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문재인 대통령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갈등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며 공수처 출범을 다시금 강조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에서 공수처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여당과 야당의 갈등이 한창인 와중이었다.
그 시각 국회 법사위 회의장 밖에서는 산재사망노동자 유가족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날 법사위 논의 안건에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내일(9일)이면 정기국회는 종료된다. 법사위에서 8일까지 법안심사를 마치지 않으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연내 입법은 불투명해진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각각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겠노라고 공언했다. 두 정당에서는 각각 중대재해기업처벌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그렇지만 두 당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관련 논의를 하기로 한 자리는 ‘공수처 갈등’으로 무산되었다.
그리고는 대통령의 대국민사과와 사과를 넘어선 정치적 메시지가 발표되었다. 대통령이 말한 “민주주의를 위한 마지막 진통”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집단 사망 사고(연이은 산재 사망 사고) 문제는 지워졌다.
그날 같은 장소에는 두 개의 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국회 법사위 회의장 인근은 공수처법 개정을 둘러 싼 갈등의 목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언론이 몰려들었고, 대통령의 말이 지리멸렬한 정쟁에 ‘민주주의를 향한’이란 꽃장식을 달아주었다. 다른 하나의 목소리는 지워졌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하나의 의지로 모아지는 모양새였다. 큰 틀에서 이견이 없는 관련 법안만 3개가 발의되었다. 갈등이 아니라 조정과 협의가 이루어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여당과 야당의 의지는 ‘정쟁만이 아니라 민생도 챙기고 있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노동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이야기 했어야 했다. 정권 초기에 공언했던 산재 사망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일하는 국민들께 송구하다고 사과했어야 했다. 하지만 침묵함으로써 산재사망 노동자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지웠다.
문 대통령이 침묵하고, 이낙연대표가 갈팡질팡하고,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혁신의 이미지메이킹을 위해 노동자들의 죽음값을 저울질하며 깎아내리고 있는 와중에도 노동자들의 죽음은 이어졌다. 지난달 28일 인천 영흥화력발전소에서 화물노동자 심장선 씨가 추락해 사망했다. 심 씨의 아들은 2주기를 맞은 고 김용균의 묘역 앞에서 아이처럼 울었다. 김미숙씨가 죽은 아들 대신 심장선씨의 아들을 끌어안았다.
영흥화력 측은 언론이 사고 관련 보도를 얼마나 내는지 동향을 살피며, 사망한 노동자의 목숨값을 저울질하고 있을 것이다. 김용균 만큼 언론의 주목을 끌지 못하니, 보상액이 그보다 적어도 될 것으로 계산하고 있을지 모른다. 화물노동자이니 원청과 무관한 일이었다고, 그래서 법적인 책임도 없다고 말하기 위해 법률자문을 받고 대응논리를 마련하고 있을 것이다. 심장선씨 유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발전사 측의 치밀하고 차가운 얼굴을 마주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중이다. 2년 전 김용균 어머니가 그랬듯이 말이다.
집단사망 사고의 전체 보상액을 합쳐도 수시로 노동자들을 죽게 만든 기업 하나의 가격보다 적을 것이기에, 국회 법사위장에 모인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자식 영정이 아니라 이름도 얼굴도 없는 ‘그림자 영정’을 들었다. 지금까지 죽어간 노동자들의 얼굴이자, 내일도 죽을 얼굴들을 모아 ‘유가족’이 된 자신들의 시커먼 가슴 앞에 든 것이다. 그 영정은 ‘내 가족의 죽음’ 뿐 아니라 ‘아무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 무게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유가족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러 팽목항으로 갔다. 그 자리에서 대구지하철 유가족들은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 윤석기 위원장은 이를 “유가족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앞서 ‘우리가 상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또 다시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는 것이다. 이 과도한 책임은 유가족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에 더해, 기업과 정부가 회피한 사회적·정치적인 책임까지 떠맡게 된 결과다.
대통령은 2년 전 고 김용균의 죽음 이후 김미숙 어머니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고, 김미숙 어머니는 ‘더는 우리 아들과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당시 대통령은 김용균의 가족으로 김미숙 어머니를 만났지만, 김미숙 어머니는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은 수많은 ‘아무개’의 유가족으로 대통령을 만났다.
국가가 노동자의 집단사망 사고(연이은 산재 사망 사고)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동안, 유가족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은 그 죽음이야말로 정치적인 문제임을 사회적으로 각인시켜왔다. 어쩌면 대통령의 사과가 지운 것은 유가족의 목소리가 아니라 대통령 자신의 말일지도 모른다. 2년 전 대통령은 “용균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생명과 안전을 이익보다 중시하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12월 9일이면 정기국회는 문을 닫고, 다음날인 10일엔 김용균이 컨베이어벨트에 목숨을 잃은 날이 되돌아온다. 이날 임시국회가 열리는지, 열린다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대로 다룰 것인지 가장 아프게 그리고 독하게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대통령과 국회는 늦지 않게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전주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