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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자라는 아빠] 아빠가 아직은 숨기고 싶은 이야기

세 식구가 불을 끄고 누운 금요일 밤 10시, 아이는 엄마와 낮에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 듯 내게 물었습니다.

수현:아빠. 아빠는 옛날에 ‘대머리’에 ‘거지’ 였어?
나:뭐라고?! 거지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럼 물건이 없었어?
아내:물건은 좀 없었어.
아, 물건만 거지였구나?

아니, 그런데 대머리라는 말은 누구한테 들었어?
엄마가 말해주던데?
대머리가 아니라, 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 ‘빡빡머리’ 였다고 했지. 그리고 아빠가 지하에 살 때 몸에 곰팡이가 폈었고, 돈이 없어서 엄마가 밥을 자주 사줬다고 했지. 거지라고는 안 했거든?

수현아, 아빠가 대머리가 안 되길 바라는 게 좋을 거야. 아빠가 대머리가 되면 너도 커서 대머리 된다? 으하하!
대머리 싫어! 나 대머리 되는 거야?
아직은 몰라. 아빠의 아빠가 너무 젊을 때 돌아가시지만 않았으면 우리 집안에 대머리 유전자가 있는지 없는지 미리 알 수 있었을텐데 아쉽네. 아빠 이마가 점점 넓어지는지 앞으로 잘 지켜보는 수밖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셋은 어둠 속에서 낄낄 깔깔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그러다 대머리, 거지라는 표현은 듣는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 있어 안 쓰는 게 좋다는 설명도 곁들였더니 대략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아이를 어서 재워야 했기에 ‘이제 그만’이란 신호로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눴습니다. 캄캄한 방이 조용해졌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아이는, 엄마를 통해 아빠의 과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는 아기 때의 에피소드 뿐 아니라 아빠 엄마가 살아온 이야기 역시 흥미롭게 듣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들려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처음 아빠가 되었을 때의 고생담입니다. 아이 잘못은 하나도 없지만, 듣기에 따라 ‘나 때문에 아빠가 힘들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떤 시점부터 아빠였던 걸까요? 임신 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확인했을 때? 산부인과에서 초음파 사진과 심장 박동 소리로 처음 만났을 때? 어두컴컴한 가족 분만실에서 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을 때? 2주 간의 산후조리원 생활을 마친 후 본격적으로 아빠 역할을 시작했을 때?

아무튼 서른셋에 아빠가 되었고, 그 때는 모든 게 서툴고 부족했습니다. 당시 ‘아빠의 삶이란 어떤 것이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아이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삶”이라고 답할 정도였으니까요. 마치 직장에 출근하기도 전에 퇴근하고 싶은 것처럼, 혼자 아이를 보게 되는 날엔 아내가 외출하기도 전부터 그의 귀가를 기다렸습니다.

생후 40일 즈음의 수현이. 하품은 초보 아빠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
생후 40일 즈음의 수현이. 하품은 초보 아빠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었다.ⓒ사진 = 오창열

목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는 작은 아이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은 내게 ‘두려움’이었습니다. 다리가 두 개 뿐인 위태로운 의자에 앉은 것 같았습니다.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기저귀 가는 일이 어렵지 않았음에도, 아내가 없는 사이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로 이 여린 생명에게 탈이 날까 봐 불안했습니다. 빨리 시간이 흘러 아내가 돌아오기를, 그리고 아이가 얼른 자라기를, 그래서 마침내 육아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육아 해방’이 아니라 ‘육아 불안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아내는 며칠 간 지방 출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기간 직장에서 연차 휴가를 몰아 썼습니다. 그 덕에 생후 60일이 된 아기와 둘만 보내는 가을 휴가가 시작됐습니다. 낮과 밤 구분 없는 육아와 가사에 수면 부족과 피로 누적으로 지쳐갔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대화 나눌 사람도 하나 없으니 ‘육아 우울’이라 부를만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방긋 웃을 때만 나도 잠시 웃음이 났을 뿐 그 밖에는 기분이 가라앉아있는 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누가 들으면 겨우 며칠 가지고 엄살 부린다며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냉동실에 얼려둔 모유를 데워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안아 줬습니다. 아이는 맘카페에서 알려준 대로 청소기 소리, 백색 소음을 들려줘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24시간 아이를 보는데 교대할 사람이 없는 현실은 무척 괴로웠고 저를 외롭게 했습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다 넋이 나가서는 아이 울음소리가 마치 먼 곳의 종소리처럼 은은하고 아련하게 들려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오전 3시에 우는 아이를 달래려 중탕한 젖병이 너무 데워져서 눈물과 짜증이 났습니다. ‘내가 이걸 다시 냉수에 식혀야 해?’ 분통이 터지며 뜨거운 플라스틱 젖병을 바닥에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아, 나는 생각보다 유리 멘탈이었습니다.

