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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내나는 삶] 인간 전태일의 이상과 오늘날 노동자의 삶과 노동
전태일 열사 분신 47주기인 지난 2017년 11월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노동자들이 전태일 열사 묘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 분신 47주기인 지난 2017년 11월 13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서 노동자들이 전태일 열사 묘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나는 1990년에 천주교 예수회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고 1992년부터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지오세) 노동자들을 만났다. 1994년 겨울 즈음에 노동자들로부터 그들의 삶을 배운다는 자세로 약 6개월 동안 서울 영등포 문래동 소재의 철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과거 운동권 학생들이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기 위해서 위장취업을 하긴 했지만, 수도자가 노동자들의 삶을 배우기 위해 현장에 위장취업을 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일 것이다.

전태일 열사의 50주기 기념일이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환경은 어떠한가?

나는 수도회 입회 전에 2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나 육체노동을 하는 철공장의 공장생활은 내가 전에 했던 직장생활과 전혀 달랐다. 하루 8시간의 노동을 마치고 버스에 올라 의자에 앉으면 히터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몸이 나른해져 몰려오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수도자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로 돌아오면(가끔 잔업 세 시간을 하고 밤늦게 집에 오기도 하였다.) 다음날 출근하여 노동을 할 걱정에 예수회의 다른 동료들과 어울릴 엄두도 못 냈다. 토요일 4시간의 노동을 끝내고 사우나를 하며 몸을 푸는 것이 하나의 낙이었다. 그 다음날은 꿀맛 같은 휴일이었다. 그래서 토요일이 무척 기다려졌다. 노동자가 8시간을 쉬고, 8시간을 일하고, 8시간을 자신을 위해서 쓴다는 것은 이상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2020년 10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전태일 50주기 주모의 달 선포식’이 열린 가운데 전태일 열사 분신 현장 표지석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2020년 10월 1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전태일 50주기 주모의 달 선포식’이 열린 가운데 전태일 열사 분신 현장 표지석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김철수 기자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 노동 환경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나, 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위해 노동자들이 가진 선택의 폭은 매우 좁다고 본다. 나는 내가 노동자로서 평생을 이런 환경에서 살 수 있는지 자문하며 6개월을 보냈다. 나는 가난을 체험하고 배우기 위해서 노동을 했지만, 수도자인 나는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체험이었다. 또 오래전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거리는 감동을 기억하며 노동의 고단함 속에서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를 다시 떠올리게 해준 시간이기도 했다. 이제 곧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고 외치며 죽었던 전태일 열사의 50주기 기념일이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환경은 어떠한가?

불안정한 고용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빈곤한 삶을
강요받을 뿐만 아니라
불안전한 노동 환경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 아래서 경제성장이란 “일자리를 ‘유연한 노동’으로 대체하고 고용 보장을 ‘재계약’, 기간제, 임시 고용으로 대체하는 것, 인원 감축, 구조 조정, ‘경영합리화’ 등과 궤를 같이한다. 이런 조치들은 모두 고용 축소로 이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계속 가난한가?, 동녘, 2019, 94쪽) 이것이 바로 고용 없는 성장이다. 1997년 말 불어 닥친 외환위기로 인하여 우리 사회는 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는 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로 묶였다. 우리 정부도 구제 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과 공공부문의 민영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대량 해고자가 넘쳐 났고 비정규직이 노동의 한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노동자들이 만들 수 있는 소득은 노동을 통한 임금 소득인데 경제성장 속에서도 고용이 없으니 임금 소득은 기대하기도 어렵고, 또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정한 노동으로 올릴 수 있는 소득은 빈약하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노동자들은 빈곤의 일상화라는 불안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사실 “빈곤은 경기 침체와 비(非)성장 때문에 심화되고, 경제성장 때문에 악화된다.”(같은 책, 93쪽) 불안정한 고용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빈곤한 삶을 강요받을 뿐만 아니라 불안전한 노동 환경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2주기인 2018년 5월 28일 오전 서울 광진구 구의역 강변역 방면 9-4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김군을 추모하는 메세지가 담긴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지난 2016년 5월 28일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김군은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달리는 열차와 스크린도어에 끼어 사망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2주기인 2018년 5월 28일 오전 서울 광진구 구의역 강변역 방면 9-4 승강장 스크린도어에 김군을 추모하는 메세지가 담긴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지난 2016년 5월 28일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김군은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달리는 열차와 스크린도어에 끼어 사망했다.ⓒ김슬찬 인턴기자
충남 태안화력에서 설비 점검 도중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이 열리는 2019년 2월 9일 오전 충남 태안군 고인이 근무하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열린 1차 노제에서 유가족과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충남 태안화력에서 설비 점검 도중 사고로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 노동자 민주사회장이 열리는 2019년 2월 9일 오전 충남 태안군 고인이 근무하던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열린 1차 노제에서 유가족과 참석자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기업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비용을 절감했음에도 더 많은 이윤 창출을 위해서 노동자들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는다. 안전을 위한 비용은 지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2016년 5월 28일 서울메트로의 스크린도어 관리 외주업체에 속한 비정규직 노동자 김모 씨가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열차에 치어 숨진 사고가 있었다. 외주업체는 비용을 절감하려 했기 때문에 ‘2인 1조’의 근무조건을 이행하지 않았고, 결국 충분한 노동력이 확보되지 않은 1인 작업이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숨진 김군의 가방 안에 남겨진 컵라면 하나가 편안하게 앉아서 식사할 시간도 없을 정도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보여주고 있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이는 50년 전 전태일 열사가 밥을 굶으며 노동하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차비로 풀빵을 사서 나누어주었던 대목과 겹치는 장면이다.

