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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노동이야기] 야금야금 빼앗기고 있는 노동자의 근로조건 결정권

이주노동자 상담원들에게 연차휴가와 연차수당에 대한 교육을 할 때였다. ‘연차휴가 대체합의제도’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다. 분명히 연차휴가를 쓴 적이 없어 연차수당을 청구하기 위해 노동청에 진정을 했더니, 근로감독관이 연차휴가 대체합의가 되었다며 받을 연차수당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와 근로자대표가 특정 근로일을 연차로 대체하는 것으로 서면합의한 경우, 그 효력을 인정한다. 그런데 노동자들 중엔 본인이 일하는 회사에 근로자대표가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주노동자들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종이 한 장이 돈다. 서명을 하라고 한다. 그래서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다들 하니 따라서 서명을 했는데, 알고 보니 아무개를 근로자대표로 한다는 연명 동의서였던 것이다.

근로기준법, 산업안전보건법 등 노동관계법에서 근로자대표가 가지고 있는 권한은 매우 많다. 그런데도 현장에서는 사용자가 주먹구구식으로 근로자대표를 선정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래서였는지 지난 16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는 ‘취약근로자 이익보호와 사업장 내 민주적・안정적 노사관계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이라며, 근로자대표의 직접・비밀・무기명 투표 선출을 골자로 하는 ‘근로자대표제도 개선에 관한 노사정 합의문’을 전원일치로 의결했다.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과 김인재 노사관계제도 관행개선위원장 등이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열린 근로자대표제도 개선에 관한 노사정 합의 관련 브리핑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2020.10.16.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과 김인재 노사관계제도 관행개선위원장 등이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열린 근로자대표제도 개선에 관한 노사정 합의 관련 브리핑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2020.10.16.ⓒ뉴스1

합의문 개선방안에는 노사협의회 위원들에게 근로자대표 권한을 주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크게 2가지를 전제로 한다. 첫째, 현장에서 직접・비밀・무기명 투표가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선출된 근로자대표라면, 그(혹은 그들)가 노동자 각 개인의 근로조건 결정권을 가져가는 것이 취약근로자 이익보호 등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개선방안을 보고 드는 의문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선거관리위원회조차 구성되기 힘든 현장에서 직접・비밀・무기명 투표가 제대로 진행될까? 현재 노사협의회 설치 의무 대상 사업장에서 직접・비밀・무기명 투표가 제대로 진행되어 왔던가? 현행법 상 근로자대표와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은 엄연히 다른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에게 근로자대표의 권한을 주는 것은 타당할까?

한 발 더 나아가 ‘근로자대표제’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의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근로자대표는 사업주에게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의결사항, 작업환경 측정사항 등을 통지할 것을 요청할 수도 있고, 안전보건진단 시 참여할 권리가 있다. 사업주가 안전보건개선계획을 수립할 때나 산재조사표를 제출할 때 의견을 낼 권리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근로자대표가 ‘활용’되는 것은 노동자들의 알 권리와 참여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휴일을 연차휴가로 대체할 때처럼 근로조건 후퇴에 ‘동의’ 할 때이다.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일이 개별적으로 동의를 받지 않고도, 취업규칙을 변경할 때처럼 집단적 동의절차를 구하지 않아도, 선출(?)된 근로자대표의 동의만 있으면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후퇴시킬 수 있다.

노동법이 개정될 때마다 변경합의의 주체로 근로자대표가 등장하는 것은, 근로자대표가 노동자들의 권리를 옹호할 사람이라기보다, 사용자가 가장 합의하기 쉬운 대상이기 때문일 거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유선경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공인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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