닷새 만에 집에 돌아온 아내는 나의 다크 서클을 보며 웃었습니다. “우리 집 가장님 오셨습니까?”, “고생 많았어”, “나는 죽는 줄 알았다. 나 잘 거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절대 깨우지 마”.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육아 퇴근한 좀비는 단잠에 빠졌습니다. 정신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제대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그 때 체력과 정신력이 빨리 바닥나게 된 건 다른 사정도 있습니다. 당시 나는 한밤중에 숨을 멈추고 잠든 아이의 인중에 귀나 손가락을 수시로 대어보며 잠을 설쳤습니다. 건강하던 아기가 수면 중 갑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영아 돌연사’에 관한 뉴스가 자꾸 떠오른 탓입니다. 그게 우리 집 일이 되어선 결코 안 되었기에, 아이가 잘 때도 나는 좀처럼 잘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밤을 보내던 중 아내가 돌아오기 전날 밤, 초등학생 2~3학년 쯔음의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단 한 번도 회상해본 적 없던 기억입니다.

어느 낮, 어린이였던 나는 새벽 일을 마친 끝에 곤히 잠든 엄마 곁에 누워 있었습니다. 어쩐지 엄마는 너무 오랫동안 낮잠을 주무셨습니다. ‘아빠처럼 엄마도 세상을 떠나면 어쩌지?’하는 불길함 앞에, 나는 무력했습니다. 심지어 엄마가 나를 걱정할까 봐 “엄마는 절대 떠나면 안 돼”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엄마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어보거나, 목에 맥박이 뛰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목에 점이 몇 개인지 세 보거나 점을 연결해서 눈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잠든 엄마를 바라보며 숨결을 확인하고, 안도하는 날이 오랜 기간 이어졌습니다.

그랬던 아이가 자라나 자신의 아이에게도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회상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잠든 아이나 과거의 잠든 엄마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은 대상만 다를 뿐 결국 같은 것이었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결코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죠.

이런 육아 불안의 원형을 만난 것이 혹독한 가을 휴가(?)의 소득이라면 소득이었습니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시시하고 평범한 일상을 감사하게, 때론 애틋하게 여기게 된 이유가 바로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날까 불안해 하던 날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파본 사람이 건강을 더 잘 돌보는 것과 같달까요.

일곱 살의 건강한 수현이. 아이는 이번 겨울 꽝꽝 언 동네 하천의 얼음 깨기에 맛을 들였다.
일곱 살의 건강한 수현이. 아이는 이번 겨울 꽝꽝 언 동네 하천의 얼음 깨기에 맛을 들였다.ⓒ사진 = 오창열

요즘 우리 세 식구는 잘 지내고 있고, 내 머리카락도 제자리에 있습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라는 노래 가사를 가훈 삼아, 매일 매일 오늘 밤처럼 웃고 떠들다 잠들면 좋겠습니다. 내 머리카락도 잘 간수하고요.

다음 날 밤에도 불을 끄고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이의 아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던 끝에 아이를 슬쩍 놀렸습니다.

아빠도 어릴 땐 너처럼 귀여웠어. 너도 어른 되면 아빠 얼굴처럼 된다? 네 얼굴 미리보기 버전이 아빠야.
못 생기기 싫어!
안 돼~~~~!

오창열 정신건강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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