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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노동이야기] 사소한 고통이란 없다

직업환경의학과 전공의 수련을 시작하고 생소했던 일 중 하나는 법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을 알아야하는데 아무리 들여다 봐도 낯설고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땐 의사가 법을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피해 갈 구멍을 찾기도 했다.

산재보험법을 보며 의아했던 것 중 한 가지는 ‘부상 또는 질병이 3일 이내의 요양으로 치유될 수 있으면 요양급여를 지급하지 아니한다’(산해보험법 제40조 3항)란 조항이다. 처음 접했을 때 ‘아니 왜? 3일 이내로 나을 수 있는 건 알아서 치료하라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왜 그렇게 정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법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모름지기 법이란 그렇게 ‘작은 규모’는 적당히 무시하는 것이 관례일까. 아니면 법 집행에는 사회적 비용이 드니까 그렇게 정한 것일까. 법을 학문적으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불만스러운 부분이었다.

손에 붕대 감아가며 일하는 사람들	(자료사진)
손에 붕대 감아가며 일하는 사람들 (자료사진)ⓒ필자 제공

왜 3일 이내 요양으로 치유될 수 있는 부상이나 질병은 ‘산업재해’가 아니라는 것일까. 비교적 가벼운 정도의 부상이나 질병이라 ‘재해(災害)’라고 하기에 어렵다는 것인가. 현행법 상 이같은 부상, 질병은 법적으로 보상 받을 수 없고, 사업주가 보고 할 의무도 없다. 산안법 상 사업주는 산업재해 발생 은폐 금지 및 보고 의무가 있지만, 이것도 ‘사망자가 발생하거나 3일 이상의 휴업이 필요한 부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린 사람이 발생한 경우’(산안법 시행규칙 제73조 1항)에만 해당된다.

하지만 이러한 법적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직업병’이 아닌 것은 아니잖은가. 물론 산재보상이 아닌 근골격계 부담작업 유해요인 조사 같은 예방 정책에 의해 관리되는 직업병도 있다. 또 회사 차원에서 공상 처리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 사업장이나 노동자들이 많다. 여러 예방 정책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는 별도로 따져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산재보상 기준에도 해당되지 않고, 보고할 의무도 없는 노동자들의 ‘자잘한’ 아픔과 고통은 어디에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 걸까.

필자가 근무하는 병원의 직원 검진 기간에 근골격계 문진을 했더니, 허리나 무릎, 발의 통증을 경험했거나 계속 갖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병원이라는 일터 자체가 노동집약적으로 돌아가는 곳이고 업무 특성상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비율이 높다.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대표적인 건강 문제 중 하나가 ‘하지정맥류’인데, 이로 인해 불편을 겪고 계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정맥류 자료사진
하지정맥류 자료사진ⓒ제공:뉴시스

하지정맥류라고 하면 혈관이 튀어나온 다리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육안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고통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리 부종과 통증, 저림과 마비로 밤에 자다 깬다는 분들을 심심찮게 만났다. 산재 보상 기준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불편들을 ‘자잘한’ 아픔과 고통으로 분류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정맥류가 진행되어 수술 등 치료를 받는다면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다. 병원 노동자, KTX 승무원이 하지정맥류로 인정받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사례들은 산재 통계에도 포함될 것이다. '

그러나 수술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초기 증상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은 어디에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비단 하지정맥류 뿐이겠는가. 산재 보상 기준, 보고 의무에 해당되지 않는 직업병은 얼마나 숱하게 많을까. 그런 직업병을 앓는 이들의 기록은 어디에 남는 것인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산업재해 통계는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것을 바탕으로 실효성 있는 산재예방 정책, 산업보건 정책을 강구하고 수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일상적으로 늘 경험하지만 법적 기준에 해당되지 않는 아픔과 고통까지 모두 기록하고 보고하게 된다면, 그런 통계가 산업보건 정책에 반영된다면 어떨까. 우리의 일터가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본다.

김세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직업환경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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