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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따릉이 타고 왕진 다니는 동네 주치의 가방 속엔 ‘페미니즘’이 있다
없음

“페미니즘만으로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페미니즘 없이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건강하다’는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왕진 가방에 페미니즘을 챙겨 다니는 동네 주치의가 있다. 서울 은평구에 자리한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조합) 살림의원의 추혜인 원장이다. 살림조합은 추 원장이 페미니스트, 은평 주민, 의료인들과 힘을 합쳐 만든 여성주의 의료협동조합이다. 여성들만 진료받는 곳이 아니다. 누구든 차별하지 않는다는 페미니즘 가치로 운영되는 곳이다.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의 추혜인 원장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의 추혜인 원장ⓒ추혜인

왕진과 주치의.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에서 낯선 단어들이 살림조합에선 익숙하다. 추 원장은 왕진을 다니며 진료실 밖 환자의 생활 전반을 들여다본다. 주치의로서 주민들과 환자-의사 관계를 지속하며 신뢰를 쌓는다. 지역사회 건강을 책임지는 일차의료의 핵심 역할이다. 일차의료 강화는 최근 의사 파업으로 드러난 국민과 의사집단 사이의 신뢰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추 원장은 지난달 25일 페미니스트 의사로서 환자에 대한 애정과 동네 주치의로서 의료계에 대한 고민을 듬뿍 담은 에세이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을 출간했다. 출간 이틀 전 추 원장을 은평구의 한 카페에서 만나 책에 담은 이야기들을 미리 들어봤다.

책 표지의 삽화는 살림조합 조합원이 그렸다
책 표지의 삽화는 살림조합 조합원이 그렸다ⓒ심플라이프

환자-의사 사이 벽을 허물어줄 ‘페미니즘’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료해줄 의사가 필요하다.’ 1996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추 원장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던 중 이 말을 듣고 이듬해 같은 대학 의대에 진학했다. 추 원장은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끌리게 됐다”라고 말했다. 대학 내 여성주의가 한창 꽃핀 시기 학교에 다녔던 그는 ‘영페미’다.

추 원장은 “차별과 혐오가 건강을 해친다”라며 “의사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대표적으로 성차별적 인식 때문에 여성 환자에 대한 오진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지적했다.

“의사가 여성 환자의 통증 호소를 믿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들이 있어요. ‘여성은 예민하고 불안하다’, ‘아프지 않아도 아픈 것처럼 과장한다’ 등 편견 때문에 환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거죠. 페미니즘은 편견을 깨부수는 역할을 하잖아요. 페미니즘이 진료의 기본이 되면 의사와 환자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고 의사소통이 자유로워져요”

책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저자 마야 뒤센베리)도 추 원장과 같은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여성이 진료실에서 겪는 차별을 연구한 이 책에 따르면, 응급실에서 복통 치료를 받기까지 남성은 49분이 걸리지만, 여성은 65분을 기다려야 한다. 심장마비가 온 젊은 여성은 집으로 돌려보내질 확률이 남성에 비해 7배나 높다. 여성의 증상 원인으로 쉽게 우울, 불안, 스트레스 등이 지목된다.

의사의 권위주의적 태도도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원인이라고 추 원장은 비판했다. “의료현장에서 성폭력 사건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의도가 없었더라도 환자의 오해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요. 의사가 진료실 안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람으로서, 환자의 동의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진료하는 거죠. 환자의 몸을 진찰할 땐 ‘어디 만져도 될까요?’, ‘지금 어디를 보고 있어요’ 등과 같이 계속 설명하고 동의받는 과정이 필요해요. 의사가 진찰하는 행위자지만, 몸의 주권은 환자에게 있잖아요. 동의와 설명이 없다면 환자들은 침해받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왕진을 나가 환자를 진료하는 추혜인 원장
왕진을 나가 환자를 진료하는 추혜인 원장ⓒ추혜인

추 원장의 여성주의적 시선은 특히 돌봄 영역을 재평가하는 부분에서 돋보인다. 귀지 파기, 손발톱 깎기, 기저귀 갈기 등 그동안 여성들의 하찮고 부수적인 일로 여겨졌던 간호와 돌봄이 ‘예방’의 측면에서 의사의 진료만큼 중요하다고 짚었다.

