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노동이야기] 가래로 막을 일에 호미를 들이대면

소규모 사업장 지원 시스템으로 특수고용직 안전 보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어불성설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에 살고 있는 나는 택배노동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온라인 쇼핑을 할 때마다 윤리적 고민에 빠진다. 가끔 장바구니라도 들고 집 계단을 오르는 날이면, 내가 고양이 모래를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것이 죄악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런 소비자로서의 개인적 고민과는 별개로, 연이어 발생하는 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는 사회적인 대책이 필요한 문제다. 작년 말부터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 ‘코로나19 대응 필수노동자 보호대책’, ‘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하지만 지난 6일 쿠팡노동자 2명이 또 사망하는 등, 여전히 택배노동자들은 장시간노동, 야간노동으로 죽어가고 있다.

변화는 참 더디기만 하고 과정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오늘은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난 한 작은 사건이 우리 사회의 산업보건시스템에 던지는 윤리적 질문이 기억에 남아 곱씹어보려 한다.

지난 2월 CJ대한통운 본사의 환경안전팀에서는 전국의 근로자건강센터에 택배노동자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업무협약을 제안했다. 주된 내용은 근로자건강센터가 CJ대한통운 택배노동자들에게 건강 검진 결과를 설명해주고 위험요인을 안내하는 ‘사후관리’를 비롯해, 뇌심혈관 질환, 근골격계 질환 예방을 위한 건강상담을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를 예방하기 위한 사업이고, 필수노동자의 건강관리 지원은 근로자건강센터의 주요 과제이기도 했기 때문에, CJ대한통운의 업무협약 제안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택배물류현장에서 택배노동자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2020.10.21ⓒ국회사진취재단

하지만 전국 23개 근로자건강센터에서는 이 제안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논란의 주된 이유는 근로자건강센터의 취지와 관련된 것이었다. 근로자건강센터는 주로 50인 미만의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 관리를 무료로 지원하기 위해 산재보험기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다. 주 서비스 대상이 영세사업장이라고는 해도 일용직이나 특수고용직 같은 직업건강서비스의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까지 대상으로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근로자건강센터가 특수고용노동자 신분의 택배노동자들에게 건강상담을 제공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CJ대한통운이라는 대기업이 상대로 등장하자 이 형식 논리의 거대한 구멍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아무리 특수고용노동자라고 해도 CJ대한통운 같은 대기업을 지원하는 것이 근로자건강센터의 역할이 맞는가?’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사각지대를 보완한다는 실제적 의미는 자체적으로 노동자들의 건강 관리를 수행할 ‘능력이 없는’ 사업장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거대기업임에도 택배노동자를 특수고용노동자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건강관리의 ‘책임이 없는’ 사업장을 지원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심지어 CJ대한통운이 제시한 업무협약에는 근로자건강센터가 유해환경 개선을 위한 직업환경 및 작업관리 상담, 산업보건문제 자문, 교육, 컨설팅 등의 서비스도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들은 보통의 사업장에선 자기 돈 써가면서 하는 직업건강서비스들이지만, 근로자건강센터에서 서비스 받으면 전액 무료다.

만약 근로자건강센터들이 CJ대한통운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택배노동자들은 어디서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까? 비용의 문제도 있겠지만 늘 시간에 쫓기는 택배노동자들이 스스로 의료기관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일말의 불합리를 감내하더라도 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를 줄일 수 있다면 CJ대한통운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까? 자, 정의란 무엇일까?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의 건강 관리가 과연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가 주당72시간에 달하는 장시간노동, 과도한 심야노동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근로자건강센터가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이란 혈압·혈당 관리, 금연·금주, 식습관 개선, 운동 등의 개인적인 대처법들 뿐이다. 근로자건강센터로서는 그들의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에 개입할 법적, 제도적 방편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독감이 창궐하는 시기에 백신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환자에게 ‘비타민이라도 드시라’고 해야 하고, 독감에 걸린 사람에게 타미플루가 아니라 종합감기약만 처방할 수 있는 의사의 심정이랄까?

여기에 더불어 특수고용노동자들은 사업장 단위로 관리할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추적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한계, CJ대한통운과 협약을 진행할 경우 어림잡아 각 센터당 1,000명 내외의 노동자들을 감당해야 하는 과부하와 타 사업장과의 형평성의 문제까지,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게 된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특수고용노동자 대책회의 조합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수고용노동자 보호방안 마련 입법 공청회 직접 참여 허용을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결론은 어떻게 났을까? 현재 전국의 근로자건강센터 중 일부만 CJ대한통운과 업무협약을 맺고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각 센터가 어떤 결정을 내렸든 어느 한 쪽을 비판하거나 지지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름의 고뇌 속에서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고, 애당초 정답은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다만 이 논란 속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현재의 소규모 사업장 지원시스템을 활용해 특수고용직의 안전 보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깨달음과, ‘특수고용직’이라는 고용형태가 노동시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처럼 안전보건시스템마저 붕괴시킬 수 있다는 위기감일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특수고용노동자와 관련해 고작 사업주가 안전교육을 해야 한다는 수준의 의무만 정하고 있다. 이제서야 건강 검진 의무화 정도의 정책들이 시도되고 있다. 노동자들의 고용 형태에만 얽매여서는 이러한 임시방편을 뛰어넘는 대책이 나올 수 없다. 특수한 고용형태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생명권과 건강권에 주목하자. 그러면 적어도 안전 보건 영역에서는 일반적인 사업장과 동일한 수준의 의무가 사업주에게 부과되고, 국가의 책임을 더욱 명확히 하는 등의 전향적인 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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