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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는 어떻게 기축통화가 됐나? _ 스미소니언 협정

*편집자 주 - 추석 명절을 맞아 경제역사에서 벌어졌던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건들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휴 기간 동안 모두 다섯 건의 경제역사가 소개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① 달러는 어떻게 기축통화가 됐나?_ 스미소니언 협정
② 포르투갈과 스페인, 세상을 절반으로 나누다_토르데시야스 조약
③ 몰락한 시장경제, 무너진 자본주의의 신념 _ 대공황
④ 미국, 핵폭탄이 아니라 환율로 일본을 꿇리다 _ 플라자합의
⑤ 독일을 짓밟은 쾌감도 잠시, 유럽의 자살골 _ 베르사유 조약

외국 여행 중에 식당에 들러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 마침 그 나라 돈이 다 떨어졌다. 이때 당당하게 지갑에서 우리나라 돈을 꺼내 지불한다면? 식당 주인은 매우 황당해 할 것이다.

아무리 “두 유 노우 세종대왕?”, “신사임당 이즈 베리 페이모스 인 마이 컨트리!”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다. 한국 돈은 한국에서나 통용되는 거지, 다른 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지갑에 달러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라에 따라 식당에서 달러를 받는 곳도 있고 안 받는 곳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달러를 들이미는 순간 사기꾼 취급은 절대 받지 않는다(세종대왕을 들이밀면 사기꾼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달러를 본 식당 주인은 ‘이 사람이 돈은 있는데 환전을 못했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마 식당 주인은 “길 건너에 환전소가 있으니 우리 돈으로 바꿔 오세요”라고 친절히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

이처럼 국제 사회에서 달러와 원화는 취급받는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짐바브웨 같은 나라는 아예 자기 나라의 화폐를 없애고 달러를 공식 화폐로 지정하기도 했다. 요즘은 유럽연합(EU)의 화폐인 유로(EURO)도 꽤 대접을 받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인정받는 화폐는 달러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사연

국가가 무역을 할 때 사용하는 화폐를 기축통화(基軸通貨)라고 부른다. ‘기본적으로 축이 되는 통화’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key currency’라고 적는다. 나라끼리 물건을 사고팔 때 “두 유 노우 세종대왕?”, “노, 아이 돈 노우 세종대왕!” 식의 다툼을 막기 위해 두 나라가 사용할 화폐를 미리 정해두는 것이다. 대부분의 무역 거래에서 사용되는 화폐가 바로 달러다. 즉 달러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 1의 기축통화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기축통화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화폐 파운드였다. 하지만 전쟁 직후 영국의 지위가 약화되면서 파운드를 기축통화로 쓰는 나라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각 나라들은 새로운 무역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어떤 화폐를 기축통화로 삼아야 안전할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새로운 기축통화로 낙점된 것이 새롭게 초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화폐 달러였다. 다만 이 약속에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달러가 종이쪼가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보유한 금의 양만큼만 달러를 찍어내기로 국제사회에게 약속을 한 것이다.

아직까지 기축통화인 달러.
아직까지 기축통화인 달러.ⓒ제공 : 뉴시스

이런 제도를 금본위제도(金本位制度)라고 부른다. 화폐를 찍을 때 보유한 금만큼만 찍기로 한 약속은 달리 말하면, 그 화폐를 들이밀면 미국 정부는 언제든지 약속된 양만큼 금을 내어 줘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약속에 따라 미국은 연방정부에 저장된 금의 양만큼만 달러를 발행했다. 다른 나라가 달러를 미국 정부에 내밀면, 미국은 언제든지 그 양만큼 금을 내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달러는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금을 기반으로 한 매우 안정적인 화폐였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이상한 조짐이 감지됐다. 서구 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미국은 온 나라에 군대를 파견했고, 원조를 퍼부었다. 당연히 미국은 이 돈을 달러를 찍어내면서 감당했다. 그런데 얼핏 봐도 미국이 새로 찍어내는 달러의 양은 미국이 보유한 금의 양을 훨씬 초과했다.

불안해진 선진국들이 미국 연방정부로 달려가 달러를 내밀면서 금을 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너무도 태연히 “우리는 그만한 양의 금이 없어서 내 줄 수 없다”고 선언해버렸다. ‘보유한 금의 양만큼만 달러를 찍겠다’는 약속을 미국이 헌신짝처럼 내던졌던 것이다.

이건 한 마디로 전 세계를 속인 사기극이었다. 하지만 서구 사회는 이 희대의 사기꾼 미국을 응징할 힘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았던 유럽은 미국과 달러의 붕괴를 용인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선진 10개국 재무장관들은 1971년 12월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 이 희대의 사기꾼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은 용서를 넘어, 앞으로는 미국이 금을 갖고 있지 않아도 달러를 기축통화로 인정하기로 했다. 응징은커녕 단지 사기꾼의 힘이 세다는 이유로 사기꾼에게 면류관을 씌워준 셈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 달러를 완벽한 기축통화 지위에 올려준 스미소니언 협정(smithsonian agreement)이다.

