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공연후]“낙태죄 폐지됐는데, 아무 것도 바뀐 게 없다” 강윤지 연출가
강윤지 연출가
강윤지 연출가ⓒ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제공 / ⓒ옥상훈

[공연후]막이 내린 후, 어떤 한 장면이라도 관객 가슴을 깊게 파고든 공연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공연이다. 좋은 공연은 막이 내린 후에도 긴 생명력을 갖는다. 그 건강한 생명력이 허공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활자로 정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기획이 시작됐다. 그 생생한 감동과 날 선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묶어 두기 위해서다. -편집자 주-

산부인과를 찾은 젊은 여성은 의사에게 '임신중지' 시술을 요청하지만, 의사는 거절한다. 의사는 말한다. 임신중지는 불법이며, 한 번 더 병원에 찾아온다면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기를 낳을 수 없던 젊은 여성은 결국 사다리를 타고 건물로 올라간다. 시간이 흐른 후, 임신한 또 다른 미성년자가 이 의사를 찾아와 '임신중지' 시술을 요청한다. 의사는 고민에 빠진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연극 '344명의 썅년들'의 일부 장면이다. 이 연극은 1960~70년대 프랑스 임신중단사를 배경으로 했다. 이 시대에 임신한 미성년자들은 퇴학을 당했고, 피임 관련 전단지를 배포한 의사는 진료 정지 처분을 받았다. 성적권리와 재생산권을 위해 프랑스 여성들은 싸웠고, 결국 1979년 12월 31일 프랑스에서 임신중단이 영구적으로 합법화됐다.

이 연극은 프랑스 임신중단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동시에 한국의 임신중단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얼마 전까지 한국 여성들도 낙태죄 폐지를 위해 투쟁했다. 그리고 2021년 1월 1일, 한국 역시 임신중단 비범죄화 첫해를 맞이했다. '344명의 썅년들'의 막이 내린 후, 그리고 한국의 비범죄화 첫해가 시작된 후, 공통된 질문은 하나다.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다.

연극이 무대에 오른 9일의 시간은, 프랑스·한국 여성들이 이룬 숭고한 투쟁의 역사를 복기하고 가치를 기억하며 앞으로 남은 과제들을 정리해 보는 시간이었다. 연극은 막을 내렸지만, 연극이 품은 화두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 작품을 쓰고 연출한 강윤지 연출가를 만났다.

연극 '344명의 썅년들'
연극 '344명의 썅년들'ⓒ극단Y

'344명의 썅년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연극 '344명의 썅년들'의 배경이 된 실제 사건은 프랑스의 '343인의 선언'과 '보비니 재판'이다. 1971년 '누벨 옵세르바퇴르' 잡지 표지에 당대 유명 인사, 지식인, 배우, 소설가 등 여성 343명이 '나는 낙태했다'고 선언했는데, 이것이 바로 '343인의 선언'이다. 1972년 '보비니 재판'은 미성년자였던 한 소녀가 임신중단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선 사건으로, 프랑스 임신중단 역사에 중요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연극은 2019년에 초연됐고, 2021년에 재연됐다. 초연과 재연을 거치면서 연극 내용은 달라졌다. 낙태죄에 대한 정쟁,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2019) 결정 등 변화되는 내용을 수용하고 동시대를 반영한 결과였다.

또한 초연에서 재연으로 가는 시간은, 초연에서 겪은 어려움을 새롭게 토론하고 연극적으로 연대하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임신중단사를 소재로 한 만큼 연극을 준비하는 창작진에게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강윤지 연출가는 초연을 떠올리며 "저희 창작자들도 감정적인 거리두기가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2019년엔 우리가 임신중단을 화두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해보지 못했고 프랑스 이야기를 가져왔을 때 관객도 거리두기가 가능한 상태로 보지 않을까 했다. 그때(초연)는 드라마 위주로 많이 짚었는데 진짜 너무 많이 울었다. 9일 동안 공연했는데 시작하자마자 오열했다. 암전 될 때마다 다들 훌쩍이고 코 풀고 그랬다. 너무 많이 울어서, '우리 지금 거리두기가 힘든 상황이구나' 싶었다. 그 눈물이 감사하기도 했는데, '아 이거 너무 힘들다' 이런 생각을 했다."

재연을 준비하면서 창작진들은 연습할 때 그 감정이 계속 왔다가 가면 서로 너무 힘들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마음이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그리고 창작진 못지않게 관객 마음도 다치지 않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효과적일지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숙성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344명의 썅년들'은 내용적으로 더 단단해졌다.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좀 더 객관적으로 됐고, 연대의 감정은 더 강해졌다. 그렇게 해서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 바로 올해 2월에 재연된 무대였다.

