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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y Elich] ‘북한 코로나 대응’ 지원한 인도주의 단체에 들이닥친 경찰
북한 강원도 원산에서 코로나19 방역 공무원이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의 체온을 재고 있다. (2020.10.28)
북한 강원도 원산에서 코로나19 방역 공무원이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의 체온을 재고 있다. (2020.10.28)ⓒAP/뉴시스

북한에 대한 유엔과 미국의 제재는 북한과 거의 모든 국가 사이의 무역과 거래를 금지한다. 이런 제재는 결과적으로 북한 국민 전체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표면적으로 인도주의적 지원은 제재 대상은 아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인도주의 단체들이 북한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거나 중단해야 했다. 미국 당국자들이 외국 당국자들을 자주 만나면서 북한과 거래하는 기업, 단체, 개인들을 강력히 단속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런 단체 중 하나가 바로 뉴질랜드-북한 협회(NZ DPRK Society)다. 이 단체는 수년 동안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해 왔고 북한과 교육 교류를 진행해 왔다. 이 단체의 프로젝트 중에는 농기구, 디젤연료, 홍수 구호물자, 다량의 의약용품 지원 등이 있다. 또 이 단체는 북한의 뉴질랜드 친선 농장(삼봉협동농장)에 비료를, 승호노인시설에 건강보조식품을 지원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이 단체가 벌이고 있는 수많은 활동의 일부일 뿐이다.

올해 뉴질랜드-북한 협회는 북한에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 필요한 개인보호장구를 지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북한 경제를 옥죄기 위해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제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협회 사무총장인 피터 윌슨이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줬다.

일리치 당신은 뉴질랜드-북한 협회의 사무총장이다. 이 단체는 1972년 설립됐다. 단체의 목표와 활동은 무엇인가? 당신의 단체는 오랜 시간 북한을 상대로 여기서 다 얘기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인상적인 인도적 지원 활동을 펼쳐 왔다. 그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윌슨 우리의 주 활동은 북한 사람들과 함께 민간교류를 추진하고 소규모 프로젝트 또는 지원 물자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소소한 도움을 제공하면서 뉴질랜드 국민과 정부에 북한과 북한 사람들이 처한 어려움을 알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뉴질랜드-북한 협회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엄청난 선전 공세로 인해 북한에 대한 가짜뉴스와 편견이 일반 대중들과 정치인, 정부 기관의 뇌리에 너무도 강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진실을 제대로 전하기가 어렵다. 공공 영역 또는 정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굳이 관심을 갖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뉴질랜드 국민과 정부에 북한을 제대로 알리려는 우리의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뉴질랜드-북한 협회는 뉴질랜드와 북한의 외교 관계 수립을 위해 로비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 또한 절반의 성공만 거뒀다. 2001년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뉴질랜드 노동당(리버럴)은 북한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다. 하지만 국민당(보수) 정부가 그런 노력을 무위로 돌렸고 2015년에 모든 외교 관계가 단절됐다. 그 이후 들어선 2017-2020년 노동당 정부는 과거 인상적이었던 노력과는 반대로 북한과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지 않았다. 렉스 틸러슨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뉴질랜드 총리와 외무장관에게 미국의 북한 고립 정책에 동조하라고 압박했기 때문이다.

북한 측과의 민간교류는 모두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80년대, 90년대에 문화 단체 교류 방문을 진행했다. 2006년에는 북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최초의 서구인 교수가 탄생했는데 그는 평양의 대학들에서 방문 교수로 있었다. 북한 교사와 대학 교수들이 뉴질랜드로 연수를 오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북한에 있는 뉴질랜드 친선 학교에 물품을, 독거노인, 노인요양시설 등에 국수와 빵을 공급하는 봉수교회 제과점에 밀가루를 지원했다. 또 신약 출시로 뉴질랜드에서는 더는 유통되지 않는 항생제와 약이 실린 컨테이너, 중고 의료 장비(유엔 제재로 중단!)를 전달했고 북한의 뉴질랜드 친선 농장에 트랙터, 트럭, 디젤 연료, 비료를 지원했다. 홍수 구호품도 전달했다. 이 모든 것이 성공적인 프로젝트였다.

