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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만난 하나님] 누가 ‘양심의 자유’, ‘평등 원칙’, ‘저항’을 외칠 수 있는가?
1월 7일 오전 부산 강서구 세계로교회 앞에서 예배 회복을 위한 자유연대 목사, 신도 등 100여 명이 예배 회복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2021.1.7
1월 7일 오전 부산 강서구 세계로교회 앞에서 예배 회복을 위한 자유연대 목사, 신도 등 100여 명이 예배 회복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2021.1.7ⓒ뉴스1

요즘엔 사람들이 교회 다닌다고 하면 ‘신천지’와 비슷하게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나 신천지나 코로나 집단 감염의 진원지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겁할 일은 코로나19 ‘3차 대유행’으로 확진자 수가 1천명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는 와중에, 확진자가 발생한 인터콥 상주 BTJ 열방센터 집회 참석자의 67%(1,860여 명, 12일 기준)가 검사를 받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또 부산 세계로교회는 정부가 비대면 예배를 권고했음에도 대면 예배를 강행하고는 오히려 “정부가 예배 형식까지 정하는 건 위법이다...평등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며 법원에 행정소송을 걸겠다고 한다.

세계로교회는 “정부에 저항하자”는 손현모 담임 목사의 뜻에 전적으로 따르고 있으며, 전 부산시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임영문 목사(평화교회)도 전광훈 목사의 반정부 집회를 지지했던 목사들이 모인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예배 방식을 ‘비대면’으로 신설해서 강요하는 건 정교분리 원칙에 위배되고,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도 어긋난다”라며, 정부의 조처를 ‘교회 차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교회와 인터콥의 이러한 몰상식적이고 반사회적인 모습은, 어려운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정부의 비대면 예배 방침을 준수하는 한국 교회의 선량한 목사들과 교인들마져 ‘한통속’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마치 ‘악한 누룩’과 같은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BTJ열방센터 집회 참석자들은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세계로교회 교인들은 방역 수칙을 준수하길 바란다.

나는 정통에 속한 목사와 교인들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우선, 이들이 외치는 ‘양심의 자유’, ‘저항’, ‘평등 원칙’, ‘차별’이라는 단어는 필자가 가부장적 총신 합동 교단에 머물면서 계속 외쳐댔던 말이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엄중한 시기에 약자와 여성을 함부로 차별해왔던 목사들의 입에서 저런 용어를 듣게 되니, 기가 막혀 헛웃음만 나온다.

내가 ‘평등’을 외치며 저항할 때, 저들은 “여자가 교회에서 침묵하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 “어디서 여자 주제에!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말이 많아?”라며 윽박지르거나 수수방관하던 자들이었다. 교회 안에 있는 약자와 여성을 함부로 차별했던 자들의 입에서 저런 단어가 튀어나오는 걸 보니, 자신들이 맘껏 누려왔던 위세와 위용에 금이라도 갔나 보다. 가부장 신학과 교리를 관철할 때는 ‘양심의 자유’, ‘평등 원칙’, ‘저항’에 해당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성경적’이니 ‘진리’니, ‘남녀질서’를 운운하고 정죄한 후 내쫓고 짓밟더니, 정부가 코로나 3차 대유행 시기에 교회의 비대면 예배를 권고하는건 그리도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가.

저들은 코로나19 전염 위험으로 전 세계의 수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뉴스를 듣지도 못한 것일까. 저런 목사들은 중세 유럽의 페스트 비극을 알고 있긴 한가. 그 당시, 교회에 모여 기도하다가 페스트가 창궐하게 된 것을, 오히려 ‘인간의 타락’으로 퉁 치면서 속죄 교리만 읊어댔던 교회의 썩어빠진 작태를 말이다. 혹여나 중세 로마가톨릭이랑 다르다고 선 긋는 것이라면, 프로테스탄트의 ‘만인사제설’ 정신을 계승한다는 자칭 후예로서 뭐라 할 것인가? 루터와 칼빈의 ‘만인사제설’이 교회의 위계적 직분 구조를 타파하였고, 종교개혁의 평등사상이 현대 민주정치 발전에 이바지한 사실을 언제까지 모른 척할 건가?

보수 기독교단체 회원들이 2018년 3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구국과 자유통일을 위한 3·1절 한국교회 회개의 금식기도 대성회 및 범국민대회’를 열고 있다.
보수 기독교단체 회원들이 2018년 3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구국과 자유통일을 위한 3·1절 한국교회 회개의 금식기도 대성회 및 범국민대회’를 열고 있다.ⓒ임화영 기자

기독교 근본주의의 특징은
비기독교적이며 종교 병리이다

박성철 박사는 『종교 중독과 기독교 파시즘』이라는 책에서, 작금의 보수 교단과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보이는 ‘교회지도자 숭배’, ‘교회의 사유화’, ‘추종자에 대한 학대’, ‘반대자에 대한 공격성’, 그리고 ‘편집증적 반공주의’를 기독교 근본주의의 특징으로 열거했다. 또 여기서 배태된 차별과 혐오, 폭력과 파시즘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배치되는 반기독교적인 것이며, 종교 병리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필자는 ‘자칭 선지자’인 전광훈 목사를 비롯하여 작금 주류인 보수기독교 소속 교단과 교회, 그리고 목사들이 쏟아내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높은 철벽과 철조망으로 외부와 차단한 채, 화려하게 지어놓은 ‘교회 왕국’과 같은 그림이 떠오른다고 한다.

