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여성이 만난 하나님] 옆으로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2015 년 7 월 6 일에 우주 관측 우주선의 NASA 과학 카메라로 4만5천km 떨어진 지구를 촬영한 사진
2015 년 7 월 6 일에 우주 관측 우주선의 NASA 과학 카메라로 4만5천km 떨어진 지구를 촬영한 사진ⓒNASA

이번에 미국에서 여성 최초로 부통령이 된 카멀라 해리스는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벽을 넘어, 통합과 평등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로서 소개되어 감동을 주었다. 또 트럼프 행정부가 기후온난화를 막기 위해 맺은 파리기후 협약(2015년)을 탈퇴한 상황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파리기후협약에 복귀할 거라는 소식도 기대된다. 핵개발과 지구온난화,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세계평화와 지구치유는 세계 모든 이들의 염원이요, 긴급과제다. 이는 인간의 삶이 생태적 환경과 수많은 관계의 양태 속에 시간과 재능, 그리고 에너지로 얽히고설킨 경험의 각축장이기 때문이다. 의식주(衣食住)를 위한 가사노동과 일상의 삶은 생태적 감수성과 분리될 수 없다.

필자는 지구치유와 생태계의 공존, 인류평화와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남성과 여성의 관계부터 ‘옆으로의 신학적 관점’으로 재정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인간됨을 이루는 남성과 여성은 위아래로 관계를 맺는 존재가 아니라, 옆으로 관계를 맺어야 할 동료이자 파트너이기에 그렇다.

하나님은 남녀(암수)의 연합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남녀가 합력해서 사랑으로 생명을 양육하도록 하셨다. 하지만 근대 산업혁명 이후, 남성들은 기계 문명에 따라 분업화와 위계적 구조에 길들었다. 반면에, 여성들은 대체로 일상의 삶에서 직관과 돌봄의 인격적이고 통합적인 가치를 유지하여 왔다(폴 투르니에). 또 여성이 몸으로 직접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면서 얻게 되는 생명의 신비에 대한 통찰과 생태적 감수성은 남성의 이해보다 훨씬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꿈꿨던 하나님 나라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는 나라이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됨도 상함도 없는 아름다운 동산이다(이사야 11장 6~9절). 그곳의 모습은 하나님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체를 구성한다는 생태 신학적 관점을 보여준다.

옆으로 연관 짓는 태도

나는 10년 동안 강아지와 함께 살고 있다. 강아지의 이름은 ‘몽실이’다. 강아지를 키우면서 비로소 보게 되는 것들과 듣게 되는 소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몽실이가 몸을 털고, 핥으며, 눈물을 흘리며, 꼬리를 흔들거나 하품을 하는 걸 보면서, 키우는 수고로움보다는 강아지와 감정을 주고받는 기쁨이 훨씬 크다.

강아지와 함께 살아가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며, 하나님의 따뜻한 창조를 미세하나마 맛보고 있다. 가령, 하나님이 동물들에게 털옷을 입혀주셔서 사시사철을 견딜 수 있게 해주신 것, 동물들이 먹이를 찾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청각과 후각이 발달한 것, 또 사람과 다르게 체내에서 비타민이 생성되도록 만드셨다는 것 등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동물들은 ‘돈’ 없이도 살 수 있어서 참 좋겠다 싶다.

영화 '코끼리와 바나나'
영화 '코끼리와 바나나'ⓒ카라 제공

이 외에도 몽실이를 키우면서 TV에 나오는 동물 프로그램을 꼭꼭 챙겨보는 습관이 생겼고, 동물 영화를 선호하게 되었다. 또한,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정보 교환과 교류의 기쁨을 얻곤 한다. 몇 달 전에 몽실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황망한 마음과 깊은 슬픔을 느꼈다. 다행히도 몽실이는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자신의 소변냄새를 맡으며 우리 아파트로 찾아와 주었다. 정말이지 강아지의 청각과 후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강아지를 키우기 전에는 인간을 사랑하기도 벅차다고 생각할 정도로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강아지를 키우려면 시간과 돈, 돌봄의 수고가 수반되어야 하기에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강아지를 키우기 이전에, 나는 인간의 통치권을 강조한 전통신학에 몰입되어,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함께 창조주의 숨결을 느끼는 평화로운 쉼의 신학엔 관심조차 갖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동물에 대한 나의 인식은 많이 변했다. 강아지를 키우면서 깨달은 것은 강아지의 습성과 특성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마음을 기울여 살피고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강아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교감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더 많은 감사와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아담이 에덴동산에 있는 들짐승과 각종 새들의 이름을 지을 때도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면 모든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살펴야 존재 의미와 목적을 파악하여 이름을 명명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옆으로의 신학과 유기적 공동체