이때부터 미국의 달러는 완벽한 종이 쪼가리로 변신했다. 달러를 들고 간다고 미국 정부가 금을 내 준다는 보장은 사라졌다. 그런데도 이 종이쪼가리는 미국이 발행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했다. 강대국(이라고 쓰고 ‘깡패’라고 읽어야 함)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기축통화가 보장해 주는 국가의 안위

그렇다면 미국은 왜 약속을 파기하면서까지 달러를 기축통화로 유지하려고 애를 썼을까? 자국의 화폐가 기축통화가 되면 그 나라가 얻는 이익이 실로 막대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달러를 지배한다는 사실은 곧 미국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다. 미국은 달러 덕에 경제적으로 결코 망하지 않는 불멸의 제국을 건설했다.

모든 나라는 빚이라는 것을 지고 산다. 그리고 빌린 돈을 갚지 못할 지경이 되면 당연히 그 나라는 망한다. 우리도 1997년 외환위기 때 국가 부도를 경험했다. 왜 부도가 났을까? 외국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빚은 무려 304억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45조 원)나 됐지만 정부의 금고에는 빚을 갚을 달러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1998년 1월 공영방송 《KBS》의 캠페인을 계기로 역사적인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달러를 확보하기 위해 국민들이 반지와 결혼 패물 등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3월 14일 종료된 이 운동에서 무려 225톤의 금이 모였다. 이 돈은 당시 시세로 21억 7,000만 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3조 원)나 됐다.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미국은 이런 참사를 겪지 않는다. 달러가 기축통화이기 때문이다. 돈을 빌린 뒤 갚지 못할 상황이 되면 미국은 종이 쪼가리에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년) 얼굴을 그려놓고 “이게 100달러짜리 돈입니다. 이걸로 빌린 돈 갚습니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벌어졌을 때 미국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려 16조 달러(1경 8,000조 원)나 달러를 찍어서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한국 정부 1년 예산이 500조 원 정도니 미국은 우리나라 1년 예산의 3.5배나 되는 거금을 그냥 종이에 찍어 당당하게 사용한 것이다.

이처럼 기축통화를 보유하면 그 나라 경제는 아무리 큰 위기가 닥쳐도 쉽게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달러가 보장해 준 미국 경제의 안정성은 오늘날 미국이 최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 일에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됐다. 유럽 국가들이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면서까지 EU를 건설하고 통합 화폐(유로)를 만들었던 이유도, 중국이 위안화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수많은 노력을 쏟아 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축통화의 딜레마

그렇다면 기축통화를 보유한 것이 무조건 좋기만 할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무역적자에 시달린 나라다. 무역적자가 생겼다는 것은 다른 나라와 거래를 하면서 내 나라가 판 물건보다 다른 나라로부터 수입한 물건이 훨씬 더 많았다는 뜻이다. 미국의 경우 1년마다 수지타산을 계산해보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보다 수입으로 쓴 달러가 훨씬 많았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미국의 무역적자는 사실 미국 정부가 용인한 측면이 크다. 기축통화를 보유한 나라는 무역흑자를 지속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경제학 용어로 ‘기축통화의 딜레마’라고 부른다.
만약 미국이 수십 년 동안 흑자를 봤다면 지금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미국이 흑자를 많이 냈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전 세계에 돌아다니는 달러가 계속 미국으로 흡수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달러가 미국으로 흡수될수록 세계 시장에서 사용되는 달러의 양은 점점 줄어든다. 명색이 기축통화인데, 각 나라끼리 무역을 할 때 사용해야 할 달러가 부족해지는 것이다. 이러면 당연히 각 나라들은 달러로 결제하는 데 불편함을 느끼고, 달러 대신 다른 기축통화를 찾는다.

그래서 미국은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역흑자를 내서는 안 되는 묘한 운명을 가진 나라다. 기축통화를 보유하면 그 나라 경제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매년 무역에서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미국의 오랜 정책에 최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미국의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무역으로 돈을 벌면 미국인들이 그것을 반길까? 절대 그렇지 않다. 특히 미국 학계와 미국 경제를 좌우하는 월가(Wall Street)에서는 이를 매우 우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흑자를 내면 당장 돈을 벌어서 좋기는 하지만, 달러가 미국으로 흡수되면서 기축통화의 지위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기축통화의 지위를 호시탐탐 노리는 유럽의 유로와 중국의 위안화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상태다. 만약 달러가 기축통화의 지위를 내려놓는다면 더 이상 미국은 세계의 패권국가로 남지 못한다. 미국이 이끄는 세상은 영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세상이 언제 끝날지 또한 아무도 쉽게 예상하지 못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미국 대통령이 “기축통화고 뭐고 우리는 돈이나 잔뜩 벌 거야”라고 주장하는 시기를 맞았다는 점이다. 트럼프의 임기가 올해 끝날지 4년 뒤에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기축통화를 기반으로 한 경제제국 미국의 시대는 어느 곳에서인가 이미 균열을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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