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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노동이야기] 왜 사업주는 산재 신청을 싫어할까

올해 처음으로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판정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돼, 종종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이전에 공부나 연구 목적으로 승인 또는 불승인 판정 사례들을 살펴볼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심의 자료를 미리 검토하고 판정위원회에 직접 참석해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과거보다 구체적 판정 기준이 공개되어 있는데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날 판정위원회 재해자 진술에 사업주가 재해자와 같이 참석하는 일이 있었다. 아직 판정위원회 경험이 많지 않은 나는 그 일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잘 몰랐다. 하지만 회의를 주관하는 위원장께서 그 사업주에게 ‘어떻게 나오시게 됐는지’ 질문하는 것을 들으며 흔치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거에 작업 현장에서 사고가 나자 기록이 남지 않도록 119를 부르지 않고 다른 차량으로 노동자를 병원으로 이송한 사례, 사고가 났는데 회사 자체 조치를 시도하다 의료기관 이송이 늦어져 더 심각한 상황이 된 사례 등을 듣고 화가 났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위원장에게서 그런 질문이 나올 법했다.

이날 사업주가 한 발언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OO씨는 저희 회사의 소중한 직원입니다. 잘 치료 받고 재활해서 회사에 조속히 복귀했으면 좋겠습니다. 꼭 산재로 인정 받았으면 합니다.”

그는 해당 노동자의 업무에 대한 부가 설명과 함께, 업계에서 실력있는 인재를 찾기 힘들다는 말도 덧붙였다.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그런 상황이 조금 낯설면서도 훈훈하게 느껴졌다.

여수산단 대림산업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작업하던 노동자 6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고 다음날인 15일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대림산업 본사 앞에서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림산업 책임자 처벌'과 '산재사망 처벌강화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2013.03.15 (자료사진)
여수산단 대림산업 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해 작업하던 노동자 6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고 다음날인 15일 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한 대림산업 본사 앞에서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이 기자회견을 열고 '대림산업 책임자 처벌'과 '산재사망 처벌강화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2013.03.15 (자료사진)ⓒ김철수 기자

판정위원으로 위촉되기 전 산업재해(산재) 사례들을 살펴보았을 때, 재해 노동자와 사업주 간의 입장 차가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근무 시간이나 업무 조건 등의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경우, 같은 사안에 대한 사실 관계를 어떻게 이 정도로 다르게 알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인지하고 있는 사실 자체나 해석이 다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한 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 많지 않지만 그간 심의한 안건 자료만 봐도,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는 회사 측 입장이 드러나는 사례가 꽤 있었다. 대놓고 반대 입장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최소한 반기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노동자가 진술한 산재 경위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사업주는 왜 많지 않을까. 우리 직원의 병을 산재 인정해달라는 사업주를 만나기는 왜 힘든가.

사실 사업주와 재해 노동자 간 입장 차 때문에 직접적으로 돈이 드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입장차를 무릅쓰고 산재 요양 신청 절차를 진행하는 재해 노동자는 그만큼 더 무겁게 마음의 부담을 질 수 밖에 없다. 아마 신청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도 꽤나 많을 것이다. 심지어 여러가지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신청 자체를 방해하거나 회유하는 사업주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접할 때면 ‘그럴 돈과 에너지로 평소 산재 예방에 힘썼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효과적인 산재 예방 정책이 마련되고 그 정책에 따른 규정을 각 사업장에서 충실하게 실행한다고 해도 산업재해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예방접종이 발병 위험을 낮춰주는 것이지, 예방접종을 맞았다고 해서 그 병에 절대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정책과 규정을 벗어나는 변수가 있을 수 있고 모든 노동자의 몸이 다 똑같지 않으니 산재는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예방 조치가 충분하지 않다보니, 사업주들이 산재 발생과 이후 과정에 대한 부담감을 갖는다. 또 산재 신청과 승인을 원하지 않고 산재를 은폐하려는 시도도 여전한 것 같다. 사업주들이 산재 승인과 신청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하기보다는, 또 다른 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좋은 학습의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더불어 지금보다 산재 예방 정책이 강화되고 모든 사업장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게 된다면, 산재 인정을 둘러싼 노동자와 사업주의 입장차 및 그로 인한 불필요한 긴장과 부담도 줄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리되면 ‘우리 직원 산재 맞으니 꼭 인정해달라’는 사업주를 더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김세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직업환경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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