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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노동이야기] 노동자의 생명·안전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묻는다

“야, 이 새끼야 ”

늦은 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들려온 아버지의 외침에 내가 도둑이 된 줄 알았다. 슬그머니 방문을 열어보니 아버지는 미동도 없이 주무시고 계셨다. 잠꼬대였다. 십 여 년째 수면제를 복용하고 계시는 아버지는 복용 초기에 종종 험한 말로 잠꼬대를 하시곤 하셨다. 본인이 일터에서 듣던 말들이었다.

아버지는 사장의 집요한 관리 감독과 폭언을 힘들어 하다 사직하셨다. 사직 전, 아버지는 직접 회장과 사장에게 이야기를 해 봤지만 변화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폭언의 강도만 점점 심해졌다고 한다. 사장은 아버지 뿐 아니라, 대부분의 노동자를 감시하듯 따라다녔고 폭언을 했다. 이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버지의 동료 다수가 불면, 불안 등의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노동자들은 아버지와 함께 일터를 떠날 수 없었다.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지만 생계를 위해 지옥과 같은 현장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다. 당시에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사연을 현재 한국 사회의 노동 인권 인식 수준에 대입해 보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산업재해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없음
ⓒ국회 국민동의청원

지난 22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안전한 일터와 사회를 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10만명의 시민이 동의해, 법안 발의 성립 요건이 충족됐다. 이에 따라 해당 법안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에 정식 안건으로 상정됐다.

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어야 하는지는 매년 2,400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는 현실 그 자체가 답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는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기업과 기업대표자, 그리고 공무원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았을 때 처벌토록 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처벌을 강화해 예방적 효과를 높이겠다는 의도도 있지만, 핵심적인 취지는 그간 사법기관 재량에 속했던 ‘원청과 최고책임자의 책임을 묻는 일’을 법제화한다는 데 있다. 관련자들의 처벌이 중요한 이유는, 산재 사고가 누구의 책임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중대재해 피해자와 그 동료들이 이후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산재 사고의 상처는 몸에만 남는 것이 아니다. 당사자와 주위 사람의 마음에도 상처를 남긴다. 중대재해 피해자나 그 가족들이 다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절한 몸과 마음의 치료가 필요하다. 마음을 치료하는 일에는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을 때 생기는 위안도 포함된다.

사실 중대재해급 사고로 사망이나 큰 부상을 당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노동자들은 종종 다치고 상처를 받는다. 이런 노동자들에게도 ‘지금의 상황은 당신 탓이 아니고,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 기업에 책임이 있다’고 밝혀주는 것이 큰 위안이 된다. 과거 이주노동자들과 상담을 할 때, 체불사건이 해결되고 나면 한결 밝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권익 구제와 심리적 안정이 얼마나 잘 이어져 있는지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회원들이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민동의청원 10만의 요구, 이제 국회가 답할 때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촉구를 위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09.28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회원들이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국민동의청원 10만의 요구, 이제 국회가 답할 때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입법 촉구를 위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0.09.28ⓒ김철수 기자

과거 본인들이 당한 일에 대해 이름조차 붙일 수 없었던 내 아버지와 동료들에게, 누군가 ‘일터에서 사장이 도를 넘게 노동자를 감시하는 것은 괴롭힘이고 불법’이라고 말해줄 수 있었다면 그들의 불면의 밤이 조금은 줄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사망사고나 큰 사고를 일으킨 기업의 처벌만이 아니라, 노동자 건강 문제 전반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다루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은 우리 사회가 노동자의 건강과 생명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지 법으로 명문화하는 과정이다. 과거 사업주가 산재를 예방하도록 하기 위해, 무재해 사업장에 인센티브를 줬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산재를 은폐하거나 위험한 작업을 외주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을 바꾸려면 노동자의 안전을 도모하고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기업과 기업 책임자의 당연한 의무로 인식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 출발점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국회와 정부는 1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참여해 발의한 이 법을 법이 정한 기일에 맞추어 심사하고 논의해야 한다. 21대 국회가 시민의 요구에 응답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이란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

성지민 부산 노동권익센터 노동안전실장·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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