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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부족한 것은 관심 뿐인 음반

작심하고 만들었을 음반이다. 싱어송라이터 김제형의 신보 [사치]는 그런 음반이다. 근거를 묻는다면 가사를 읽어보라고 답하겠다. 10곡의 노래는 모두 한 편의 단편소설이며 단편영화다. 명징한 서사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서사 자체가 남다르다.

김제형의 [사치]에는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드물다. 김제형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며 형성하는 관계를 돌아보고, 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정리했다. 사람이 하는 일의 궤적을 모으고 반죽해 노래의 면발을 뽑아냈다. 음악은 음악마다의 급소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김제형의 [사치]는 노랫말이 급소다. 노랫말을 움직이거나 건드리면 노래 전체가 흔들린다.

김제형의 신보 '사치' 커버 이미지
김제형의 신보 '사치' 커버 이미지ⓒ사진 = 김제형

‘노래의 의미’는 노래하는 일의 의미를 기차와 철도원을 빗대 표현한다. “목적지가 없어도 서운하지 말라는 철도원”이라는 표현이나, “난 내 삶이 어디까지 왔는지/그게 참 궁금했는데/달리는 기차 안에서는/그런 것들이 문제가 안 됐지”라는 노랫말은 영원히 과정일 수밖에 없는 창작의 길을 간파했다. ‘실패담’은 실패한 이야기에 대한 태도를 노래함으로써 실패를 감당하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남겨진 감정’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우리”가 되어버린 관계를 감당해야 하는 마음을 냉정하게 받아 적었다.

제목부터 이채로운 ‘의심이 많아진 사람의 마음이 있었지’는 자신이 지닌 불행을 지우기 위해 한 사람에게 너무 냉혹해져버린 사람을 포착함으로써 관계의 이면에 다가선다. ‘넌 진실인 것처럼 굴었지’도 제목이 흥미롭기는 마찬가지. 이 곡은 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다른 반응을 적시함으로써 사람의 차이와 관계의 어려움을 논한다. ‘인정투쟁’ 역시 밀어내거나 당기면서 형성되는 관계와 인정욕구에 대한 성찰을 이어간다. “누굴 밟고 올라가고 싶었지/사실 네 얼굴을 밟고 있는 줄 모르고/사람들의 웃음 띤 얼굴 위에/모든 발자국이 피어 있었지”라는 노랫말은 관계에 대한 증언의 신랄함으로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일과 자신과 나’에서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일로부터 소외당해 “이 도시 위를 유령처럼 배회”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농담에게’는 농담을 수용하고 유행시키는 문화를 언급하는 방식으로 세계의 비정함을 폭로한다. 현실을 기록하는 역할로서 노래의 몫을 다하는 곡이다. 그리고 ‘아엠 새드’는 불안과 슬픔을 떨칠 수 없는 삶의 가련함을 노래했다. ‘편애하는 사람’도 관계에 대한 기록이다.

김제형의 노래들은 대개 노래들이 잘 하지 않는 이야기, 그러나 누구든 언제든 느끼고 공감하는 이야기, 그래서 많은 예술작품에서 꾸준히 반복하는 이야기, 최근의 예술작품에서 지분을 넓혀가는 이야기를 사로잡았다. 음악은 노랫말의 모음이 아니지만 음악 역시 이야기의 덩어리이고 이야기를 거는 방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김제형의 노래들은 이야기의 소재와 표현의 깊이라는 측면에서 개성과 완성도를 모두 갖추었다.

예술은 자신이 경험했던 일의 의미와 파장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일의 의미와 파장을 마주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경험했다고 다 아는 게 아니고, 경험하지 못했던 일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명명백백하게 안다고 생각했던 일에도 빈 틈이 있고, 우리는 몰랐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싱어송라이터 김제형
싱어송라이터 김제형ⓒ사진 = 김제형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빼어난 김제형의 노래들은 김목인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긴 노랫말을 재치 있게 담아내는데, 여러 장르의 어법으로 노래를 포장해 내놓으며 다른 길을 간다. 빅밴드 재즈 스타일의 연주를 활용하는 곡들이 상대적으로 많지만, 신스 팝이나 일렉트로닉 팝을 운용하기도 하고 복고적인 팝에도 도전한다.

노래의 맛은 산문으로 읽어야 하는 노랫말을 노래로 바꿔버리는 멜로디의 양념에서 나온다. 이 음반에는 긴 문장에 간명한 멜로디가 붙으면서 부드럽게 흥얼거리게 되는 순간들이 무수히 많다. 흥얼거리게 될 뿐 아니라 특정한 감정에 휘말리게 될 때 누가 김제형의 능력을 부정할 수 있을까. 우수 어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실패담’의 멜로디가 바로 그 증거다.

하지만 김제형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는다. ‘노래의 의미’를 비롯한 곡들 대부분은 좋은 노랫말과 좋은 멜로디 위에 장르의 스타일을 충족시키는 연주를 끼얹는다. 빅밴드 재즈 스타일의 곡에 감도는 스윙감과 신스팝 스타일을 완성하는 미디 연주의 맛은 김제형의 노래를 음악으로 손색없이 완성한다. ‘인정투쟁’처럼 복고적인 질감을 삽입한 곡을 넣거나 다른 사운드 연출을 감행한 곡들을 이어가며, 김제형의 음반은 곡 사이의 낙차를 만들어 다채로워지기까지 한다. 이 음반을 작심하고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다른 이유이다.

이야기와 멜로디, 사운드와 장르 가운데 어떤 것도 소흘하지 않은 음반이다. 들으면서 재미있고, 듣고 나서 곱씹게 되는 노래에 부족한 것은 없다. 부족한 것은 아직 충분하지 않은 관심뿐이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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