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부터 지속되는 증상의 업무관련성을 알고싶다고 찾아온 젊은 노동자가 있었다. 얼핏 보기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직업력을 들어 보니 실제로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분이었다.
그의 증상은 생명에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달 간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고 있었고 일상 생활에 상당한 불편과 고통을 주고 있었다. 치료를 받더라도,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증상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었다. 두 차례 상담과 자료 검토를 거쳐, 산재보험 요양신청 소견서를 작성했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무난히 산재 승인될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보상을 받는다 해도 평생 갖고 살게 될지도 모를 고통스런 증상을 얻은 사실은 되돌릴 수 없다. 고등학교 졸업 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평생 갖고 살게 될지 모르는 증상을 얻게 된 이런 상황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일을 겪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었을까. 고등학교 전공을 살려 취업한 그가 학교에서 관련 교과를 배우며 이런 위험에 대해서도 배웠을까.
그는 내가 묻는 작업과 관련한 질문들에 덤덤하게 답해주었지만, 그에게 대체 어떤 심정이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좀 괴로운 심정이었다. 그 후 한동안 가끔 그 일을 곱씹어보곤 했다. 증상은 나아졌는지, 산재 신청 건은 잘 진행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그와 비슷한 또래 노동자를 만났던 수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전공의 시절, 근골격계 유해요인 조사의 일환으로 어느 자동차 공장에 갔을 때였다. 그 날 내가 할 일은 유증상자들을 만나 진찰과 상담을 하는 것이었다. 분명 여러 명을 만났을텐데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람은 20대 초반의 젊은 노동자 한 명뿐이다.
그는 오른팔을 휘두르는 동작을 보여주며 웨자(웨더스트립, 도어를 닫았을 때 비와 물, 먼지 등이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도어와 차체 사이에 꼭 맞게 마련된 탄성 고무나 스펀지) 끼우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내가 일하면서 장기적으로 통증을 예방하려면 근력 운동을 해야한다고 이야기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입사하고 나서 처음으로 의사 상담이 있다길래 왔는데……. 오면 뭔가 대책을 말해주실 줄 알았어요. 이걸 한 시간에 60개씩 10시간 동안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가 기대했던 ‘대책’은 근력운동 같은 게 아니라 조직적 차원의 대책이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기엔 아직 부족한 전공의였다. 당시 조직적 차원의 대책을 이야기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을 뿐더러, 그것은 상황상 적절하지 않기도 했다. 그가 아직 경험이 많지 않고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내가 ‘입사 후 회사에서 처음 만난 의사’였다는 사실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고, 원하는 이야기를 해주지 못하는 것이 왠지 미안했다. 그날 이후 다시 그를 만날 일은 없었지만 그 얼굴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7년 전의 일이다. 사실 그의 얼굴은 잊은지 오래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겨둔 덕택인지 그 상황만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지금도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까. 그 당시엔 일하는 동안에만 팔이 아프다고 했는데, 이후로도 같은 작업을 몇년 간 계속 했다면 통증이 더 심해졌을 것이다. 병원에서 회전근개 손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치료 받다가,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를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이 남은 젊은 노동자가 첫 일터에서부터 심각하게 다치거나 병을 얻는 일, 때로는 목숨을 잃는 일이 여전히 벌어지는 현실은 그저 안타깝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하다. 예전에 비하면 법과 제도가 강화되고 인식도 높아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과 청년들이 경제 활동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배운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키며 일할 수 있는 기술과 지식’이어야 한다. 또 그런 기술과 지식을 바탕으로 일할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얻은 기술과 지식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 한들, 건강을 잃고 생명을 잃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모든 노동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었으면 한다.

김세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직업환경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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