이런 활동들은 뉴질랜드와 북한 양측 관련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커다란 만족감을 준다. 언제나 양측은 서로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아가고 있고, 인간적 신뢰와 우정의 끈도 탄탄해지고 있다. 정말 좋은 일이다. 이런 소소한 프로젝트와 계획들을 실행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도 일어난다. 잘못하면 일이 틀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상호 존중과 호의의 정신으로 모든 문제들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전 세계에 북한 자매결연 단체 또는 친선 단체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른다. 50개? 60개? 그 정도 된다. 몇몇 단체들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또 많은 단체들이 연대 서한만 쓰고 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은 소수에 불과한데, 주로 북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 단체들이다. 나는 몇 년 전에 평양 당국자로부터 뉴질랜드 협회가 가장 적극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땐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난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질랜드가 평양에서, 정말 북한 전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우리가 진행했던 프로젝트들 덕분이다. 이전에 누구도 하지 않았던 프로젝트도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우리의 파트너인 북한-뉴질랜드 친선 협회의 선견지명 있는 직원들 덕분이다. 그들을 정말 존경한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성공적이었다. 우리의 작은 프로젝트들이 잘 진행된 덕분에 양국의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당신 질문을 받고 곰곰이 되돌아보니, 뉴질랜드-북한 협회 활동의 주요 성과는 사실 회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로 이뤄진 것 같다. 약 11년 전 아주 똑똑한 대학 졸업생 하나가 협회 사무총장이었던 나에게 문의를 해 왔다. 그는 훗날 '조선교류'(Choson Exchange)로 이어지는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 졸업생은 평양의 누구와 의논할 수 있는지, 또 그걸 어떻게 시작할 수 있는지 몰랐다. 나는 우리 협회가 진행한 40년 간의 교류 프로젝트 경험을 바탕으로 그에게 좋은 연줄을 만들어줬다. 오늘날 나는 그 졸업생, 제프리 시와 그의 조선교류 자원봉사자들이 성취한 것에 대해 놀라움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2012년 나는 한 한국계 미국인 여성의 전화를 받았다. 크리스틴 안(현 위민크로스 DMZ 사무총장)은 3년 전부터 DMZ(비무장지대)를 가로지르는 평화 행진을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 3년 동안 그녀는 많은 사람들과 상담했지만, 그들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 협회는 뉴질랜드 모터사이클 애호가들이 바이크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북한을 거쳐 DMZ를 통과, 남한을 종단하는 대장정 프로젝트를 막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내게 자신의 꿈이 가능한지 물었다. 나는 아직도 내 대답을 기억한다. "당연히 할 수 있죠."

나는 우리 협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떻게 그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할지 조언해 줄 수 있었다. 그 후 15개월 동안 나는 크리스틴 안과 함께 일했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실현했다. 2015년 5월 24일 크리스틴 안과 29명의 세계 여성들이 DMZ 가운데에 있는 북한 여권사무소로 들어가 남한으로 넘어갔다. 몇 대의 버스를 탄 북한 사람들이 그 장면을 지켜봤고, 나는 그 중 유일한 서양인이었다.

이건 여담인데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북한 여성들과 외국 여성들이 포옹하고 또 포옹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렀다. 나도 울고 있었다. 사실, 그 순간의 감정이 바로 지금 다시 북받친다. 눈물을 좀 닦아야겠다.

나는 크리스틴이 해낸 일에 정말 경외감을 느낀다.

제프리와 크리스틴이 하고 있는 일의 성과는 어마어마하다. 그들은 뉴질랜드-북한 협회가 과거에 했거나 앞으로 할 어떤 일보다도 더욱 엄청난 일을 해냈다. 그들이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우리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하다.

2017년 7월 2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에게 드리는 호소문 발표 기자회견 ‘우리는 평화협정을 원합니다’에 참석한 크리스틴 안 위민크로스 DMZ 현 사무총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자료사진, 2017.7.27)
2017년 7월 2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에게 드리는 호소문 발표 기자회견 ‘우리는 평화협정을 원합니다’에 참석한 크리스틴 안 위민크로스 DMZ 현 사무총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자료사진, 2017.7.27)ⓒ뉴시스


일리치 앞서 뉴질랜드-북한 협회가 수년 동안 해온 일들의 목록을 먼저 보면서 그 성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직접 들으니 더욱 와닿는다.

