협이 교회위기의 원인으로서 시대에 역행하는 남성 중심의 기형적 결정구조에서 여성과 청년을 배제시켰음을 지적하고 있음에 전적으로 동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해서 필자는 이참에 여성을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고 남성을 보조하도록 정해놓은 교회 여성의 역할이 이대로 좋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 한다.

현재 교회에서 여성의 자리는 어디일까? 교회에서 남성은 당회장, 총회장을 맡거나 청년부 혹은 중․고등부 사역, 회계 책임자, 결혼예식과 장례식 등 예식을 집도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 자리에 있는 반면에, 여성은 목사 비서, 영아부나 유치부 사역, 그리고 남성 리더를 보조하는 역할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교회는 남성에겐 ‘지도자’로서 설교와 목회를 담당하고 있는 반면에, 여성은 ‘남성에게 부종하는 존재’로서 ‘봉사와 섬김’을 해야 한다는 성역할 분업이 강조되고 있다. 교회여성들을 생각하면 개 교회나 노회, 총회 모임에서 남성 목회자들이나 총대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복입고 안내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또 남성 목사 설교 후에 남성 대표자가 헌금 바구니를 들고 앞서가면 여성 위원들이 그 뒤를 종종 따라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왜 교회는 하나님의 존귀한 딸들을 ‘하녀’로 취급하는 걸까?’, ‘왜 교회는 ’남녀질서‘라는 가부장적 교리로 여성들을 의기소침하고 주눅 들게 만드는 걸까?’ ‘왜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여성들의 은사와 전문성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걸까?’ 라는 문제의식이 들기 때문이다.

교회여성의 역할은 누가 정하나?

한국개신교는 16세기 종교개혁의 토대 위에 있다. 종교개혁이 외친 ‘만인제사장설’의 정신은 성직자 중심주의를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직분의 평등사상과 인간성 회복의 선언이었다. 개신교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계승하여 여성의 인권과 남녀평등이 보장되는 오늘날 21세기에서 더욱 빛을 발하도록 힘쓰는 게 맞다. 하지만 교회는 60대 남성 중심의 직분 체제로 유지되면서 성차별이 더 극심해지고 있다. 즉 남성에겐 ‘항존직’을 부여하고, 여성에겐 ‘임시직’을 부여함으로써, 남성들은 권력 남용 속에서 무책임과 무반성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반면에, 여성은 무소속, 무관심 속에서 보호와 신원 받지 못하는 가여운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선 여성에게 목사직을 허락하는 교단도 여성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고 남성체제를 위한 ‘보조 리더십’만 허용되긴 마찬가지다. 이 외에도 목사와 장로의 아내를 각각 ‘사모’와 ‘장로 부인’으로 호칭하여 성경에도 없는 가부장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목회자의 아내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전문성과 직업을 가질 수 있음에도, 남편의 목회를 도와야 한다는 명분으로 직업도 갖지 못하게 하며, 직위와 사례도 없이 무한의무의 족쇄만 채우고 있다. 반면에, 여성 목사나 여성 장로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사부’라는 호칭을 부여하거나 ‘사부’의 역할에 대해선 일절 말이 없다.

지난해 9월 경북 포항시 북구 장성동 포항 기쁨의 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제104회 정기총회 모습. 참석자 대부분은 목사와 장로들인 60대 남성들이다.
지난해 9월 경북 포항시 북구 장성동 포항 기쁨의 교회에서 열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제104회 정기총회 모습. 참석자 대부분은 목사와 장로들인 60대 남성들이다.ⓒ뉴스1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해 본 교회여성의 역할
- ‘good-bad’가 아니라, ‘good-better’

성경은 여성의 역할을 정해놓았을까? 나는 마르다와 마리아 본문(눅 10:41-48)에서 답을 찾고 싶다. 우선 본문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에 화가 많이 났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라고 푸념 섞인 요청을 한다. 그때 예수님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라고 말씀하셨다.

현재 교회 여성의 역할이 마르다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볼 때, 마르다의 심정은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마리아와 마르다’의 본문을 이해하려면, 유대 사회의 여성들은 토라를 배울 수 없었으며 자율과 선택권도 없이, 남성이 정해준 역할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수동적이며 의존적인 존재였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이나 랍비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수님은 여성에게 선택권과 독립성이 주어지지 않은 유대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와 여성에게 토라를 가르치지 말라는 랍비들의 전통을 깨면서까지 여성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주체적 권리를 확증해줄 정도로 급진적이며 혁신적인 분이셨던 것이다.

필자는 ‘마르다 마리아’ 본문에서 세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첫째는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무슨 말씀을 가르쳤을까?’라는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은 그녀가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어 장사를 준비한 행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요 12:1-8). 물론 마태복음은 ‘발’이 아니라 ‘머리’에 기름 부음을 말하고 있지만(마 26:7), 동일한 사건의 변형으로 보기에 그렇다(크리드, 콘첼만). 마리아는 주님 발아래 앉아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에 관해 말씀을 들었을 테고, 유월절 엿새 전에 장사할 날을 위해 향유 옥합을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음으로써, 남성 제자들보다도 예수의 메시야직의 진정한 성격을 이해한 영민한 제자였음을 알려 준다.

이탈리아 화가 자코포 바사노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집에 계신 예수
이탈리아 화가 자코포 바사노가 그린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집에 계신 예수ⓒ기타

둘째는 “마리아가 좋은 편을 선택하였다”라고 했는데, ‘좋은 편’(‘what is better’)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비싼 향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책망하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마 26:10)라며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셨다. 이로 보 건데, 예수님께 식사 한 끼를 대접하려 했던 마르다의 행위를 ‘좋은’(good) 행위로 본다면, 마리아가 유대 사회의 관습과 편견을 깨면서까지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자 모험한 건 ‘더 좋은’(better) 행위로 봐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이는 시대의 관습에 순응하기보다 이를 어기고 저항하기가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리아는 무얼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일까? 라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고 말씀하셨다. 복음서에서 사람의 행위를 기념하라고 한 건 ‘마리아의 향유사건’ 외엔 없다. 유대 사회의 여성에 대한 시대적 편견과 고정관념을 초월하여 여성을 주체적이며 인격적인 존재로 보시며, 마리아의 행위를 기념하라고 한 예수님의 여성관과 말씀은 얼마나 멋지며 전복적인 복음인가!

‘마르다 마리아 본문’을 교회여성의 역할에 적용해본다면, 여성 개개인의 자질과 전문성에 따라 여성 스스로가 직접 정하도록 자율성과 직분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 여성의 역할은 마르다처럼 식당일과 청소와 같은 봉사의 일을 자신의 역할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기존 체제나 통념에 도전할지를 선택할 자유가 여성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교회 여성의 역할은 ‘good-bad’이라는 이분법 도식으로 배제와 차별을 유발할 게 아니라, 주님을 향한 교회 여성의 역할은 모두 ‘good’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better’에로 도전하는 여성들에겐 직위와 장을 마련해주는 게 복음의 급진성에 더 부합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 우리사회에 당면한 기후와 생태환경, 생명윤리와 성 평등, 성폭력과 차별문제, 저 출생과 성소수자 등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성들의 경험과 통찰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코로나19로 불안과 상실을 경험하면서도 비대면을 이어가야 하는 시기에, 여성들의 감성과 직관, 공감과 소통의 관계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교회의 성 평등은 꿈이 아니라 생존전략이요, 교회의 변화를 담아낼 ‘새 부대’라고 생각한다. 교회여성이 당당히 말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소신껏 함으로써 행복할 수 있도록, 교회가 기뻐하고 축복해주면 얼마나 좋으랴!

강호숙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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