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국가기관 최초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트랜스젠더 10명 중 6명 이상이 지난 1년간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트랜스젠더들은 출생 시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투표권·교육권·노동권 등을 침해받는 것은 물론, 시스젠더(cisgender, 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소한 일상까지 빼앗기고 있었다.

9일 인권위는 숙명여대 산학협력단(연구책임자 홍성수 교수) 연구용역을 통해 만 19세 이상 트랜스젠더 591명을 상대로 진행한 ‘혐오차별’ 실태 관련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트랜스젠더 대상 국내 최대 규모의 실태조사로, 기존 조사보다 두 배가량 되는 인원이 참가했다. 응답자에는 특정 성별로 정체화한 트랜스젠더 아니라 남성과 여성 외 성별로 정체화한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도 291명 참여했다.
조사 분야는 크게 ▲성별 정정 및 신분증 ▲가족생활 및 일상 ▲학교·교육 ▲고용·직장 ▲화장실 등 시설이용 ▲군대, 구금시설 등 국가기관 ▲의료적 조치 및 의료접근성 ▲기타 혐오차별 ▲건강 수준 등 9개다.
먼저 법적 성별 정정의 어려움과 성별 정체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신분증 때문에 발생하는 인권침해가 단적인 사례다. 법원에서 성별 정정을 하려면 생식능력 제거, 외과수술, 혼인 중이 아닐 것 등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조사에 따르면, 법적 성별 정정을 한 응답자는 8%에 불과했다. 응답자 86%는 의료적 조치비용(58.9%), 복잡한 법적 절차(40%), 건강상 부담(29.5%) 등 이유로 법적 성별 정정을 시도한 적이 없었다. 법적 성별 정정을 했거나 시도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 82명은 그 과정에서 성전환 의료적 조치와 관련한 요건 갖추기(78.1%), 서류 준비 및 작성(61%), 정확한 정보 찾기(47.6%), 법원 심리과정(31.7%), 가족들 반대(28.1%)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의료적 조치 및 의료접근성에서 발생하는 차별 문제도 법적 성별 정정을 어렵게 한다. 호르몬 요법, 외과수술 등 성별 정체성에 맞춰 변화하는 과정에 필요한 의료 조치들이 건강보험 적용제외 항목이어서 개인이 경제적 부담을 져야 하는 실정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의학교육의 부재, 의료인들의 혐오차별로 인한 접근권 침해 문제도 있다.
정신과 진단을 받지 않은 이유, 호르몬 요법을 받지 않거나 중단한 이유, 성전환 관련 외과적 수술을 받지 않는 이유에 비용 부담, 경제적 어려움, 주변 시선 등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신분증을 제시하는 순간 ‘커밍아웃’이 되기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은 투표 참여 등 기본권 침해는 물론 인터넷 가입과 주택 관련 계약 등 일상까지 포기해야 했다.
응답자들은 신분증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제시하는 의료기관 이용(21.5%), 담배구입이나 술집 등 방문(16.4%), 보험 가입 및 상담(15%), 은행 이용 및 상담(14.3%), 투표 참여(10.5%), 전화·인터넷 가입 및 변경(9.2%), 증명서 발급(8.5%), 주택 관련 계약(8.1%) 등의 일상적 용무를 할 때 부당한 대우를 받을까 봐 이를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지난해 국회의원 선거에서 응답자 19.5%(115명)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들 가운데 신분증 확인으로 출생 시 법적 성별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거나(27명), 신분증 확인으로 현장에서 주목받는 것이 두려워서(26명)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학교·교육에서, 고용·직장에서 발생하는 차별로 트랜스젠더들은 한참을 뒤처진 출발선에 서 있다. 특히 노동권 관련 차별은 궁극적으로 경제권과 노동권, 빈곤, 사회참여 그리고 전반적인 생활의 질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문제다.
응답자 67%는 중고등학교 수업 중 교사가 성 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들은 경험이 있고, 21.3%는 교사로부터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답했다. 대학교·대학원을 다닌 경험이 있는 469명은 교수 등이 수업 중(42.4%)에, 수업 외 시간(24.7%)에 성 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을 들은 경험이 있고, 14.9%는 한 가지 이상의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구직 활동 경험이 있는 469명 중 268명(57.1%)이 성별 정체성과 관련해 구직 포기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구직·채용 과정에서 외모 등이 남자 또는 여자답지 못하다는 반응(48.2%), 주민등록번호에 제시된 성별과 성별 표현의 불일치(37%), 출신학교 등을 기재해야 하는 지원서류 제출(27%) 시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직장에서 용모·말투 등이 남자 또는 여자답지 못하다고 반복적 지적(26.6%)을 당하고, 성별 정체성에 대한 불필요한 질문을 받고(17.1%), 본인의 성별 정체성을 동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8.9%), 성희롱 또는 성폭행(8.2%)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징병제 국가인 한국에서 군대 내 차별도 심각한 문제로 지목된다. 최근 변희수 전 하사가 복무 중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는 이유로 강제 전역당한 데 대해 인권위는 군 당국 측에 전역 취소 처분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출생 시 지정 성별이 남성인 응답자 259명 중 42.1%가 현재 군 복무 중이거나 군 복무를 마쳤다. 군 복무 경험이 있는 응답자들은 공동 샤워시설 이용 시(58.3%), 성 소수자 비하 발언 및 이를 용인하는 문화(54.6%), 성별 정체성이 알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52.8%)이 있다고 답했다. 관심사병으로 분류되거나(29.5%, 성희롱 또는 성폭력(12.4%)을 당했다고 답했다.
트랜스 여성은 여자 화장실을 이용하거나 짙은 화장을 하는 등의 문제로 범죄자가 되거나 오히려 혐오 주체로 지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들은 화장실 가는 것이 두려워 물조차 마시지 않고, 성별 정체성을 인식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자의 39.2%는 화장실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음료를 마시지 않거나 음식을 먹지 않으며, 37.2%가 멀더라도 남녀공용 또는 장애인 화장실, 인적이 드문 화장실을 이용했고, 36%는 화장실 이용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들은 사람들이 본인의 성별 정체성을 인지하게 하려면 여러 노력을 해야 하고(76.7%), 사람들이 본인의 성별 정체성을 본인이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보기 때문에 본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인식하고, 외모나 몸 때문에 본인의 성별 정체성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차별은 만연했다. 응답자의 65.3%가 지난 1년간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했다. 같은 기간 SNS를 포함한 인터넷(97.1%), 방송·언론( 87.3%), 드라마·영화 등 영상매체(76.1%)를 통해 혐오차별 표현 등을 접했다고 답했다.
연구진은 이 같은 혐오차별을 막기 위해서 차별금지 사유로 성별 정체성을 명시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현행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있지만, 인권위에 강제할 수단이 없어 차별 피해자를 실질적으로 구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아울러 혐오범죄와 혐오표현을 규제할 수 있는 법적 수단의 필요성도 지적됐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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