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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의 종말] 식량 증산을 위한 녹색혁명은 정말 구원이었나?

과거 쌀 자급을 위해 모두가 바지 가랑이를 걷어 붙이고 모를 내던 시절이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바지를 걷고 논에 들어가 모를 내던 흑백 사진이 기억난다. 그가 논두렁에 앉아 촌로 (村老)들과 막걸리를 나누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어린 날의 그 기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훌륭한 지도자로 여기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선 밥 먹는 일을 해결해야 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희구(希求)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졸업반 시절 장래 희망을 말하는 시간에 박 전 대통령 같은 정치가가 되겠다고 서슴없이 말했던 것 같다.

경기도 김포시 농민에게 막걸리를 권하는 박정희. 1962.06.03
경기도 김포시 농민에게 막걸리를 권하는 박정희. 1962.06.03ⓒ사진 = 농림축산식품부

그 시절 논 농사 여섯 마지기를 지어 나온 소출 중 대여섯 가마를 지주에게 주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남은 예닐곱 가마로 여섯 식구가 일 년을 버텨야 했다. 당시는 ‘양석(兩石)’이라고 해서, 논 한 마지기 당 쌀 두 가마가 평균치로 생산되었다. 당시 심었던 쌀 품종은 대개 ‘아끼바레’(秋晴벼)라는 일본 품종이었고 더러는 재래 벼인 ‘다마금(多摩錦)’을 심었다. 물론 가뭄으로 피해를 입거나 물난리가 나면 그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식량은 늘 부족했다.

당시 상태가 지속된다면 만성적 식량부족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해외 원조로 들여오던 쌀이 끊기게 되자, 박정희는 쌀 자급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에게 정권의 안정은 쌀 자급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간척지를 만들었다. 그리곤 거기에 농민들을 집단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했다. 1961년 ‘섬진강 칠보댐 건설’과 1963년 ‘계화도 간척사업’이 대표적이다.

1963년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강 어귀에서 대규모 간척 공사가 시작 되었다. 시작 시점엔 건설부가 방조제와 저수지 공사를 맡아 했고, 이어 1973년에는 농수산부가 ‘계화도 지구 대단위 농업 종합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내부 공사를 해 1979년에 끝을 맺었다. 이 사업으로 계화도와 육지를 이은 2개의 방조제를 건설돼 3,968ha(1천2백만평)의 간척지를 만들어졌다. 해당 간척지에는 2,708ha(8백12만4천평)의 농토가 일궈졌다.

또 바닷물이 들어오는 하천에 둑을 막아 담수호를 만들고 농업 용수를 확보하여 산간지에서도 쌀농사를 짓게 했다. 그게 경기도 평택, 화성과 충남 아산 지역이다. 1974년 준공된 남양만 방조제, 아산만 방조제, 1979년 완공된 삽교천 방조제는 아시아개발은행(IBRD) 자금으로 이루어졌다. 금강·평택 지구에 대한 차관 협정이 1969년 5월 체결돼, 한국 농지 개발 사상 처음으로 1970년 2월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이 사업의 효과적 추진을 위해 정부에서는 1970년 농촌근대화촉진법을 제정했고, 농업진흥공사(지금의 농어촌공사)를 설치한 후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맨 처음으로 추진된 금강·평택 지구대단위농업종합개발사업은 관개·배수·개간·간척 등의 사업이 종합적으로 실시되었으며, 1972년 영산강(1)지구, 1974년 경주지구와 계화도지구, 1975년 창녕·임진·삽교천 지구, 1977년 남강지구와 미호천(1)지구, 1978년 낙동강지구와 영산강지구가 계속해서 착공되었다.

이로써 1977년 대망의 쌀 4천만석 생산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 기록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 3천 8백만 섬 정도인데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마(魔)의 3천8백만섬이라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정희는 자신의 숙원이던 4천만석 돌파를 보지 못한 것이 된다.

고구마나 심어야 했던 산간 구릉지와 바닷물이 들어오던 넓은 간석지가 기름진 논으로 변했다. 녹색혁명의 일단은 이렇게 토지 확보에 있었다.

