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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안철수의 ‘중도 타령’이 허구에 불과한 이유

요즘 정가에서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보수화에 대해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한 때 진보의 성지라 불리는 호남을 기반으로 대권에 도전했던 그의 최근 변신이 너무 가벼이 이뤄졌기 때문일 것이다.

안 대표의 보수화는 그의 정치적 선택이니 개인적으로 뭐라 비평하지 않겠다. 물론 진보를 지지하는 나는 근본적으로 보수의 정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보수 정치인이 안철수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학생 운동 하다가 저쪽으로 쪼르르 튀어간 하태경 같은 인간도 있는 판국에 애초부터 진보도 아니었던 안철수 대표의 보수화는 나에게 별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그의 인터뷰 중 눈에 띄는 대목이 하나 있었다. 24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앵커가 “중도를 표방하는데 발걸음은 보수 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라는 묻자 안 대표가 “민생이 파탄 나는 상황에서 진보, 보수 타령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한 대목이 그것이다.

일단 “민생이 파탄나는 상황”이라는 발언은 너무 심했다. 23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경제성장률(-1.0%)은 3위였다. 또 25일 블룸버그가 발표한 코로나19 시대에 살기 좋은 나라 순위에서 한국은 53개국 중 8위를 차지했다. 코로나19로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여러 면에서 한국은 매우 잘 버티고 있다는 이야기다.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 출마한 국민의당 안철수 예비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KNK디지털타워에서 열린 금태섭 무소속 후보와의 단일화 2차토론에 앞서 준비를 하고 있다.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 출마한 국민의당 안철수 예비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KNK디지털타워에서 열린 금태섭 무소속 후보와의 단일화 2차토론에 앞서 준비를 하고 있다.ⓒ국회사진취재단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야당 정치인이라도 “민생이 파탄났다”고 발언하는 것은 좀 심한 거 아닌가? 혹시 안 대표 주변에 경제적으로 파탄이 난 김민생 씨나 이민생 씨가 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혹시 그런 분이 계시다면 민생 씨, 당신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의 발언 중 진짜 거슬렸던 대목은 “진보, 보수 타령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중도 타령’ 외에 모든 이념적 지향은 다 멍멍이 소리라는 뜻인데, 나는 안 대표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오만한 발언을 일삼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나는 극중(極中)주의라는 생소한 용어까지 만들어낸 그의 중도 타령에 대해 단 1도 가치를 두지 않는다.

“중도주의라는 이념은 없다”

그의 이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프레임 이론으로 세계적인 석학 반열에 오른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 버클리대학교 교수의 견해를 살펴보자. 레이코프는 “중도주의라는 이념은 없다”고 단언한다.

예를 들어보자.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정치인이 할 수 있는 답은 “찬성한다(진보)”거나 “반대한다(보수)” 둘 중 하나다. 둘 사이에 어떤 중간적 입장도 있을 수 없다. 어떤 정치인이 중도를 고수한답시고 “밥은 무상으로 주고 반찬은 돈을 받자”라거나 “반찬 중 채소까지는 무상으로 주고 소시지는 돈을 받자”라고 말하면 그게 말이냐? 항문으로 나오는 가스냐?

물론 ‘중도층’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다양한 이념적 질문을 던져보면 그들의 답은 절대로 어정쩡한 중간에 있지 않다. 그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적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진보적으로 답한다. 그게 총체적으로 섞여서 그들을 중도층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사안마다 살펴보면 사람들은 분명히 보수와 진보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게 레이코프의 통찰이다.

실제 몇 년 전 EBS 다큐멘터리 팀이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보수, 진보, 중도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질문을 한 뒤 답을 ①~⑤번까지 제시한다. ①이면 극보수, ②면 보수, ③이면 중도, ④면 진보, ⑤면 극진보 이런 식이다.

20개 질문의 답을 모아 평균을 내보면 진보층의 평균은 4점이 넘고, 보수층의 평균은 2.3점으로 나온다. 중도는 3.3점으로 집계된다. 얼핏 보면 ③을 지향하는 중도라는 이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중도층 시민들 중에 개별 질문에서 ③을 선택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이게 핵심이다. 이들 대부분은 각 질문마다 ①②나 ④⑤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레이코프가 “중도주의라는 이념은 없다”고 단언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래서 레이코프는 “중도주의를 추구하는 정치인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매 사안에 대해 ③이라는 어정쩡한 위치에서 “나는 이 편도, 저 편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정치인을 신뢰할 국민이 누가 있겠는가?

레이코프가 말하는 대표적 정치인이 바로 안철수 대표다. ③이라는 어정쩡한 위치에 병적으로 집착하다보니 정치적·사회적 사안에 대해 철학이나 내용이 없는 것이다. “진보, 보수 타령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사람들”이라는데, 나도 정신 좀 차리고 싶으니 ‘중도 타령’이 뭔지 내용이나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게 뭔지 알아야 진보 타령을 그만 하고 중도로 갈아타건 말건 할 것 아닌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양극화로 치닫는 치열한 계급사회다.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 치열한 계급 사회에서 누군가가 “나는 중도에요~. 나는 아무 편도 아니에요~”라며 실실 웃는다. 얄미운 것을 떠나서 그게 가능한 일인지부터 점검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1960년대 미국에서는 흑백차별이 일상적이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가 “나는 흑인 편도 아니고 백인 편도 아니에요~. 나는 인종 문제에 대해 중도거든요~” 라고 주장하면 그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가? 압도적인 백인 중심 사회에서 이런 행동은 당연히 흑인을 탄압하고 백인의 편을 드는 것이다.

친일파 처단 문제도 마찬가지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조상이 친일을 한 덕에 지금도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산다. 그런데 이 문제를 청산하자고 했을 때 “나는 친일 문제에 관심이 없어요~. 나는 새정치에만 관심이 있어요~. 나는 중도거든요~” 이러면 이건 당연히 잘 먹고 잘 사는 친일파를 옹호하는 거다.

그래서 1960년대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치열하게 인권운동을 벌인 미국의 석학 하워드 진(Howard Zinn)은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는 유명한 말로 중도의 허구성을 폭로했다. 한쪽 방향으로 달리는 기차 위에서 “나는 중립이에요~”라며 가만히 앉아있다면, 그는 사실 그 기차가 달리는 방향을 지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안철수 대표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그가 왜 ‘중도 타령’에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이념과 철학이 없으니 국민에게 내세울 비전이 없다. 그런데 대통령도 하고 싶고 서울시장도 하고 싶다.

이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중간쯤 어디엔가 서서 중간 표도 갖고 싶고 저쪽 표도 갖고 싶고, 뭐 이런 욕심을 부리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대통령이 보수일 때는 민주당과 합당하고, 대통령이 진보일 때는 국민의힘과 선거연합을 추진하다.

권력의지로 충만한 안 대표가 그러는 것은 뭐 그러려니 하겠다. 그런데 이 세상이 보다 평등하고 보다 인간다운 세상이기를 꿈꾸며 쉼 없이 투쟁하는 사람들을 향해 “진보 타령하는 정신 못 차린 사람들” 운운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아하니 안철수 대표는 앞으로도 가운데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릴 심산인 모양인데 그건 당신의 삶이니 계속 그렇게 사시라.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 우리는 진보의 가치를 위해 싸웠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우리는 달리는 기차 위에서 그 기차가 질주하도록 그냥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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