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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판교의 등대’서 노조 2년 “이제야 정시퇴근한다” - 배수찬 넥슨노조 ‘스타팅포인트’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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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팔뚝질과 구호가 어색할 것 같은 게임 개발자들이 판교 거리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게임개발사 넥슨 노동조합(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 넥슨지회) '스타팅포인트'가 노조설립 1년 만에 첫 거리집회를 열어 게임업계에 만연한 고용불안 해소를 촉구했던 것이다. 며칠 뒤에는 스마일게이트 노조 'SG길드'도 집회를 열면서 '노조불모지'인 판교 거리를 흔들었다.

당시 증권시장의 화제였던 '넥슨 매각설' 뒤에 게임업계에 만연했던 '프로젝트 드랍', '접힘'으로 인한 게임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이 드러난 계기였다.

그동안 '판교의 등대', '구로의 오징어잡이 배'로 불리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게임 업계에서 넥슨 노조 '스타팅포인트'를 시작으로 스마일게일트 노조 등이 잇따라 설립되면서 '포괄임금제' 폐지 등을 이끌어냈다.

노동권 밖에 있던 게임 노동자들이 서로의 울타리가 되는 출발점이 된 넥슨 노조 '스타팅포인트'의 배수찬 지회장을 만나 그의 노조 설립기와 설립 2년의 성과를 들었다.

배수찬 넥슨 노조 '스타팅 포인트' 지회장
배수찬 넥슨 노조 '스타팅 포인트' 지회장ⓒ영상 캡쳐

"국어보다 C언어를 더 많이 쓰고, 친구보다 피규어가 더 많은 사람입니다"

배수찬 지회장이 노조 설립을 생각하게 된 것은 회사와 노동자의 대화 과정에서 느낀 힘의 차이 때문이다. 2018년 주 52시간제 시행 앞두고 배 지회장은 근로자위원으로 대화에 참여했지만 이 정도의 대화로는 부족했다고 느꼈다.

"52시간제 시행 직전에서 유연근무제 등을 도입하려고 합의 과정에 참여했는데, 이 정도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동자들의 힘을 모아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넥슨 노조는 설립과정에서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노동조합연맹(화섬연맹)에 가입하기로 선택했다. 배 지회장은 민주노총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대안이 없었다"고 말했다.

"처음부터 비민주적인 노조는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요. 최소한 지회장의 선출과 탄핵은 조합원 투표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민주노총 선택했습니다. 화섬연맹을 선택한 건 네이버 노조의 추천도 있긴했지만, 파리바게뜨 노조 등 청년 노조가 있었던 화섬연맹으로 먼저 찾아갔을 것 같아요."

그동안 게임 개발자로만 살았던 배 지회장에서 노조설립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임 업계 최초로 노조를 만드는 만큼 참고할 선례도 없었다. 특히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조직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그가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노조를 만드는 과정 중에서 글 쓰는 일이 생각보다 많더라구요.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나, 어떤 것을 알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사람의 말보다 C언어를 더 많이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어색했죠."

배 지회장은 이러한 어색함과 약점을 진솔하게 조합원들에게 밝히고 연대를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 그는 지난해 2월 조합원들에게 전달된 노조활동 보고서 말미에는 이런 배 지회장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그는 해당 글에서 "지금 글을 쓰는 사람은 국어보다 C언어를 더 많이 쓰는 사람이고, 조합원을 만나러 다니는 사람은 친구보다 피규어가 더 많은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밝히면서도 "이런 모자람을 솔직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개인의 약점을 연대를 통해 보완함이 노동조합의 본질이기 때문"이라고 썼다.

넥슨 노조의 글<br
넥슨 노조의 글ⓒ출처 = 스타팅포인트

노조 설립 초반부터 많은 노동자들이 노조의 필요성에 공감해 설립 10일만에 800여명이 가입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동안 '크런치 모드' 등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게임노동자들의 절박한 현실을 대변하는 듯했다. 현재 넥슨 노조는 전체 직원 4500명 중 1500명의 조합원이 가입돼 있다.

배 지회장은 주로 20대~40대로 구성된 젊은 노조이지만 투쟁과 활동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들만의 젊은 감각을 노조 활동에 반영하고 있다.

"노조 피규어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죠. 노조 마스코트가 다람쥐인데 피규어로 만들어서 활용했죠. 대부분 피규어를 좋아하는 문화라서 반응이 좋았어요."

"정시퇴근은 엄청난 혜택이 아냐...이제야 정상화됐다"

배 지회장은 노조설립 2년 동안 크게 바뀐 것으로 "야근이 크게 줄고, 권고사직이 사라졌다"고 짚었다.

그동안 '등대', '오징어잡이 배'로 불린 게임 개발사들의 '크런치모드'는 게임업계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지난 2016년에는 '구로의 등대'로 불리던 넷마블 노동자가 장시간 노동 끝에 숨지기도 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포괄임금제'였다. 업무시간을 측정해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니 회사는 부담 없이 장시간노동을 강요하고, 노동자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넥슨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업계 최초로 '포괄임금제 폐지'가 담긴 단체협약을 만들어냈다. 이는 노조가 있는 게임 개발사는 물론 'NC소프트', '넷마블' 등 아직 노조가 없는 회사도 '포괄임금제'를 폐지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넥슨 같은 회사가 '포괄임금제'를 폐지하니까 경쟁하는 게임 회사에서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포괄임금제'를 폐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포괄임금제 폐지가 몇몇 회사에서만 할 일이 아니라 '크런치모드'가 있는 게임·IT 전체에서 폐지돼야죠."