전북 부안 간척지 계화도에서 첫 모내기 하는 장면. (동영상)1978년
전북 부안 간척지 계화도에서 첫 모내기 하는 장면. (동영상)1978년ⓒ사진 제공 = 국가기록원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쌀 자급 정책은 농지 확보만은 아니었다. 매년 몇 백만 섬을 먹어 치운다는 쥐 퇴치를 목적으로 한, ‘쥐 잡기 운동’도 있었다. 농가에 쥐약을 나누어주고 일시에 약을 놓아 쥐를 잡았다. 그러나 죽으라는 쥐는 용케 살아남고 누렁이가 쓰러지거나 닭이 뻣뻣하게 굳은 채 발견되곤 했다. 아이들은 등교할 때 신발 주머니에 쥐꼬리를 넣어 학교로 가져가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했다.

또 모내기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당시 농촌 지역 전봇대엔 소주밀식(小株密植)이라고 한글로 적혀 있어, 그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아이들끼리 해석이 분분했다. 당시엔 못줄의 간격을 넓게 하고 볏묘를 많이 잡아(15묘) 심는 것이 관행이었다. 소주밀식을 알린 것은 이 방식을 바꾸라는 뜻이었다. 정부는 농업학자들의 조언을 받아 볏묘 수는 절반 정도로 줄이고 심는 간격은 촘촘히 하라고 권장했다. 이는 비료공업의 성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건답직파(乾畓直播)였다. 마른 논에는 볍씨를 바로 뿌려(직파) 농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이런 구호는 농촌 사회 곳곳에 붙어있었다.

그 뿐 아니었다. 혼식(混食)과 분식(粉食)을 장려하기도 했다. 그래서 학교에선 혼식 도시락 검사를 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부잣집 아이인 내 짝은 늘 흰 밥에 검은 콩 몇 알을 올려놓아 검사를 피하곤 했다. 영양학자들은 앞 다투어 보리밥이 영양가가 높다고 선전을 해 댔다. 밀가루 수입이 늘어나고, 커다란 사기 밥 사발이 작은 스테인리스 공기로 바뀐 것도 이 시절의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쌀 자급을 위한 정책이라고 했지만, 한편으론 국민들을 결집시키는 수단으로도 활용되었다.

한국 녹색혁명(green revolution, 개발도상국이 식량 생산력의 급속한 증대를 위해 추진하는 농업 상의 여러 개혁을 가리키는 말)의 백미(白眉)는 ‘통일계 벼 품종의 개발’이었다. 당시 주종을 이뤘던 아끼바레는 1960년 일본에서 개발된 품종이다. 아끼바레는 초장(草丈,식물의 길이)이 길어 쓰러짐에 약하고 벼 목 당 알 수가 적어(당시, 필자가 새 쫓으면서 세어보니 많아야 97립 정도였다) 마지기당 두 가마 소출이 일반적이었다. 당시 정부가 심으라고 권장한 통일계는 초장이 짧아 쓰러짐에 강하고 일부 품종은 벼 목 당 알 수가 최고150여립 정도로 풍산성(豐産性, 꽃눈이 잘 생기고 많이 피며, 열매가 많이 맺히는 작물의 성질)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여전히 재래 아끼바레를 심는 등 정책에 잘 따르지 않았다. 이는 농민들이 심던 품종을 심으려고 해서기도 하지만, 아끼바레가 좋은 품질의 쌀을 내는데다 초장이 길어 초가집 이엉 엮기에도 적합했고 나무가 적은 평야지에선 연료와 거름으로 쓰기에도 좋았던 때문이다. 정부는 이것을 바꾸기 위해 농가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고, 메탄 가스로 불을 때겠다는 둥 요란을 떨기도 했다.

