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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후] 안정민 연출 “할머니를 죽이지 않으면, 그의 죽음은 묘하게 남았을 것”

[공연후]막이 내린 후, 어떤 한 장면이라도 관객 가슴을 깊게 파고든 공연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공연이다. 좋은 공연은 막이 내린 후에도 긴 생명력을 갖는다. 그 건강한 생명력이 허공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활자로 정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기획이 시작됐다. 그 생생한 감동과 날 선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묶어 두기 위해서다. -편집자 주-

극단 푸른수염 안정민 연출가
극단 푸른수염 안정민 연출가ⓒ김세운

할머니의 거대한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아이, 그리고 동시에 '성기가 없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아쉬움을 먹고 자라야 했던 아이. 할머니의 이런 묘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여성은 어느 날 식칼로 할머니를 찌른다. 정적을 가르며 튀어나온 할머니의 표정은 의외로 평화롭다. 그리고 할머니는 말한다. "진즉에 내 몸속에 나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장면은 연극 '달걀의 일'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손녀 민채는 내면에 있던 가부장제 속 여성의 타래를 끊어낸다. 할머니를 물리적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을 표현한 게 아니라, 민채 내면에 존재하는 구습의 고리를 끊어내는 장면인 셈이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안정민 극작가는 "여성이 할머니를 찌르는 그 사건이 연극사에 처음 있는 사건"이라면서 "그래서 너무 힘들었고 용기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힘든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안 작가가 이 장면을 만들어 낸 이유는 조금 더 관객에게 보여주고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시도와 용기에 관객들이 응답했다. 네이버TV(1월 15일)를 통해 연극 '달걀의 일'이 한 차례 중계됐을 때, 2만2천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접속해 관람했다. 소극장이 수용할 수 있는 객석 수를 적게는 몇십 배, 많게는 몇백 배 뛰어넘은 것이다.

연극 ‘달걀의 일’
연극 ‘달걀의 일’ⓒ창작집단 푸른수염 제공

"성기가 없어서
불완전하고 묘했던 사랑"

연극 '달걀의 일'은 고고학자인 민채가 고향 집 앞에 놓인 무덤을 발굴하기 위해 시민동의서를 받으러 다니게 되고, 이 과정에서 자신의 유년 기억과 마주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끔찍한 기억을 복기하려 애쓰는 민채와 달리, 주변 사람들은 그 기억을 감추려는데 급급하다. 심지어 할머니도 기억하려 애쓰지 말고 잊고 살라고 한다. 너는 여자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사는 게 편할 거라는 할머니의 뜨겁고 시린 언어들이 시종일관 민채의 심장을 때린다.

안 작가는 "'달걀의 일'은 거의 다 제 이야기"라면서 "제가 겪었던 실제 이야기들이 많이 녹아 있다"고 했다. 작품을 쓰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그는 어떤 계기가 있어서 써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언젠간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고,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했다.

"사회는 누가 피해를 보면 누가 피해자인지 규정하고 싶어 한다. 저는 안 그러려고 노력했다. 제 이야기를 폭로하거나 한탄하거나 그런 서사로 풀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그런 여성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달걀의 일'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어린 민채에게 신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로 신라 시대 때 새 요괴에 관한 이야기다. 이 요괴는 여인으로 변신해 동네 남자들을 유혹하고 심장을 빼먹는다. 결국 한 장군이 새 요괴를 죽이고 무덤에 파묻었다. 꼬마 민채는 어렸을 때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이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새 요괴 신화를 담고 있는 무덤이 바로 민채 집 앞에 있는 거대한 무덤이다. 고고학자가 된 민채는 이 무덤에서 수상한 문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어쩌면 이 무덤이 새 요괴가 아니라 여신의 무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할머니의 신화는 어쩌면 틀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민채는 이제 할머니의 신화가 불편하다.

내가 사랑하는 할머니의 구습까지 안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대부분은 나의 할머니와 엄마의 아픈 연대기를 안고 살아간다. 아픈 연대기도 고스란히 내 품에 박힌다. 너무 아프다. '이러고 어떻게 사셨어요' 싶다. 어머니들의 신화를 품고 사는 것만큼, 낡은 풍습을 잘라내는 일 역시 쉽지 않다. 할머니의 신화를 잘라내는 작업은 제 살을 잘라내는 것만큼 아픈 일이다. 민채도 그랬을 것이다.

극단 푸른수염 안정민 연출가
극단 푸른수염 안정민 연출가ⓒ김세운

안 작가는 '달걀의 일'에 나오는 할머니와 자신의 외할머니가 거의 비슷하다고 했다. 특히 그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의 죽음을 소화하기 어려웠다고 회상했다. 그는 "(할머니의 죽음 후) 내가 이렇게 아팠던 것은 뭐랄까, 어떤 외부에 의한 피해가 아니라 내부에 의한 피해도 많았던 것 같다"면서 "제 안에 이렇게 타래를 물고 늘어지는 여성의 역사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우리 할머니가 실천해야 했던 가부장 사회 속에서의 여성이 할머니 자신만이 아니라 엄마, 나, 내가 딸을 낳는다면 딸까지 이렇게 끈끈히 연결되는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엄마랑 따로 독립해서 나 혼자서 할머니를 찾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고향에 갔는데 사촌 언니를 만났고 오랜만에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러면서 왠지 내가 이 타래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오는 길에 경주에 들른 안 작가는 무덤을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아, 내가 내 안에 할머니를 죽여야 하는 거구나.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내가 할머니를 죽이지 않으면, 할머니의 죽음은 언제나 묘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구나."