“의사들은 진료실에서 환자를 아주 잠깐만 봐요. 그리곤 의사의 처치가 환자의 삶을 결정한다고 잘못 믿죠. 하지만 환자의 삶에서 의사는 아주 일부에요. 환자가 처방한 약을 잘 먹는다는 보장도 없고, 약 먹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호흡기질환의 경우 진단과 처방은 의사의 몫이지만, 환자에게 시원한 공기를 쐬게 해주고, 숨을 편히 쉴 수 있도록 베개를 받쳐주고 무거운 이불을 들쳐주는 건 돌봄의 영역이에요”

욕창 치료에는 기저귀 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추 원장은 말했다. “의사들이 대학병원에서 피부·근육을 이식해 치료하기도 하지만, 수술 후 기저귀를 갈지 않고 자세를 바꿔주지 않으면 욕창이 재발할 수밖에 없어요” 책에서 그는 일본 만화 ‘헬프맨’ 주인공인 요양보호사 온다 모모타로의 대사, ‘누구도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초보자에게, 그것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지 않는다’를 인용하며, 진료만큼 돌봄은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

“돌봄은 일상을 계속 영위할 수 있게 해줘요.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배변하고, 이런 것들이 통합적으로 제공될 때 환자들은 단순히 환자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어요” 이런 시각에서 여성들의 돌봄 노동은 존중받을 수 있다. 살림조합은 통합돌봄센터를 준비하고 있다. 추 원장은 “의료와 복지, 돌봄이 통합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의사는 둘로 나뉜다
왕진을 나간 의사와 안 나간 의사”

추 원장은 의사를 둘로 나눈다. 왕진을 한 번이라도 나간 의사와 한 번도 안 나간 의사. “진료실 밖으로 나오면서 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시각이 생겼어요” 추 원장은 2012년 개원 무렵부터 왕진을 다니다가, 2018년 장애인 주치의 시범사업에 참여하면서 왕진하는 의사로 유명해졌다.

살림조합 조합원이 그려준 추혜인 원장의 캐리커처.
살림조합 조합원이 그려준 추혜인 원장의 캐리커처.ⓒ추혜인

“진료실에만 있으면 바깥을 상상하기 어려워요. 왕진 경험은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해요. 진료실 안과 밖에서 환자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진료 올 때 에너지가 너무 떨어져 불안한 상태인 환자들도 밖에서 만나면 쌩쌩 잘 다녀요. 그 흐름을 알아야 하죠. 또 진료실조차 못 오는 환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 수 있죠. 병원이 이렇게 많은데 병원에 못 오는 사람이 누가 있냐고 말하는 의사들도 있어요. 왕진가서 그런 환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의사로서 너무 다른 삶을 살게 되죠”

추 원장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왕진을 간다. 환자가 얼마나 가파른 오르막을 걸어야 하는지, 집 근처에서 싱싱한 식재료를 살 수 있는지, 집에 햇볕과 바람은 잘 들어오는지 확인한다. 가끔 손발톱만 깎거나 귀지만 파고 돌아오기도 한다. 진료실 안에서의 진료와는 또 다른 영역이다.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왕진수가시범제도 덕분에 병원과 환자 모두 왕진에 부담이 없어졌다.

왕진은 마을 공동체의 연결고리 역할도 한다. 추 원장이 수요일마다 병원을 비워도 주민들은 불편함보다 마치 ‘공공의 보험’처럼 진료실에 올 수 없는 환자를 위해 왕진가는 의사가 있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추 원장과 함께 왕진을 간 주민들은 고립된 환자와 보호자를 위로하거나 대신 약국에 다녀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의사가 아닌 주민들이 의료기관을 운영한다면?