넥슨 노조의 단체협약은 외국의 게임 업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배 지회장은 올해 초 세계적인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인 GDC에 세계 최초로 게임산업 단체협약을 성사시킨 사례로 강연에 초청되기도 했다.

포괄임금제 폐지로 게임·IT 업계에서는 회사 안이라도 휴식 시간과 업무하는 시간을 철저하게 체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각박한 분위기라는 지적도 있지만 배 지회장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감안할 정도라고 말했다.

"사실 납득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워라벨을 만들기 위해서 감안해야 하는 것도 있어야겠죠. 결과적으로 넥슨에서는 실제로 업무시간이 확 줄었어요. 노동자에게도 장기적으로 득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배 지회장은 게임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정상화가 되면 게임 서비스에서의 리스크도 줄어들 것이라고 봤다.

"무리를 하면 사고가 터져요. 정시퇴근은 엄청난 혜택이 아니고 정상화죠. 지금은 이제서야 정상화된거죠.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있어야 리스크가 관리되고 '긴급점검' 같은 사고가 줄어들게 되죠."

고용불안 느끼는 넥슨 노동자들<br
고용불안 느끼는 넥슨 노동자들ⓒ민중의소리

게임업계에서 만연했던 '프로젝트 접힘', '드랍'으로 인한 권고사직도 사라졌다.

그동안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드랍'이라는 이름으로 중단되면 이를 맡고 있던 노동자들은 다른 프로젝트에 영입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회사를 떠나야 했던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노조가 만들어지면서 이런 고질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알게 됐다.

"노조를 만들고 처음 알게 된 건 권고사직은 해고랑 다르다는 거였죠. 권고사직을 당했다고 나가야 하는 게 아니라 거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지난해 '넥슨 매각설'로 불거진 고용불안 문제는 넥슨 측이 폐업위기의 자회사들을 본사로 채용하고, '프로젝트 드랍'에 권고사직을 하지 않기로 하면서 어느정도 해결됐다.

그러나 배 지회장은 표면상 '권고사직'만 사라졌을 뿐 프로젝트 영입을 위해 무한정 대기를 해야 하는 불안한 상황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권고사직은 없어졌지만 면접을 보는 형태는 남아있어요. 프로젝트가 드롭되면 다른 팀에 합격할 때까지 무한정 면접을 보면서 대기를 해야 하죠. 예전에는 3개월 안에 다른 팀에 영입되지 못하면 나가야 했던 건데 계속 재시도를 할 수 있게 된 거죠. 이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닌 거죠."

"만들고 싶은 건 RTS 게임...언젠가 무료배포로 나눠주고 싶어

배 지회장에게 노조 설립에 이어 지회장이 된 이유를 묻자 "아무도 안 나서서"라는 쑥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지회장이 되고난 후 게임 개발자로서는 안 했을 것 같은 일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 자체가 엄청 바뀌었어요. 그전에는 많은 사람들을 몰라도 되는 일인데, 사람을 설득하고, 먼저 만나야 하죠. 모든 분야에서 연구하고, 홍보하고, 교섭해야 하니까 인간관계가 대폭 달라지더라구요."

1500명 조합원 규모 노조의 지회장이지만 배 지회장도 게임에 매력을 느끼고 게임 업계에 들어선 개발자이기도 하다.

"12살 때 1인 개발사가 만든 인디게임을 보고서 게임 기술을 가지고서도 예술작품이 나올수 있다는 생각했어요. 표현 뿐아니라 기술적인 퍼즐을 이용해 재밌게 문제해결을 유도하는 것이 지금까지 없는 예술이라 생각했죠. 그런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평생 게임을 개발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배 지회장의 개발자로서의 꿈은 언젠가 스타크레프트와 같은 RTS(실시간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혼자서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혼자서 RTS 게임을 만들어서 무료로 배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저도 무료 배포된 게임을 하면서 개발자의 꿈을 얻었으니까요. 또 넥슨 개발자로서 게이머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으니까요. 선물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죠.(웃음)"

지회장으로서는 배 지회장 자신이 없더라도 지속 가능한 노조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저 말고 대체자가 나와야 해요. 제가 갑자기 아파서 자리에 없어도 노조는 굴러가야 하니까요. 어떤 일에 반대도 있을 수 있는데 토론을 통해 대안도 만드는 그런 구조를 만들어야죠."

게임업계 전체적으로 노조가 많이 늘었으면 하는 것도 그의 바람이다.

"노조를 만들고 2년 정도 지나니까 이제는 게임업계 전반적으로 '개발자=노동자'라는 인식까지는 온 것 같아요. 아직 부족한 게 있다면 노조를 반드시 해야 하는 이유가 아직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것 같아요.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실행하기는 부족한 거죠. 게임 업계 노조가 늘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 안타깝죠."

김백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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