그렇게 탄생한 장면이 바로 맨 앞에 언급했던 할머니를 죽이는 장면이다. 보는 사람에게도 쉽지 않았던 장면이었던 만큼 만드는 이들에게도 쉽지 않았다. 안 작가는 이 장면을 몇 번이고 쓰고 지우길 반복했다. 그는 "활자를 제 눈으로 보기 힘들었다"고 떠올렸다.

"첫째로 힘들었던 이유는 할머니를 죽여야 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약간 유치한 자아로서 '나는 미움 받을 거야'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렇게 다정하고 아무 죄 없는 할머니를 죽여? 네가 무슨 권리로 할머니를 죽여? 이런 마음이 제 깊이 있었다. 또 '왜 결국 죽어야 하는 사람은 여자냐' 이렇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장면이 오해된다면 어쩌면 나는 작가로서 너무 많은 미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적었기 때문에 무서웠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는 "하지만 아무리 미움을 받아도 일단 써야 하는 일, 해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새별 언니랑 정미 선배님 둘 다, 정말 이 장면을 힘들게 느꼈을 텐데도 내가 왜 이 장면을 해야 했고, 이걸 통해서 만들고 싶은 사건이 뭔지 이해해주시고 용기를 주셨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언제나 혼자였던 나, 안정민
'달걀의 일' 이해해주는 관객에게서
오히려 위안 얻어

극에는 여성으로서 해선 안 될 '금기'들이 등장한다. 우선 무덤에 잠들어 있는 것은 새 요괴 신화가 첫 번째고, 담벼락에서 벌어졌던 어떤 사건이 두 번째다. 모든 인물은 민채에게 말한다. '자꾸 알려고 하지마, 그냥 잊고 살아, 그게 더 편해!'

그런데도 민채는 금기에 접근한다. 문득 궁금해진다. 어느 한 명도 민채를 지지해주거나 연대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저런 용기가 날 수 있을까 싶다. 민채를 계속 움직이게 만든 동력은 민채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

안 작가는 "어떤 폭행의 이야기 속에서는 연대가 있다. 그건 정말 좋은 기회, 인연들, 감사한 일인 것 같다"면서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 분은 혼자일 것이다. 그 여성분들이 혼자서 헤쳐나가고 혼자서 이겨낸 기억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에 달걀들 불이 켜지는데 이것은 달걀을 깨지 못했던 여성들을 상징한다. 민채가 스스로 할머니를 찌르고 (무덤 앞에서) 발굴하고 그랬을 때 여성들은 더 연대를 할 수 있고 더 자기 서사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단 푸른수염 안정민 연출가
극단 푸른수염 안정민 연출가ⓒ김세운

연극 '달걀의 일'이 끝난지 3주가 넘었다. 안 작가는 "여성으로서의 저의 삶엔 연대가 없었고 연대를 받아보지 못했다. 저는 언제나 혼자였던 것 같다"고 했지만, 이번 공연을 통해서 연대 받고 위로받았다고 했다. 연극을 함께 보는 2만2천3백 명 사이에서 댓글로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고 때론 마음을 이해받았기 때문이다.

"제가 한 번쯤 나에 대해 고백하고, 이 작품을 하고 싶었던 것은 여성 간의 연대였던 것 같다. 그리고 여성이 자기 안에 할머니를 돌아보고 끊을 수 있는 용기를 나눠볼 수 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여성 관객들과 연대하는 공간으로서 극장이 되는 것을 원했고 프로덕션 안에서도 여성 간의 연대가 제게 많은 힘이 됐다."

안 작가에게 무대는 '사라지고 잊힐 뻔한 것을 만질 수 있는 공간'이다. 그는 "사라져선 안 되는 데 사라지는 것이 있는 것 같다"면서 "연극이라는 공간은 저게 마치 천연덕스럽게 있었던 것처럼 얘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라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에 관해서 이야기 한 '고독한 목욕', 제주 예멘 난민들을 인터뷰 한 후 난민의 존재와 공감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 '이방인의 만찬-난민 연습', 한국 신화를 판소리 음악극으로 풀어낸 '당곰 이야기' 등 극단 푸른수염은 잊히면 안 되는 이야기에 계속 호흡을 불어 넣고 있다.

안 작가는 '달걀의 일' 연출의 말을 통해서 "오래된 이야기가 마음에 안 들면 새로운 이야기를 쓰면 된다"고 했다. 그가 쓴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임에도 원래 우리 곁에 존재했던 이야기처럼 친숙하다. 원래 내 이야기였던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의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기대되는 이유다.

할머니와 엄마가 우리 딸들에게 준 '묘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마지막에 안정민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존재를 긍정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치자면, 저는 앞에 형용사가 붙지 않는 완전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여자니까', '여자라서'라는 조건이 언제나 달렸기 때문이다. 많은 여성이 그럴 거라 생각한다. 조건이 늘 달리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긍정된 경험이 없었던 거다.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불리한 조건 안에서 여자들은 성취한다. 성취도 공평하게 평가받지 못한다. 이 속에서 여성분들이 해나가는 성취는 정말 대단하고 힘이 세다고 생각한다."

극단 '푸른수염은' 오는 6월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 '뜻밖의 여자-탈연습' 선보일 예정이다.

김세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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