의료협동조합은 주민들이 돈을 모아서 만든 의료기관이다. 보통 의사 개인이 은행 빚을 내서 개원하고 이자를 갚는 방식과 다르다. 살림조합은 은평 주민들이 50만 원, 100만 원씩 모아 3억 원으로 출발했다. 이익금은 없지만, 조합을 탈퇴할 때 출자금을 찾아갈 수 있다. 공동의 자본을 형성하고, 조합원들이 필요한 사업을 결정해 실행한다. 현재 조합원 3천200여 명으로 구성된 살림조합은 조합원들의 의사결정을 통해 살림의원을 시작으로 치과와 운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공공성을 가지지만,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세금으로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공공의료는 아니다. 추 원장은 민간 영역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코로나 이후 보건소는 진료 기능을 없애고 선별검사에 집중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린 민간 영역이라서 환자들을 끊을 수도, 끊어서도 안 돼요. 각자 역할이 있는 거죠. 공공 영역은 정부의 정책이나 정권에 따라 변하는 것도 많은데, 우리는 꼭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고 싶은 거죠.”

추 원장이 의료협동조합을 꿈꾼 건 2000년 의사 파업을 경험하면서다. 의사들은 의약분업 시행에 반대하며 첫 번째 총파업을 진행했다. 의약분업은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로 요약할 수 있다. 외래환자가 진료 직후 병원에서 처방 약을 받을 수 없도록 하자 의사들은 거세게 반대했다. 2월부터 10월까지 다섯 차례 파업을 벌였고, 의대생도 수업 거부로 동참했다. 의료 공백에 여론은 ‘밥그릇 싸움’이라며 싸늘했다.

“당시 의사 파업을 보면서 착잡했어요. 국민과 의사집단 사이 소통이 안 되고, 신뢰가 없다고 느껴졌어요. 전공의들이 내걸었던 구호 중 의미 있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밥그릇 싸움으로만 몰리는 상황들이 안타까웠어요. 그렇다고 시민들이 잘못했다는 것도 아니었어요. 서로 너무 몰라서 오해가 있었던 거죠”

따릉이 타고 왕진가는 추혜인 원장
따릉이 타고 왕진가는 추혜인 원장ⓒ추혜인

추 원장은 신뢰받는 주치의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접으려고도 했다. 환자를 만나는 임상의학과 대신 예방의학이나 직업환경의학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막상 병동 실습을 나가니 환자와 보호자를 만나는 일이 너무 재밌었다는 추 원장이다. 마침 한 선배에게 들었던 의료협동조합은 그를 사로잡았다. “주민들과 의사가 함께 만든 의료기관에 의사가 고용돼 일하면서 우리의 신념을 조직에 녹아내리는 방식이 좋았어요. 훨씬 민주적이고 여성주의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여성단체 ‘언니네트워크’에서 만났던 어라 활동가와 제일 처음 뜻을 모았다. 의료인과 페미니스트 10여 명이 모여서 1년여 준비모임을 가졌다. 의료협동조합을 쫓아다니며 실습도 하고, 의료협동조합이 잘 발달했다는 일본으로 연수도 다녀왔다. 그렇게 살림조합은 2012년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 주민들에게 의료협동조합을 설명하는 일이 제일 어려웠다고 추 원장은 회고했다. 언제든 떠날 사람으로 인식되는 비혼 여성들이 지역사회에 안착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무작정 친해지는 방법을 썼어요. 온갖 동네 축제와 행사에 나갔죠. 지역 신문 후원주점에 가서 설거지도 하고, 김장 행사에서 김치도 담갔어요. 은평구 풀뿌리 시민단체에서 소개도 많이 해주셨죠. 의료협동조합을 믿고 많은 분이 손잡아 주셨어요”

설립 당시 은평구청장은 축사에서 ‘페미니스트들이 은평구로 이사 와서 저는 행복한 구청장’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추 원장은 전했다. “은평구 페미니스트들이 다 울었다니까요 하하. ‘우릴 환영한대’, ‘우리가 언제 환영받아 봤냐’면서요. 반성폭력 운동이 한창이던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페미니스트는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로 취급받았어요. 직장이나 학교에서 성폭력을 들춰내고 조직을 깬다는 인식이었죠”

“환자가 치료받을수록 의사가 돈 버는 제도
국민-의사집단 신뢰 무너뜨린다”

추 원장은 국민과 의사집단 사이 신뢰를 회복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그는 최근 의사 파업을 지켜보며 2000년대 파업처럼 착잡했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의사 개인을 좋아하면서도 의사집단에 대한 신뢰는 없는 것 같아요. 저를 좋아하는 분들도 의사집단을 욕하기도 해요”