작년까지 협회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준비하면서 맞딱뜨린 문제나 난관은 무엇이었나? 내 생각에는 인도주의에 근거한 유엔 제재 면제 승인을 얻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지부진함과 관료주의적 장애가 있었을 것 같다. 2017년 도입된 유엔 및 미국의 아주 빡빡한 대북 제재 때문에 그 절차가 더 어려워지지는 않았나?

윌슨 90년대까지 모든 일은 서신으로 진행됐다. 평양의 답변은 종종 늦었고, 우편 서비스도 느렸다. 팩스로 진행하면서 좀 더 나아졌고 이메일로 하면서 더욱 편해졌다. 오로지 비자나 그런 것들을 너무 늦게 신청하는 사람들만 골칫거리였다.

뉴질랜드-북한 협회는 상대방과 논의를 통해 모든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우편이든, 팩스든, 이메일이든, 아니면 대면이든 간에. 북한은 보통 아주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는데, 한번 합의가 되면 그게 무엇이든간에 우리는 즉시 착수해 진행했다.

2005년 나는 평양 소재 은행에 협회 계좌를 개설했다. 우리는 북한의 뉴질랜드 친선 농장에 보내는 트랙터 구입 비용으로 3천500 달러(약 390만 원)를 보냈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 돈으로 북한 측 단체 사무총장은 트랙터를 구입했다. 당시 우연히 평양에 몇 명의 뉴질랜드인이 있었고 그들은 농장에 트랙터를 선물했다.

2006년 즈음 미국 재무부가 전 세계 은행들에게 북한과 어떤 거래라도 한다면 미 달러를 사용하는 모든 외환 거래를 중단시키겠다고 경고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계좌에로 다시 송금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항상 프로젝트 자금을 현금으로 평양에 전달해야 했다.

올해 우리는 3월 중 인편으로 2천 달러(약 223만 원)를 북한 측에 보내려고 했다.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사람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송금 경로를 택했고, 이게 문제의 발단이 됐다.

사실 그 이전에는 우리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항상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정하면 그대로 실행해 왔다. 정부 또는 유엔, 그 누구한테도 뭘 요구해 본 적이 없다. 왜 우리가 그래야 하지? 나이키 슬로건이 뭔가? "저스트 두 잇(Just do it)." 그게 바로 우리 방식이었다.

일리치 협회 계좌와 관련된 사건이 올해 모든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보여주는 첫 번째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 일이 협회 운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얘기해 달라.

윌슨 우리 협회는 은행 계좌 2개를 가지고 있었다. 주 계좌는 뉴질랜드-북한 협회 명의였다. 좀 더 나중에 개설한 두 번째 계좌는 도널드 보리 기념 장학금 계좌였다. 협회 설립자 중 한 명을 기념하기 위해 명명한 계좌였다. 모금된 장학금은 제2 외국어로서 영어와 영어회화를 가르치는 6주 코스에 참가하는 북한 출신 장학생들에게 전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1월 21일 북한은 자국 내로 들어오는 모든 항공기와 열차 운행을 중단했다. 난 그들이 전 세계에서 봉쇄령을 발동한 첫 번째 국가라고 생각한다. 당시 바이러스 명칭도 없었고 중국에서는 단 291명의 확진자만 보고된 상태였다.

2주 후 북한은 바이러스 진단 키트와 다른 관련 물품들을 지원해 달라는 긴급 요청을 보내왔다.

도널드 보리 장학 재단에는 4명의 이사가 있다. 3명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살고, 나머지 한 명은 차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모였다. 우리는 세 명의 장학생에게 장학금을 보내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데 동의했다. 따라서 2천 달러를 북한의 요청에 화답하는 지원 자금으로 할당하기로 결정했다.