"재공연할 때는 그런 감정들을 더 많이 뺐다. 그리고 연기하면서도 '아 딱 이 정도면 되겠다' 하는 감각들도 많이 찾았다. 재연하면서 우리끼리 이 사건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야가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초연 때는 인물 하나하나에 감정이 많이 왔는데 재연하면서는 이게 사건이고 이게 문제고 그래서 우리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거고 하면서 좀 더 담담해진 것 같다."

연극 '344명의 썅년들' 초연 당시 한 장면.
연극 '344명의 썅년들' 초연 당시 한 장면.ⓒ극단Y

낙태죄 폐지,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

초연은 의사 마리 끌레르의 탄생에서 시작해서 마리 끌레르의 마음을 마지막까지 쭉 따라가면 되는 드라마다. 강 연출가는 "관객이 보기에 좀 더 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연은 의사 마리 끌레르가 주인공 같기도 하지만 아닌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정말 다양한 여성들의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강 연출가는 "재연에선 좀 더 여성들의 목소리를 많이 넣었다"고 했다.

가령 임신한 10대 소녀 마리와 마리의 엄마 미셸은 임신중단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의사 마리에게 분명하게 전달한다. 또한 소녀 마리는 자신의 임신중단 시술을 해준 의사 마리가 징역형을 받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왔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에 의사 마리는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난 나름의 속죄가 필요했고 넌 의사가 필요했지. 우리 서로에게 그만 미안해하자"라고 답한다. 이런 여성들의 목소리에 대해서 강 연출가는 "사실 어느 정도 판타지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왜냐면 소녀 마리도 그렇고 미셸도 그렇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너무 잘한다. 그렇게까지 언어가 정립된 상태로 가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공연에선 이 이야기에 대해 당당하게 이야기하지만, 일상에서 내가 그런 일에 처했을 때, '소녀 마리처럼 미셸처럼 디안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많은 목소리를 담은 것은 판타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되길 바라니까, 그런 목소리를 넣었다."

연극 마지막 장면은 낙태죄 폐지 이후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다시 산부인과 일을 시작한 의사 마리 끌레르와 디안의 모습은 안전한 임신중단을 위해 존재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어느새 암전이 된 무대 위로 커다란 공백이 자리를 채운다. 우리 사회가 그 공백을 안전한 임신중단 교육, 정책, 제도 등으로 채워야 할 것이다.

"물론 임신중단사 과정에서 조금씩 바뀐 것은 있고, 낙태죄도 폐지됐지만, 딱 보면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 극 중에서 고민하는 것처럼 의료진들의 교육은 전혀 실행이 안 되고 있다. 임신중단 약물은 이미 유럽 쪽에서 다 쓰고 있는데, 임신 초기에 안전하게 임신중단을 할 수 있는데, 몸에 칼을 대지 않아도 괜찮은데, 우리나라는 아직 안 들어왔다. 지금 이제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데 안 된 게 너무 많다. 저희도 학교에서 제대로 된 성교육, 피임을 배운 적이 없다. 의사들의 진료 거부권 이야기가 이제 좀 논점으로 올라오는 것 같은데, 그래서 저는 계속 진료실에서 거부당하는 여성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좀 더 옮기고 싶었다."

강윤지 연출가는 2017년 극단Y를 만든 후 페미니즘 연극을 만들고 있다. 성 정체성, 퀴어, 장애, 여성 등 세상에 끄집어내야 할 담론과 사회적 이슈를 무대에 올리고 있다.

"세상에 굳이 끄집어내지 않으면 잘 안 나오는 소리가 꼭 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연대에 관한 키워드는 놓지 못하고 가져갈 것만 같다. '퍽킹젠더'라는 작품에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대사가 있다. 그런데 최근 한 달간 트랜스젠더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주변에서 아주 힘들어 하고 있다. 앞으로 무슨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연대에 관한 이야기는 놓지 않을 것 같다."

올해 재연 공연은 지난 2월 19일부터 28일까지 알과핵 소극장에서 상연됐다.
연극 '344명의 썅년들'은 어떤 작품?
[리뷰]연극 ‘344명의 썅년들’
관련기사 [공연후]안정민 연출 “할머니를 죽이지 않으면, 그의 죽음은 묘하게 남았을 것”

연극 '344명의 썅년들'
연극 '344명의 썅년들'ⓒ극단Y

김세운 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