예전에 한 왕은 교회 왕국 안에서 뭘 하든지 간섭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상호 우호 협약을 맺었다. 그 왕은 자격도 갖추지 않은 사람을 내세워 국정농단을 자행했으며,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 사람과 단체의 목줄을 끊었다. 또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이 수장되어 죽도록 방치했으며, 이웃 나라와의 굴욕 외교로 백성들의 인권을 함부로 했다. 이런 무능하고 사악한 왕과 협약을 맺은 교회는 자신들의 배 채우기에 급급해, 교회 왕국 안에서 약자와 여성을 차별하고 심지어 어린 여성들에게까지 성폭력을 저지른 목사를 비호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했다. 대형교회 세습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며 진리를 바꿔치기했고, 학력 위조로 대형교회 당회장 자리를 거머쥐었으며, ‘제자훈련’ 명분으로 교인에게 인분을 먹이는 등, 별 추악한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아왔다.

시간이 흐른 뒤, 인권과 공정, 평등과 남북평화를 외치는 새로운 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그동안 나라의 어떠한 부패와 불의에도 잠잠했던 교회 왕국의 우두머리 목사들과 신학 교수들이 떼로 몰려와 “빨갱이 왕을 끌어내리자”라며, 온갖 종교적인 말과 저급한 언어로 공격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그 나라에 전염병이 돌자, 교회 왕국에서 맘대로 하며 교인들을 ‘종교 노예’로 만들었던 목사들이 “전염병이 나돌 땐, 당분간 모여서 예배하는 걸 멈추고,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라는 영주의 권고에 반기를 들고, “교회를 탄압하지 말라”라며 종교전쟁이라도 벌이듯 난리를 피우는 모습 말이다.

누가 ‘양심의 자유’, ‘평등 원칙’,
‘저항’을 외칠 수 있는가?

나는 극우 목사들이 코로나19라는 엄중한 시기에 ‘교회 차별’을 외치는 건 반사회적, 비상식적, 비기독교적 객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또 이들이 ‘양심의 자유’, ‘평등 원칙’, ‘저항’을 외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현 정부가 ‘비대면 예배’를 권고하는 건 교회를 차별하고 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인과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것이며,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이 위험한 시기를 함께 극복해나가자는 취지임을 저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극우 목사들이 외친 ‘양심의 자유’에 대해 교회 헌법(대한예수교 장로교 합동총회, 1992) 제1장 1조에는 “양심의 주재는 하나님뿐이시라, 그가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위반되거나 과분한 교훈과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나니 그러므로 일반 인류는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즉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라고 쓰여 있다.

필자는 목사들이 적어도 ‘양심의 자유’를 누리고 싶으면 그를 외치기 전에, 교회 헌법이 규정한 대로 그간 교회가 약자와 여성의 양심의 자유를 짓밟고 권리를 침해한 죄악부터 회개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난 뒤에, 정부를 상대로 ‘양심의 자유’를 외칠 것을 권하는 바이다.

지난 2020년 8월 9일 열린 사랑제일교회 예배 모습.
지난 2020년 8월 9일 열린 사랑제일교회 예배 모습.ⓒ유튜브 캡쳐

극우 목사들이 외친 ‘평등 원칙’도 마찬가지다. 국회에서 발의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을 갖고서 ‘반동성애’와 ‘여성 안수 반대’ 등 온갖 차별 정당화 이론을 쏟아내며 거국적으로 반대해왔던 당사자들이, 이제와 ‘평등 원칙’을 내세우는 건 너무 낯 뜨겁고 쪽팔리는 일이 아닌가. 프로테스탄트들이 중세 로마가톨릭의 위세에 눌리지 않게 만든 종교개혁의 정신이, 신분 위계를 뒤집어 모든 인간의 존엄과 평등, 그리고 인간성 실현을 위해 가죽을 벗기는 정도의 모험과 고통을 감수한 ‘저항’의 몸부림이었음을 잊었는가!

여태까지 누리고 싶은 것 모두 누리며 교인들을 ‘눈먼 추종자’로 만들고, 약자와 여성에겐 차별과 불의, 혐오와 폭력을 저지른 목사들이 무슨 염치로 ‘양심의 자유’, ‘평등 원칙’, ‘저항’이라는 말을 쏟아내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젠 ‘기독교인’이라고 어디 가서 말하기조차 부끄러우니, 이런 수치심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자 이 땅에 오셨다. 예수님은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십자가에 내어주어 죄의 값을 지불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라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위한 새 계명을 주셨다. 예수님이 유일하게 욕하고 저주한 대상이 있었는데, 다름 아닌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잘 나갔던 종교지도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마 23:29-33).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진정한 권위는 수많은 종교적 단어로 포장된 정죄와 차별, 으름장과 객기의 언어가 아니라, 긍휼과 연민, 그리고 사랑과 희생의 실천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양심의 자유’, ‘평등 원칙’, ‘저항’이라는 말은 예수를 진실로 믿으며 살고자 몸부림치는 목사들이, 교회 안에서 소외되고 약한 지체들을 귀하게 여기며,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소리를 낼 때, 비로소 요구할 수 있는 무겁고 값비싼 단어라는 걸 명심하면 좋겠다.

강호숙 박사(기독인문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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