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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환의 역사로 생각하기] 민주주의가 민심을 반영하지 않을 때
없음

경제의 고난이 일반으로 심각해지는 가운데 사환계급에는 벼슬자리의 다툼이 염치를 무릅쓰고 행하니 이것이 종래의 당론을 빙자하야 그 전에 보지 못하는 가열한 싸움을 일으켰다... 1683년에 이르러 송시열과 박세채, 윤증의 사이에 의견의 충돌이 생겨 드디어 서인이 분열하여... 서인인 노소론의 대립으로 생기는 것이오.

최남선이 쓴 ‘국민조선역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최남선은 조선 후기 양반관료 간의 갈등을 ‘벼슬자리 다툼’이라고 규정하였다. 두 차례 전란 이 후 사회경제상황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사환계급(양반관료 계급)이 자신들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염치를 무릅쓰고’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효종, 현종, 숙종 시기를 우리는 어떻게 배울까. 효종 때는 북벌론을 주창하며 청나라를 응징하고자 했고, 현종 때는 예송논쟁을 통해 당파간의 갈등이 심각해졌고 비로소 숙종 때 환국을 통해 인위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면서 붕당 정치가 극단으로 흘러갔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따져보면 지극히 이념적거나 정치적인 분석이다. 조금 더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면 왕과 사대부의 입장만 고려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배층이 공허한 논쟁을 벌일 때
세상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물들다

현실은 어땠을까. 청나라에 끌려갔던 효종은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그는 억지로 군사력을 확충하려했고 이와 중에 추노꾼을 대거 동원, 도망노비를 잡아오려 하였다. 당시 신공(일종의 노비세)을 내야하는 노비가 19만여명이었는데 실질적으로 2만7천명정도가 세금을 내고 있었으니 이들을 소환하면 국가 재정에 큰 보탬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는 대실패. 전란 이후 행정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런 식의 행정 조치가 민심이반을 불러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저항했고 노비추쇄는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국왕의 복수심은 몽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현종 때 두 차례 벌어진 예송논쟁은 조선 후기 정치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효종과 효종비의 죽음을 두고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나의 문제였지만 성리학 예교의식의 정교한 발달, 김장생·김집 같은 수준 높은 예법 학자의 등장이 사건의 본질이었기 때문이다. 예송논쟁의 결과 서인과 남인은 정권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단단히 만든다. 좋게 말하면 붕당정치, 나쁘게 말하면 파벌정치가 본격화된 것이다.

그런데 당시 백성들이 마주했던 현실은 어땠을까.

떠돌며 빌어먹는 백성들이 아이를 버리는 경우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옷자락을 잡고 따라가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두고 가기도 하며, 부모 형제가 눈앞에서 죽어도 슬퍼할 줄 모르고 묻어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리가 끊어진 것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1670년부터 다음해까지 진행된, 현종 11년~12년 경신대기근과 관련된 기록이다. 5월이 돼도 비가 내리지 않다 가뭄이 간신히 끝나니 장마가 시작되었다. 7월부터 10월까지 폭풍우가 전국을 휩쓸었다. 같은 시기 황충이 들끓었고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현종의 다섯째 누이인 숙경공주가 죽었다. 활인서에는 당시 도성인구 10%가 넘는 사람들이 활인서에 앓아 누었고 교통과 통신망이 무너졌다. 이 기간 동안 우역으로 죽은 소는 4만두가 넘었다. 200만냥이 넘는 액수인데 재무를 담당하던 호조의 2년치 수입, 한반도 전체에서 1년간 벼농사를 지어서 내는 수익이 단숨에 날아간 것이다.

경신대기근
경신대기근ⓒEBS 역사채널e 캡처

경신대기근은 조선 후기 숙종 때 을병대기근(1695~1696년)과 더불어 가장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실상 더욱 무서웠던 것은 기근과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1663년부터 1665년(현종 4~6년)까지 실록을 살펴보면 우역으로 폐사한 소는 7천716두, 다시 1668년부터 1671년(현종 9~12년) 사이 함경도에서만 폐사한 소는 2만두를 넘는다. 병자호란을 통해 만주 일대의 우역이 조선에 퍼졌고 그로 인한 전염병이 만연했던 것이다. 더구나 숭정(崇禎)대기근(1640~1642), 관영(寬永)대기근(1641~1643), 정보(廷寶)대기근(1647~1677), 원록(元禄)대기근(1695~1696) 등 기근과 전염병의 문제는 조선을 포함한 청나라 에도막부가 동시에 경험하던 동북아시아의 보편적 위기이기도 했다.

이 와중에 기억할만한 의미 있는 조치는 무엇이 있었을까. 청나라에서부터 쌀을 수입해오자는 논의가 현종 때는 양반관료들에 의해 노골적으로 거부되다 숙종 때 비로소 관철되었다는 정도? 쌀이 부족해도 수입하지 말자고 했던 양반관료들의 속셈은 표면적으로는 병자호란의 원한을 기억하자는 것이었고 이면에는 자신들은 살만했기 때문이리라.

구체적인 개혁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짓밟은
로마의 귀족들

기원전 133년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토지 보유의 상한선을 시민 한 명당 300에이커, 자녀 한 명당 150에이커씩 추가하는 형태로 설정하고 나머지 토지를 빈민에게 나누어주는 법안을 발의하고자 하였다. 귀족들은 격렬히 반발하였고,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지지자들을 무참하게 때려죽였다. 하지만 10년이 못되어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더욱 집요한 개혁을 시도한다. 테베레 강가에 공영 곡물창고를 만들어서 곡물가를 안정시키고, 지방 총독들의 권한을 강화하여 귀족들의 탈법 행위를 단속하였다. 또한 평민들에게 보다 강력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개혁에 저항하였고 결국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3천명이 넘는 광범위한 추종자들을 살해하는 만행을 벌였다. 명분은? 공화정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사를 복기하건 로마의 역사를 복기하건 분명한 것은 정치가 민생을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민본주의를 표방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도, 공화정이 충분히 성숙하여 제도적으로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공간에서도 일반 민중의 삶과 완벽하게 유리된 기만적인 정치 현실은 언제나 가능했다.

작금의 한국정치는 어떠한가. 추미애 장관을 둘러싼 격렬한 정쟁이, 북한의 사과 문제를 둘러싼 격렬한 다툼이 목표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혹은 국경일 같은 특별한 날에 무언가를 기념하며 온갖 공허한 말을 늘어놓는 것 역시 일상과는 무관한 감동일 뿐. 비정상적인 세력이 집권하여 나라를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충분히 사회는, 국민은 신음할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 하물며 왕조사회에서도 민심이반을 우려했다면 국민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요구해야 할까.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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