코로나19라는 전염병 위기와 기후위기는 인간의 문제 즉,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특히, 많은 생태학자와 생태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를 자처한 인간 남성이 산업자본주의와 합세하여 여성과 자연을 통제하고 착취해왔음을 주요 원인으로서 지적한다. 나는 레오나르도 보프가 “생태신학은 모든 존재의 자율성과 상대성, 공존과 상호 의존성을 긍정하는 ‘옆으로의 신학’이다”고 말한 데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창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가 직접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계급적인 질서도 없고 배타적인 하나님 대표도 없다 ··· ‘옆으로의 신학’은 모든 계급을 기능적인 것으로 만들고, 강자의 권리를 거부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자료사진
자료사진ⓒ뉴시스

또 범지혜(pansophia)를 유기체와 관련해 언급했던 17세기 교육가요 신학자인 요한 코메니우스(J. A. Comenius)를 소개하고 싶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는 강이 여러 가지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인간 안에서 인간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확산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코메니우스의 유기체와 범지혜의 개념에서도 옆으로의 신학적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 역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에베소서 5장21절)고 하면서, 옆으로의 신학적 관점을 지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도 ‘교회의 유기체성’이 잘 드러난다. 바울은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로서, 성령의 뜻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연합해야 할 존재로서 표현하고 있다. 교회의 일원인 각각은 전체를 위한 부분(piece)으로서 위아래 없이, 함께 고통 받고 함께 즐거워하며 친교를 나누는 지체들이다(고린도전서 12장26절). 그리고 분쟁이 없이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돌보는 유기적 공동체이다(고린도전서 12장25절).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가장 빛나는 유기적 공동체의 특징을 꼽으라고 한다면, “머리 부분이라고 해서 우월하다고 보는 게 아니라, 몸의 약한 지체를 도리어 요긴하게 보며, 더욱 존귀를 더해주는”(고린도전서 12장 22~24절) 방식에 있다고 본다. 이 얼마나 역설적이며 멋진 모습인가!

옆으로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나태주 시인은 ‘풀꽃’이라는 시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기죽지 말고 살아 봐 꽃을 피워봐 참 좋아···”라고 썼다. ‘풀꽃’이라는 시에서도 옆으로 보는 신학적 관점과 생태 감수성을 발견하게 된다. 옆으로 본다는 건, 풀꽃과 같은 미물이라 할지라도 관심 갖고 자세히 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태도가 아니던가!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옆에 두고 보신다는 증거가 뭐가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라는 말씀(마태복음 10장30절)과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라는 말씀(시편 139장1~4절), 그리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그가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스바냐 3장17절)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며 입히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한없는 자애로움을 느낀다. 노루와 어린 사슴이 뛰놀고,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들이 주렁주렁 열리며 저마다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았을 에덴동산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2020년 2월 7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그린피스가 기후위기와 해양보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얼음으로 조각한 ‘사라지는 펭귄들’을 전시하고 있다.
2020년 2월 7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그린피스가 기후위기와 해양보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얼음으로 조각한 ‘사라지는 펭귄들’을 전시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지금 세계는 기후위기와 생태계 위기문제, 불평등과 착취의 문제, 분열과 혐오 등 수많은 문제에 직면하여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교회든, 사회든, 국가든, 세계든 어느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이 잘먹고 잘살기 위해 인간과 자연을 차별하며 착취하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옆으로 보는 태도를 가져야 우리의 터전인 지구에서 안전하게 모두 잘 살 수 있으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상호연결 되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으며, 종국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 모든 지혜와 인자하심, 그리고 은혜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 2장13절

강호숙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