그래도 농민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정부는 정책을 억지로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그 사례로 대표적인 것이 ‘못자리 밟아버리기’다. 공무원들은 가가호호 조사하여 통일계 벼로 모를 키우지 않았으면 장화를 신고 못자리를 밟아버리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또 통일계 벼가 아닌 벼는 수매에서 제외 되었다. 우리 집은 수매할 양이 없어 항상 아끼바레로 농사를 지었지만, 수매를 해야했던 이웃 농가들은 병해에 약한 통일계 벼를 심고 몸살을 앓았다.

1970년대 한 농민의 통일벼 못자리 작업 광경. 오른쪽으로는 다 자란 보리 이삭이 보인다. 광주 광산구 평동 이태백 씨 소장 사진.
1970년대 한 농민의 통일벼 못자리 작업 광경. 오른쪽으로는 다 자란 보리 이삭이 보인다. 광주 광산구 평동 이태백 씨 소장 사진.ⓒ사진 = ‘한국 근ㆍ현대사 사진 모음 사이트


통일계의 볍씨 개발은 희농1호로부터 시작 된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가져왔으나 실패했고, 필리핀에서 교잡한 통일벼와 뒤이은 유신 등이 기적의 볍씨로 소개 됐으나 모두 실패한 걸로 보인다. 뒤를 이어 박노풍씨가 개발 했다는 노풍 품종도 도열병에 취약점이 발견 됐으나 밀어붙이다, 1979년 ‘노풍 파동’이 일어 통일계 품종의 몰락과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 시절 녹색혁명을 주도했던 관료나 학자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이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통일계 벼 도입은 그 필요성을 농민들과 공유하지 않은 채 강제 진압 형식으로 진행됐고, 쌀 생산량 증대에만 초점을 두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자연 환경과 농업 환경 등에 여러 차례 적응시켜 보는 등 준비가 미흡했고 농민들의 동의도 없어 정책이 성과주의로 흘러 버린 것이다.

녹색혁명은 농민들을 농촌의 변화로부터 지켜내지 못했다. 새로운 품종에 맞춰 농업의 기계화가 촉진됐다. 전통적 방식으로 모내기와 추수를 하던 농민들은 모 심는 기계와 수확 기계 그리고 땅을 갈아엎는 트랙터를 도입해야 했고 그 비용은 농가 부채로 쌓여갔다. 농기계가 없으면 너른 들판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급격한 이농 현상은 다시 농기계를 필요로 했다. 또한 통일계 신품종은 병충해에도 약해 여러 번 농약을 쳐야 했고, 이 때문에 농약 중독 사망자가 늘었다. 정부가 억지로 도입한 새 농사법과 품종에 적응 못한 농민들은 농촌 구조조정의 희생양이 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언급한 ‘노풍 피해’였다. 당시 1단보(300평)에 450kg의 벼가 생산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1977년 호남작물시험장에서 개발된 이리 327호(노풍 벼)는 750kg이나 소출이 났다. 그런데 하필이면 보급된 이듬 해 바로 목도 열병이 격발하여 대흉작이 되었다. 또 같은 통일계 품종으로 1977년 영남작물시험장에서 개발된 밀양29호(내경 벼)도 통일계 벼 도열병 피해 당시 노풍벼에 버금가는 피해를 냈다. 이는 신품종을 만든 연구자·과학자 이름을 벼 이름에 붙여 명예를 주려던 박정희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당사자들에게 희대의 불명예를 안겼다.

노풍 파동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해, 유신 시대의 종말을 앞당기는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박노풍씨는 노풍벼가 도열병에 약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시험 재배를 먼저 할 것을 상급 기관에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고 밝혔다. 결국 노풍 피해는 쌀의 자급도를 떨어트리고 수입쌀 도입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잠재 돼 있던 농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기 시작 했다. 가톨릭농민회는 1978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전국 농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후 그 결과를 바탕으로 피해 보상 운동을 전개했다. 1979년 1월23일 충남 홍성군 홍성읍 노풍 피해 농민들은 읍사무소로 몰려가 3시간 동안 집단 농성을 했고, 전북 완주군 고산 천주교회(담임 문규현 신부)도 3월 17~26일 간 비봉·고산·운주 등 3개 면 11개 리 164 농가의 피해 조사를 한 다음 정부 당국의 보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했다. 뿐만 아니라 각지의 기독교 농민회와 자주농들도 피해 보상 집회에 나섰다.