보통 때라면 인편으로 현금을 보냈을 것이다. 전달자는 3월 첫째 주 북한으로 향했을 것이다. 물론 그는 그럴 수 없었다.

플랜 A는 국제 적십자·적신월 연맹을 통해 북한 적십자회 측에 기금을 전달해 달라고 뉴질랜드 적십자에 요청하는 안이었다. 애석하게도 뉴질랜드 적십자 측은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통보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플랜 B를 채택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주재 북한 대사관이 뉴질랜드를 담당한다. 마침 자카르타에서 500km 떨어진 동자바 지역에 협조 가능한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2천 달러를 동자바 계좌로 보냈다. 자카르타 측은 며칠 뒤 돈을 받았다고 알려 왔다. 그러고 나서 북한의 내 파트너도 돈을 수령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 다음날 북한 적십자회로부터 공식 수령증을 받았다. 뜻이 있는 곳에 항상 길이 있다. 그건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북한의 긴급 요청에 우리가 아주 신속히 화답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관련 사진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우리는 사진을 받고 나서 6월 4일 보도자료를 냈다.

그런데 한달쯤 뒤 은행에서 전화가 왔다. 은행에서는 몇몇 국제 자금 이동에 대한 통상적인 감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질문을 들어 보니 통상적인 감사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서면 질문을 요구했다. 질문은 8가지 정도였다. 나는 답변 대신 6월 4일 보도자료 링크를 보내줬다. 보도자료에서 우리는 인도네시아 중개인을 통해 돈을 보냈다고 밝혔다.

그러자 은행 고위 책임자가 전화를 걸어와 훨씬 더 많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나는 서면으로 질문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한 모든 질문을 인쇄한다면 A4 용지 한 면을 꽉 채울 정도였다. 그들은 2011년 이후 세부 거래 내역 전체를 알고 싶어했다. 인출 목적은 무엇인가? 돈은 북한으로 갔나? 송장은 가지고 있나?

당시 우리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북한 친선 단체들이 오래된 계좌를 약식으로 폐쇄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두 계좌의 잔액을 인출했다. 은행 측은 이 점을 언급하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이러이러한 날짜에 당신은 얼마를 인출했다. 어디다 쓰는 건가?

이건 결코 통상적인 회계 감사로 볼 수 없다.

난 이걸 며칠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은행 책임자 전화가 다시 걸려왔고 오랜 시간 대화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나한테 진짜로 알고 싶어하는 걸 물어봤다. 나는 이번 건이 당신들 은행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돈은 인도네시아로 보냈다고 말했다. 나는 인도네시아는 북한으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데 왜 북한 관련 질문들을 쏟아내는지 물었다. 그녀는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다음날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뉴질랜드 경찰이 우리 은행에 당신들의 보도자료를 보라고 했다." 며칠 뒤 은행은 우리 계좌를 막아 버렸다.

거기서 문제가 끝난 줄 알았다.

우리는 남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잔금의 66%를 북한에서 진행되는 두 가지 괜찮은 프로젝트에 기부하고 싶다. 그러나 당장은 송금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일리치 10월 19일 경찰이 당신과 다른 협회 구성원들의 자택에 들이닥쳤다.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말해 달라. 경찰은 무엇을 압수했나? 당신은 또한 현재 유엔 제재 위반으로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다른 잠재적 혐의에 대해 들은 건 있나?

윌슨 그날 오전 11시였다. 현관문을 여니까 네 명의 경찰관이 서 있었다. 세 명은 정복, 나머지 한 명 선임 수사관은 사복 차림이었다. 그녀 계급이 뭐였는지는 모른다. 그녀의 명함에는 뉴질랜드 경찰 금융정보부 수사관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와 정복 경찰 한 명은 수도 웰링턴에서 300마일이나 떨어진 여기 오클랜드까지 왔다.