또 지난 2018년 12월 11일, 태안의 한국서부발전소의 하청업체인 한국발전기술(주)에 속한 청년 노동자 김용균 씨가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여 죽음을 당하였다. 이 사건 역시 2인 1조의 근무 조건을 1인 근무조건으로 바꾼 것이 사고 원인이 되었다. 한국서부발전소와 한국발전기술은 현장의 위험성을 알고도 3억 원의 추가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비용 절감을 위한 외주화는 다름 아닌 ‘죽음의 외주화’와 다를 것이 없다.

분류한 물량을 차에 싣고 있는 택배노동자
분류한 물량을 차에 싣고 있는 택배노동자ⓒ민중의소리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커지며 사람들은 비대면 배송을 선호하게 되었다. 배송 업종은 배송 주문이 늘어 뜻밖의 호황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배송 업체는 업무가 늘어난 만큼 노동력을 보충하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과로사의 위험에 노출됐다. 지난 9월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택배노동자 821명을 상태로 진행한 실태조사에서 주당 평균 노동시간이 71.3시간으로 집계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주 6일 동안 매일 평균 12시간 가까이 노동을 하는 것이다. 12시간에 노동자들의 식사 시간을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아침 8시까지 출근한다면 저녁 8시에 퇴근해서 집에는 9시쯤 돌아오는 일정이다. 다음날 아침 6시에 일어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 하고 씻고 바로 잠자리에 들어야 겨우 8시간의 취침시간을 갖게 된다. 택배노동자의 일상은 출근, 노동, 퇴근, 취침,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출근밖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50년 전 전태일 열사는 먼지 나는 작업환경 속에서 16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았다. 12시간이면 16시간보다 좀 나아진 것인가?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보는지가 문제이다. “노동이 인간을 위한 것이지 인간이 노동을 위한 것이 아님을”(간추린 사회교리, 272항) 알아야 한다. 더욱이 이런 장시간 노동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노동도 아니고 죽음의 노동이라는 것이 더 문제이다. 올해 과로사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은 택배노동자가 수가 무려 10명에 이른다.

난 세상의 아픔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픔을 본다.
나는 인간 전태일의 연민을 통해서
하느님의 연민을 본다.

나는 세상과 하느님이, 그리고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보질 않는다. 나는 세상을 통해서 세상 안에 그리고 세상을 넘어 계신 하느님을 본다. 나는 인간의 한 육체를 통해서 인간의 고귀한 영혼을 본다. 난 세상의 아픔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픔을 본다. 나는 인간 전태일의 연민을 통해서 하느님의 연민을 본다. 연민이란 누군가 고통 속에 있다면 그를 그 고통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감정이다. 하느님은 인간 전태일을 통해서 당신이 노동자들의 고통을 보며 아팠던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에 감동을 받았고 노동자들의 고통에 응답하여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것이 내가 하느님과 함께 사는 방식이고 타인들과 함께 사는 방식이다. 곧 그의 50주기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50년의 시간 속에 인간 전태일이 품었던 이상과 오늘날 노동자의 삶과 노동환경이라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커 보인다.

이 칼럼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웹진 인연'에 함께 게재됩니다.

김정대 예수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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