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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세상읽기] 자신의 기준과 가치를 지킨 여성 화가, 로사 보뇌르

2월입니다. 시간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흐른다고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흔들리지 않을 각오로 시작한 1월이 지난 것은 분명합니다. 물러졌을 결심을 다독이기 위해서 세상의 어떤 비난에도 자신의 기준과 가치를 지키며 살았던 여성 화가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느베르의 쟁기질  Ploughing in Nevers 1849
느베르의 쟁기질 Ploughing in Nevers 1849ⓒ오르세 미술관

프랑스 여성 화가 로사 보뇌르 (Rosa Bonheur/1822 ~ 1899)는 와인으로 유명한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초상화와 풍경화 화가였고 어머니는 피아노 교사였습니다. 보네르는 맏이였는데, 그의 집은 유대인 집안임에도 딸도 아들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훗날 보뇌르는 자신의 아버지는 ‘여자가 인류의 삶을 개선할 것’이고 ‘미래는 여자들의 것’이라도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시대를 앞선 아버지였지요.

보뇌르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몇 시간씩 연필을 들고 그림을 그렸지만, 글씨를 읽는 것을 배우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의 어머니는 알파벳이 들어간 동물 카드를 마련하고 거기에 맞는 동물을 찾게 하고 그리게 하면서 글자를 가르쳤습니다. 이후 보뇌르는 학교에 입학했지만 통제하기 어려운 성격때문에 학교 생활도 순탄치는 않았습니다.

11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12세 때 재봉사 견습생이 되는 것에 실패한 보뇌르를 아버지는 화가로 키우기로 마음먹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살아 있는 동물을 화실로 가져와서 동물을 그리는데 흥미를 느끼게 했고, 당시 미술학교 과정을 참고해서 집에서 그림을 지도했습니다.

14세가 되던 해부터 보뇌르는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일을 합니다. 파리 도살장에 가서 해부된 동물들과 뼈대를 공부하고 국립 수의협회를 찾아가 해부된 동물들을 살피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훗날 그가 그림과 조각을 제작할 때 귀중한 참고 자료가 되는데, 어린 나이에 그런 곳을 찾아, 눈을 부릅뜨고 관찰한 것을 보면 보뇌르는 대단한 성격과 의지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요?

말 시장 The Horse Fair 1852~1855 oil on canvas  244.5cm x 506.7cm
말 시장 The Horse Fair 1852~1855 oil on canvas 244.5cm x 506.7cmⓒMetropolitan Museum of Art

보뇌르는 1848년 파리 살롱전에 ‘느베르의 쟁기질’이라는 작품을 출품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1853년에는 ‘말 시장’이라는 작품을 출품해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그는 다음 해 영국 스코틀랜드로 여행을 떠나는데, 가는 도중에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게 됩니다. 여왕이 그의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보뇌르의 명성은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더 높았습니다.

명성을 얻은 보뇌르는 37세가 되던 해, 지금은 그의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퐁텐블루 근처의 성을 구입했습니다. 이후 평생 그곳에서 삽니다.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유명했던’ 여성 화가라는 평에 어울릴 만한 모습입니다.

1865년, 43세가 되던 해 보뇌르는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외젠 황후로부터 레종 드 뇌르 훈장을 받습니다. 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은 여성 화가는 그가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1894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으니까, 부에 이어 명예까지 손에 넣은 셈이지요. 보뇌르는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 콜롬비안 박람회에 출품했는데, 이를 계기로 그의 이름은 미국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스페인 노새 몰이꾼들 Muletiers espagnols traversent les Pyrénées 1857 oil on canvas 116.8cm x 200cm
피레네 산맥을 넘는 스페인 노새 몰이꾼들 Muletiers espagnols traversent les Pyrénées 1857 oil on canvas 116.8cm x 200cmⓒ기타

이외에도 그는 또 다른 일로 ‘19세기의 신여성’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보뇌르는 레즈비언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친구였던 나탈리 미카라는 여인과 40여 년 간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 레즈비언을 금지했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하면 그는 화가로서의 경력 전체를 걸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했던 셈입니다.

그는 바지와 셔츠, 타이를 입었는데, ‘일하기 편해서’라는 이유를 댔습니다.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보뇌르는 두 가지로 나뉘어 있는 사회적 성(性)을 거부한 것 같습니다. 짧은 머리에 담배 골초였던 그는 가족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자신을 ‘손자’나 동생들의 ‘형’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남자들에게만 부여됐던 힘과 자유에 대한 반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보뇌르는 남자가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性)의 구분에 의해 역할이 구분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을 한 것이지요.

안나 크롬프케의 로사 보뇌르 초상   Portrait of Rosa Bonheur by Anna Klumpke 1898 oil on canvas 117.2cm x 98.1cm
안나 크롬프케의 로사 보뇌르 초상 Portrait of Rosa Bonheur by Anna Klumpke 1898 oil on canvas 117.2cm x 98.1cmⓒMetropolitan Museum of Art

보뇌르는 평생 어떤 남자에게도 소속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주인은 그 자신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는 유일하게 관심 가지는 ‘수컷’이라곤 ‘황소’가 유일하다고 말했지만, 단 한 사람 아버지는 예외였습니다. 미카가 죽고 보뇌르는 미국 출신 화가 안나 크롬프케와 같이 삽니다. 안나는 그보다 34세 어렸습니다. 보뇌르는 일흔일곱 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자신보다 먼저 죽은 미카와 함께 묻혔지요. 유일한 상속인이 된 안나 역시 세상을 떠나고 그들과 함께 묻힙니다.

‘나는 미술과 결혼했고 미술은 내 남편이고 나의 세계이자 나의 꿈이고 내가 숨쉬는 공기’라고 했던 보뇌르는 20세기 페미니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서 희미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수컷’들의 훼방이었을까요? 혹시 흔들렸을 각오가 보뇌르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금 더 단단해졌습니다.

선동기 미술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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