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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기억과 공간] 시월 가을을 만끽하려면 ‘윤슬’로

‘갬성’ 충만한 시월(10월)입니다. 만월의 추석, 맑고 높은 하늘, 벼가 익어가는 황금빛 들녘, 남녘으로 번져가는 단풍. 배 띄워 물놀이하기엔 이만한 계절이 또 있을까 싶은 때입니다. 서울 덕수궁 돌담길에도 가을이 와 정동1928 아트센터까지 ‘10월 정동’은 연인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요새같은 때엔 시를 좋아하는 누구는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던 기형도의 시 ‘시월’을 떠올릴 것입니다. 기형도의 ‘시월’은 젊은 시절 암울했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게 하는 시입니다. 그렇지만 이 계절엔 그 기억을 탈탈 털어 습한 기운도 먼지도 날려버리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시월 가을엔 이용의 노래 ‘잊혀진 계절’이 떠오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요새 부쩍 자주 맴도는 입안의 가사를 적어봅니다.

지나간 것들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 아직도 꺼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미련, 이런 것들이 뒤범벅 되는 때가 바로 이즈음 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감성 충만’ 가을은 낭만을 되살려 우리의 마음을 정처 없이 떠돌게 합니다. 이런 날 찾아가 볼만한 서울 도심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소개합니다.

서울로7017, 공사 이전(위)과 후(아래)
서울로7017, 공사 이전(위)과 후(아래)ⓒ사진 = 서울시

2017년 5월 20일, ‘서울로7017’ 보행로가 개장했습니다. 1970년 교통난이 심해져 만들어진 이후 점차 흉물이 되어가던 서울역 고가도로를, 서울시가 철거하는 대신 보행길로 되살렸습니다. 1970년에 지어진 고가도로가 2017년 보행로로 재탄생한 것을 기념해 ‘7017’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서울역에서 올라서면 아래로 딱 달라붙은 기찻길이 동서를 나누고, 그 옆으로 부지런히 달리는 차량들이 보입니다. 더 없이 높아진 하늘 위로 느릿하게 흐르는 구름도 한층 가까워 집니다. 그렇지만 이 풍경은 예전 그 시절의 것은 아니겠죠?

1925년 만들어진 경성역과 철길은 인근 회현동과 중림동, 청파동 일대를 나눴습니다. 안산 무악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중림동 약현고개 아래를 돌아 염천교를 지나 지금의 서울로7017 아래로 흘렀을 겁니다. 배다리가 있던 청파와 남영을 거쳐 한강과 만났을 것입니다. 당시 덩쿨이 무성한 풀이 많아 ‘덩쿨내’로 불렸는다는데, 지금 ‘만초천(蔓草川)’이라고 남은 것은 유식한 양반들의 기록 탓이겠지요. 덩굴내는 1967년 복개가 시작돼 이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도시화가 집어삼킨 것이 이뿐이겠습니까만은, 사라진 물줄기를 끼고 옛 아낙네가 힘껏 빨랫방망이를 내려쳤을 빨래터의 모습은 이제 지면에서나 혹은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는 오래 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빨래터 아낙들 머리 위로 떠올랐을 달, 그 춤추는 달그림자가 떠내려갔던 물줄기는 이제 먼 과거의 유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시꺼먼 포장로, 그 위로 바퀴달린 열기 덩어리가 흐르고 부산한 마음도 같이 떠내려갑니다.

윤슬:서울을 비추는 만리동
윤슬:서울을 비추는 만리동ⓒ사진 = 김명식

다시 고개를 들어, 학자 최만리가 살았다해서 만리재로 불렸다던 만리동으로 시선을 옮깁니다. ‘서울로7017’ 아래 움푹 팬 원형의 땅에 거울 같은 보가 일정하게 놓여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건축물의 이름은 ‘윤슬:서울을 비추는 만리동’ 입니다. 만리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서울로7017 끝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2016년 ‘서울역 7017과 연계한 만리동 공원 공공미술 작품설치 지명공모’에서 당선된 건축가 강예린·이재원·이치훈(SoA:Society of Architecture)의 작품입니다.