“농민운동을 하며 처음으로 가장 크게 당국과 싸운 일은 노풍 피해보상 투쟁이었다. 노풍은 통일벼 계통의 개량형 벼품종이었다. 오직 식량증산에 눈이 멀어 있던 유신정권은 1978년도에 검증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신품종을 농가에 강제적으로, 그것도 대대적으로 보급했고, 그해 여름 노풍 재배 농가는 대규모의 병충해가 발생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한 해 농사를 망친 농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전국에서 최초로 임실성당에서 노풍피해보상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신태근이 주도적으로 조직한 이 기도회는 전국적인 보상 투쟁의 봉화가 되었고 특히 전북 지역 농민 운동의 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기도회에 참석했던 전북 20여 곳의 신부들이 각자 자기 지역에 돌아가 농민 운동의 불씨를 지폈던 것이다. 작은 임실 지역이 농민 운동의 성지로 불리게 된 계기였다.” - 한국농정, ‘끝내 희망은 농업에 있다’, 2013.02.18

이처럼 전국에서 노풍 피해 보상 투쟁이 일어난 것은 녹색 혁명의 진행 과정 민주적이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 강제적으로 종자를 보급하고 다른 품종을 파종한 못자리를 훼손하는 등 절차에 문제가 많았다. 보상을 하는 과정도 비민주적이며 균등하지 못했다고 한다.

농민들이 트랙터 2대로 수확을 앞둔 논 6백평을 갈아엎고 있다. 80kg 나락 15섬을 소출할 수 있는 논을 갈아엎은 농민은 “농사 지은지 20년만에 나락 서 있는 논에 트랙터를 몰고 들어가기는 처음”이라며 “논에 들어가는데 마음이 울컥하고 답답했다”고 하소연했다.2015.10.20
농민들이 트랙터 2대로 수확을 앞둔 논 6백평을 갈아엎고 있다. 80kg 나락 15섬을 소출할 수 있는 논을 갈아엎은 농민은 “농사 지은지 20년만에 나락 서 있는 논에 트랙터를 몰고 들어가기는 처음”이라며 “논에 들어가는데 마음이 울컥하고 답답했다”고 하소연했다.2015.10.20ⓒ김주형 기자

한국의 녹색혁명은 그간 찰기 있는 쌀밥을 먹어 온 한국 사람들이 푸석한 안남미(安南米)와 같은 미질의 통일계 벼에 대한 거부감으로 미군 PX를 통해 흘러나오는 칼로스 쌀(Calrose rice)을 질 좋은 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기현상을 발생 시켰다. 이러다보니 국민들의 수입쌀에 대한 거부감까지 절로 줄어들었다.

또 이 녹색혁명의 근간에는 화학비료가 있다. 현재 우리 농토를 산성화시킨 주범이 바로 화학비료다. 녹색혁명은 복합비료를 탄생시키고 농토를 망가트리는 동시에 화학공업의 성장을 이끌어 냈다. 결국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단위당 가장 많은 비료를 뿌려대는 나라가 됐다. 과다한 비료의 사용은 쌀의 품질을 떨어트리기도 한다.

군대식으로 밀어붙이기로 추진한 농업 정책이 가져온 폐해는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농민들의 위기감도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우리 농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반성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입이 닳도록 칭송해 마지않는 녹색혁명의 결과가 정확히 분석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녹색혁명으로 농촌이 잘살게 되고 쌀의 자급이 이뤄진 것으로만 미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잡을 때가 되었다.

역대 정권은 쌀 수입에 대한 입장은 농민들과 같이 했다. 그러나 농업정책은 반대 방향으로 진행했다. 녹색혁명 조차도 그러했다. 일부 농민들을 제외한 누구도 이런 정책 방향에 대해 깊이있는 성찰을 하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쌀 수입개방은 우리 농사를 종말로 몰아넣고야 말았다.

한도숙 전국농민회총연맹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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