대한의사협회 소속 의사들이 4일 서울 여의대로에서 의과대학 정원 확대에 반발하며 총파업 궐기대회를 열고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0.08.14
대한의사협회 소속 의사들이 4일 서울 여의대로에서 의과대학 정원 확대에 반발하며 총파업 궐기대회를 열고 손피켓을 들고 있다. 2020.08.14ⓒ정의철 기자

행위별수가제는 환자-의사의 신뢰 관계를 무너뜨리는 원인이라고 추 원장은 지적했다. 환자가 검사와 치료를 많이 받을수록 의사가 돈을 버는 제도에서, 환자는 의사가 돈을 벌려고 검사하자는 건 아닌지 매번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편 의사는 개원하면서 은행에서 빌린 4~5억 원에 대한 이자를 병원 운영에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공적 역할을 담당할 일차의료를 의사 개인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시스템도 문제로 지목됐다.

환자가 이 병원, 저 병원을 마치 쇼핑하는 것처럼 찾아다니는 이른바 ‘닥터 쇼핑’은 불신에서 비롯됐다. 의료비와 건강보험료 낭비뿐 아니라 환자의 진료기록이 흩어져 적절한 진단이 늦는 문제가 발생한다. 충분한 상담 없이 약을 처방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또다시 상호 간의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불신의 악순환이다.

추 원장은 행위별수가제뿐 아니라 묶음지불제, 건강증진 인센티브제, 인두제 등 다양한 방법을 혼합해 수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묶음지불제는 일차의료 주치의들이 주민들의 건강을 잘 관리하여 불필요한 입원이나 응급실 방문이 줄어들면 그만큼을 인센티브로 보상받는 방식으로 제도가 설계되어 있어요. 좀 더 예방과 건강증진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대안으로 생각해볼 만해요”

추 원장은 의미 있는 수가 제도로 프랑스식 진찰료 수가를 꼽으며 “당장 도입이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충분한 상담이 가능하도록 진료 시간에 따라 수가를 다르게 정하는 방식인데, 10분 단위로 상담료를 다르게 책정하는 우리나라 정신건강의학과와 비슷하다. “프랑스는 환자도 동의할만한 수준에서 어려운 진료라고 판단하면 진료비를 많이 받아요. 이런 방식이면 환자가 동의하지 않고선 비싼 수가를 매길 수 없어요. 대신에 필요한 사람은 길게 진료받을 수 있죠”

왕진을 나가 환자를 치료하는 추혜인 원장
왕진을 나가 환자를 치료하는 추혜인 원장ⓒ추혜인

“단순 의사 증원 중요하지 않아”
“지역 주치의가 필요하다”

추 원장은 무엇보다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주치의제도가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치의제도는 지역사회 주민인 개인 또는 가족이 일차의료 의사와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보험자 또는 국가가 지원하는 제도다.

“주치의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주치의를 할 의사가 많아야 한다는 거예요. 주치의는 가정의학과, 내과, 소아과 등 통합적으로 진료하는 과가 중심이 돼야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엔 특정 신체 부위만 진료하는 전문과의 전문의가 너무 많아요. 전문의들은 지역사회 일차의료기관에서 커버하기 힘든 환자를 봐줘야 해요”

WHO에서 중요성을 강조한 일차의료는 전문의가 개원해 1차 진료를 담당하는 의원이 아니라 포괄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치의 의원이 중심이다. 전문의를 줄이려면 전공의를 줄여야 한다. 하지만 서로 학과 인원을 줄이려고 하지 않는 등 대학병원 권력과 연관돼 쉽지 않은 문제다. 의대 교육과정도 다 바뀌어야 한다.