윤슬은 지름 25m, 깊이 4m의 움푹 들어간 공간입니다. 아래는 투수성 콘크리트로 되어 있고, 위에는 스테인리스 스틸(슈퍼 미러) 루버를 놓아 그 특별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선으로 이뤄진 선형의 길에서 면으로 이뤄진 둥근 공간으로 이어져서가 아니라, 선형의 움직임을 강요하는 보행로에서 마침을 추동해 머물기를 끌어내는 공간이 되었기에 더 특별한 것입니다.

윤슬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위), 윤슬 내부에서 입구 방향(아래)
윤슬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위), 윤슬 내부에서 입구 방향(아래)ⓒ사진 = 김명식

2,800개 육면체의 내림 층계가 만들어낸 둥근 공간, 그 위를 가로지르는 스테인리스 스틸 루버가 지면 아래와 위가 아른거리게 보이도록 빛을 산란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가면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윤슬’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산란된 빛이 만들어내는 잔물결이 참 아름답습니다.

빛결이 가득 담긴 웅덩이는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도심에서 조용히 침잠하는 공간입니다. 시간은 이제 내 것이 됩니다. 우물물에 비치는 잔물결처럼 빛으로 충만한 공간은 수면 위 물결의 공간이 되고, 이내 아늑한 옛날의 공간으로 시간을 되돌립니다. 덩쿨내가 흐르고 그 위로 달이 떠오를 것만 같습니다. 긴 공중 길을 지하로 수렴한 빛의 우물 ‘윤슬’이 엄청난 규모의 예산과 노력을 투입한 ‘서울로7017’을 압도하는 느낌입니다.

윤슬 내부(위), 윤슬 안에 앉아 사진 자세 잡는 사람들(아래)
윤슬 내부(위), 윤슬 안에 앉아 사진 자세 잡는 사람들(아래)ⓒ사진 = 김명식

기억을 세공하는 보존, 복원, 재생 등의 작업은 창작보다 성가시고 손이 많이 갑니다. 그런 만큼 까다로우면서도 중요한 작업입니다. 낡은 것에 속박된 기억을 아름다움으로 해방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도시에 대한 경험의 지평은 더 확장되고 넓어질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때때로 이를 망치는 것은 서울로7017 곳곳에서, 도시 곳곳에서 보이듯이, 아름답지 않은 것들에 대한 우리의 관대함 때문입니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의 형태는 관찰자의 시선에서 중요한 것은 물론, 아름다움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윤슬은 참 괜찮은 공간이고 착한 공간이며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윤슬이 아늑한 옛날의 흐릿하고 아른거리는 이미지, 추억 속 과거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감성 충만한 공간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밤의 윤슬 내부(위), 윤슬 루버 아래 조명과 육면체의 층계(아래)
밤의 윤슬 내부(위), 윤슬 루버 아래 조명과 육면체의 층계(아래)ⓒ사진 = 김명식

이곳의 밤은 낮과 또 다른 이미지와 분위기를 방출합니다. 윤슬은 우물에 뜬 달빛 같기도 하고 흐르는 냇가 물결 위에 찰랑이는 달빛 같기도 합니다. 루버에 설치된 조명은 바닥을 비추고 공간 전체로 퍼져 은은한 불빛을 통해 아늑한 공간감을 더합니다. 따뜻한 빛이 아늑한 느낌을 주며 또 다른 회상의 시간을 불러옵니다.

이 분위기가 우리를 데리고 갈 행선지가 궁금해지지 않으신가요. 가을 밤 윤슬을 찾으시면 잔잔한 낭만에 취해 맑게 반짝이는 잔물결 아래에서 미련과 기억과 추억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을빛으로 넘실거리는 윤슬의 경험이 지금 당신을 기다립니다.

김명식 건축가·건축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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