뉴질랜드 경찰은 무장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1시간 45분에서 2시간 동안 여기 있었다. 그들은 여유 있고 친절하면서 전문적이고 예의 있게 행동했다. 그저 자기 할일을 하는 보통의 경찰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서명이 없는 수색영장 사본을 제시받았다. 거기에는 유엔제재(북한) 2017 (LI 2017/74), 1946년 유엔법 3조 1항 위반 혐의가 적시돼 있었다. 그들은 오직 2017년 대북 제재 이후 자료에만 관심이 있었다. 난 그 자료들을 어수선한 내 사무실로 가져갔다. 벽장에서는 파일 다섯 박스, 캐비닛에서는 꽉꽉 채운 파일을 꺼내놨다. 그리고 경찰에게 당신들이 관심있을지도 모를 모든 건 당신들 손에, 그리고 여기 책상 위 노트북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선임 수사관이 내게 식탁으로 가서 질문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게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녀는 무료 법률지원 변호사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협회 법률 자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25분 안에 도착했다. 그녀는 그렇게 빵빵한 사람이 올지는 몰랐을 거다. 우리 법률 자문은 뉴질랜드 교정부 장관과 외교부 차관을 지낸 매트 롭슨이었다. 그는 현재 공직에 종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핵확산방지 및 군축을 위한 의회 조정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은행 계좌 지출에 관해 질문했다. 변호인의 조언에 따라 나는 진술을 거부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문서를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가져간 전부를 보지는 않았지만 한 경찰관은 대충 약 10인치에 달하는 종이 무더기를 가지고 나갔다. 그들은 연락처와 비밀번호들이 잔뜩 들어 있는 노트북, 휴대폰, 수첩을 가져갔다.

내 은행계좌 공동 명의인은 입출금 내역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휴대전화와 노트북도 압수당했다. 경찰은 그의 집에서 한 시간을 있었다.

1946 유엔법 3조 1항에 따르면 이 법을 위반한 자는 1만 달러의 벌금 또는 징역 1년에 처해진다.

2017년 제재는 39쪽에 달한다. 대부분은 무기와 석탄, 석유제품 등에 관한 내용이다. 금융 서비스에 관한 내용은 한 섹션이다. 섹션 43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43. 금융 서비스에 관한 금지:

(1) 사업체나 자회사가 북한에서 설립되거나 북한 측이 소유한 금융 서비스 제공자의 지점 또는 자회사라는 사실을 알면서 뉴질랜드에서 사업체 또는 자회사를 설립해서는 안 된다.

(2) 사업체나 자회사가 뉴질랜드에서 설립된 금융 서비스 제공자의 지점 또는 자회사라는 사실을 알면서 북한에 사업체나 자회사를 설립해서는 안 된다.

(3) 북한에서 설립되거나 북한 측이 소유한 금융 서비스 제공자라는 사실을 알면서 해당 제공자로부터 금융 서비스를 제공받거나 그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4) 금융 서비스가 (a)북한의 핵, 탄도미사일, 또는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b)이 제재에 의해 금지된 다른 행위들에 일조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북한의 개인이나 독립체에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는 서비스 제공을 중단해야 한다.

(5) 위원회의 사전 승인 없이는 북한과 무역을 하기 위한 금융 서비스라는 사실을 알면서 서비스 제공을 해서는 안 된다.

북한 적십자회에 약간의 돈을 지원하는 게 어떻게 제재 위반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다른 규정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아마도 거기에 뭔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경찰이 들이닥치고 나서 5일이 지난 지금도 어떻게 그게 제재 위반이 되는지 여전히 수수께끼다.

일리치 힘든 상황이지만 당신과 협회 모두 잘 이겨내길 바란다.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는가?

윌슨 지난 며칠을 되돌아보면서 반북적인 탄압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지 놀라고 있다. 우리 작은 협회가 은행 계좌를 폐쇄당하고 분명치도 않은 제재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은 북한의 목을 옥죄고 있는 올가미가 얼마나 촘촘한지 보여준다. 이 세계에서 뉴질랜드-북한 협회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라고 그러나?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존재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2천 달러를 우리 친구인 북한 사람들에게 지원했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고 있다. 우리는 끔찍한 코로나 바이러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고자 하는 북한 사람들을 지원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 자체로 슬픈 일이다. 그건 유엔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고 있는 역겨운 행태다. 인도주의는 대체 어디 간 건가?

그레고리 일리치 Gregory Elich / 번역 : 최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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