이번 의사 파업의 원인이 된 ‘의사 증원’ 정책에 대해 추 원장은 “정부가 정확히 어떤 의사를 만들고 싶다는 정확한 계획을 보여주지 않았다”라고 질타했다. 정부는 공공 의대를 신설해서 공공의료 의사를 10년간 4천여 명 육성하겠다는 정책을 밝혔다가 의사집단의 반발로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지역에서 주치의로 활동할 의사가 부족한데, ‘어떤 의사’를 양성할지에 대해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했어요. 지역 의사가 필요하다면, 실제 지역에서 주치의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하는데, 그런 의사는 정말 모자란 것이 맞습니다”

제2차 전국의사 총파업이 시작된 26일 오후 대구 남구 대명동 영남대학교병원 본관 앞에서 한 의대생이 대책 없는 공공의대 증설 및 의과대학 정원 확대에 반대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1인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제2차 전국의사 총파업이 시작된 26일 오후 대구 남구 대명동 영남대학교병원 본관 앞에서 한 의대생이 대책 없는 공공의대 증설 및 의과대학 정원 확대에 반대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1인시위에 참여하고 있다.ⓒnews1

가족 주치의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쿠바에서 추 원장은 ‘지역사회 중심의 의사 수련방식’을 배워야 한다고 짚었다. “쿠바처럼 가자는 게 아닙니다. 쿠바로부터 배울 걸 배우자는 거죠. 쿠바는 6년 의대 과정에서 매 학년 동네 의원(콘술토리오)으로 실습을 나와요. 지역 주치의들은 학생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죠. 주치의를 키우려면 동네 의원에서 수련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우리나라는 의사 교육을 대학병원에만 맡겨뒀어요. 의대생들은 대학병원에서 중증 질환자를 치료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며 성장할 수밖에 없죠. 반면 지역 주치의는 가치가 없고 못난 것으로 여기죠. 첨단중심의 의료만이 최선은 아니에요. 고령자들이 집에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것도 훌륭한 의료에요. 이것도 중증 질환자를 수술하는 만큼 배워야 할 수 있는 일이죠”

“살림조합 때문에 은평구로 이사왔어요”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이 된 살림조합

“살림조합 때문에 은평구로 이사 왔어요” 추 원장은 이런 말을 들을 때 자랑스럽다고 속삭였다. 살림조합은 지역 커뮤니티의 중심이다. “의료기관만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커뮤니티가 활성화됐을까 싶어요. 조합원들끼리 등산도 가고, 기타도 치고, 스페인어도 배우는 등 취미 모임을 많이 해요. 소속감이 생기니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우리나라에서 이사하는 이유가 직장이나 아이들 교육, 부동산 가격 때문일 수 있지만, 지역 커뮤니티 때문에 이사 오고 싶은 경우는 드물잖아요. 은평구에 지역성이 생겨나고 있어요”

살림조합은 비혼 페미니스트 커뮤니티기도 하다. 가족이 없어도 서로 돌봐주고 돌봄 받으며 페미니스트로 살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이 모였다. “이 공동체가 제겐 노후보험이에요. 이곳에서 나이 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우리만 따로 살 수는 없으니 공동체로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해요. 비혼 페미니스트만의 모임이 아니라, 우리가 주축이 되는 마을 공동체를 만들 수 있어요. 실제로 주민들은 우리 동네에 페미니스트들이 많이 살아서 좋다고 해요”

거리 축제에서 건강 체크하는 추혜인 원장
거리 축제에서 건강 체크하는 추혜인 원장ⓒ추혜인

추 원장은 살림조합의 건물을 마련하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임대료 부담도 있고, 실제 하고 싶은 활동들이 공간의 제약 때문에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공동의 자산을 갖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실제 친구가 살아야 지역 공동체라고 느끼는 것처럼, 공동의 자산이 있어야 우리가 지역으로 형성되고 있는 기분이 들잖아요. 의료협동조합원이 활성화돼 있는 일본의 경우, 한 조합당 조합원이 10만 명씩 돼요. 그만큼 우리도 성장할 수 있다고 봐요. 조합원들과 함께 건물을 살 거예요”

“나의 진료가 마음에 들었다면, 그것은 내가 페미니스트 주치의이기 때문입니다” 추 원장의 말에 신뢰가 가는 것은 환자의 고통에 ‘공명’해왔던 태도 덕분이다. 같이 울리면 더 큰 소리의 파장이 만들어지는 공명처럼 협동과 공감의 가치로 의료인의 삶을 살아온 추 원장의 이야기는 책과 유튜브를 통해 더 자세히 만날 수 있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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