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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새해에는 그 누구도 인내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기를

설날도 지났으니 좀 늦었지만 새해 결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새해를 맞아 술도 끊고, 담배도 끊고, 운동도 꼬박꼬박 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게 될 리가 있나? 길어야 한 달 만에 새해 결심은 다음해로 넘어간다. 아마 지금쯤이면 새해 결심 대부분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이건 뭐 너무 오랫동안 이랬던 거라서 신선한 이야깃거리가 안 된다.

자, 지금부터는 조금 신선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새해 결심은 늘 안 지켜질까? 내가 못나서? 혹은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만약 그런 이유라면 전 세계 민중들의 90% 이상이 새해 결심을 못 지키는 이유를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90% 이상(‘99% 이상’이라고 쓰려다가 좀 줄였다)이 결심을 못 지킨다면 그건 결심을 못 지키는 게 정상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참을성이 없다’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 거다.

그래서 이 문제는 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 참을성이 없는 게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관점, 즉 그게 정상이라는 관점이 필요하다.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심리학과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Baumeister) 교수가 정립했고 인도 출신 행동경제학자 센딜 멀레이너선(Sendhil Mullainathan) 하버드 대학교 교수가 발전시킨 ‘자아고갈 이론’이 이 문제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참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아고갈 이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사람이 무언가를 인내할 때 물리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인’ 에너지다. 흔히 정신력을 사용할 때에는 물리적인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육체를 사용 할 때처럼 정신을 사용할 때에도 물리적인 에너지가 소모된다.

예를 들어 사고 싶은 것을 참는 경우를 보자. 무언가 너무 사고 싶은데 돈이 없다. 그래서 한참을 인내하다가 결국 참다못해 신용카드를 긁었다. 그걸 보고 부모님은 “으이그, 내가 저걸 잘 못 키웠어. 저렇게 인내심이 없어서야”라며 혀를 끌끌 차지만 이건 좀 달리 봐야 하는 문제다.

사고 싶은 것을 한참 참다보면 몸 안의 물리적 에너지가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물리적 에너지가 고갈되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순간이 닥친다. 그래서 “너는 왜 그것도 못 참니!”라고 닦달하기 전에 상대의 에너지가 얼마나 남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제아무리 여포나 항우라도 에너지가 고갈되면 칼을 휘두를 힘이 없듯이, 제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도 에너지가 고갈되면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다.

다이어트 결심이 밤 10시 이후 와르르 무너지는 이유도 이 이론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먹고 싶은 것을 꾹꾹 참는 데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다이어트는 그 에너지를 제한하는 행위다. 그나마 밤의 휴식 후 에너지가 남아있는 오전이나 낮에는 버틸 만하지만 밤이 되면 에너지는 고갈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에너지는 추상적인 정신력이 아니라 고갈되면 보충해줘야 하는 물리적인 에너지다. 바우마이스터가 인내력을 연료(fuel)에 비유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연료건 더 많이 사용할수록 더 빨리 바닥을 드러내는 법이다.

그래서 바우마이스터는 정신력이 고갈됐을 때 연료 삼아 당분을 보충하라고 조언한다. 그런데 어라? 이러면 다이어트는 나가리다! 애주가인 나는 술을 줄여보겠다며 참다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초콜릿과 사탕을 왕창 먹는 방법을 사용했다. 간을 지키고 뱃살을 늘리는 방식을 취한 격인데 솔직히 이게 건강에 도움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빈곤을 인내하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는 빚 이야기를 해보자. 많은 민중들이 빚에 쪼들리며 살아간다. 신용불량자도 부지기수다. 반면 부유한 사람들은 자산이나 부채 관리를 매우 잘 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혹자는 “역시 빚 관리를 잘 할 만큼 정신력이 있으니 부자가 되는 거야”라고 부자를 칭송하거나, “저 봐, 가난한 주제에 저렇게 생각 없이 빚을 쓰니 망하는 거야!”라고 빈자를 비난한다.

그런데 이건 본말이 전도된 분석이다. 인내심이 강해서 부자가 된 게 아니라 부자여서 인내심이 강한 것이고, 인내심이 부족해서 빈자가 된 게 아니라 빈자여서 인내심이 고갈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은 평소 인내심을 발휘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할 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 결정적 순간에 충분한 인내심을 발휘할 여유가 있다.

반면 가난한 민중들은 평소 삶 자체가 인내의 연속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 순간 인내해야 겨우 살아남는다.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광고(“나를 빨리 구매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는 인내심을 더 고갈시킨다.

인내가 필요한 결정적 순간에 가난한 민중들이 신용불량자의 길로 들어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너지가 고갈됐기 때문이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라거나, 멋진 옷을 입으라는 유혹이 넘쳐난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유혹을 계속해서 참아야 한다. 하지만 참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면 사람들의 뇌는 많은 수고를 하고, 수고가 반복될수록 의지력은 소진된다.”

물론 바우마이스터는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는 인내심을 키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의 이야기이지 삶 자체가 인내의 연속이어야 하는 민중들에게 “훈련을 통해 인내심을 키워라”고 강요하는 것은 심각한 폭력이다. 최소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가 없는 세상 정도는 만들어 놓은 뒤 인내심을 운운하는 게 인간에 대한 예의 아닌가?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세상을 떠난 한 롯데택배 노동자는 매일 아침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4∼15시간 동안 일을 했다. 34세의 이 젊은이는 7월 1일 입사한 이후 고작 6개월 만에 무려 20kg이나 몸무게가 줄었다고 한다.

전국택배연대노조와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는 23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글로벌로지스 본사 앞에서 롯데택배 택배노동자 사망사고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해당 택배사에 대한 규탄과 과로사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전국택배연대노조와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는 23일 오후 서울 중구 롯데글로벌로지스 본사 앞에서 롯데택배 택배노동자 사망사고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해당 택배사에 대한 규탄과 과로사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

이게 한국 노동자의 현실이다. 이런 노동자들에게 “잘 살려면 더 참았어야지! 더 인내를 하고, 더 노오력을 했어야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자가 있을까? 나는 묻고 싶다. 도대체 뭘 얼마나 더 참아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건가? 이렇게 살다가 인내심이 고갈돼 빚이라도 지면 “가난한 것들이 빚이나 지고 말이야”라며 손가락질을 한다. 뭐 이런 엿 같은 세상이 다 있단 말인가?

사탕이나 초콜릿을 왕창 먹을 바에는 술을 먹는 게 낫겠다 싶어(응?) 올해 새해 목표에 술 줄이기는 넣지 않았다. 대신 소박하지만 당연한 소망을 가슴에 품는다.

새해에는 부디, 그 어떤 민중들도 생존을 위해 극기(克己)하지 않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누구나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삶에 치이지 않고, 매 순간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가 없는 2021년을 꿈꾼다.

이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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