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후]‘공주’ 햄릿도 복수와 왕좌를 꿈꾼다, 배우 이봉련의 ‘햄릿’

이봉련 배우가 지난 23일 대학로 인근 카페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 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2021.03.23.ⓒ김세운

[공연후]막이 내린 후, 어떤 한 장면이라도 관객 가슴을 깊게 파고든 공연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공연이다. 좋은 공연은 막이 내린 후에도 긴 생명력을 갖는다. 그 건강한 생명력이 허공을 떠도는 것이 아니라, 활자로 정착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기획이 시작됐다. 그 생생한 감동과 날 선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묶어 두기 위해서다. -편집자 주-

배우 이봉련은 JTBC '런온'에서 신세경 동거인으로, 넷플릭스 '스위트 홈'에선 아이를 잃은 엄마로, 맡아내는 캐릭터마다 찰떡으로 소화해 왔다. 이봉련의 연기를 입은 캐릭터는 잊히지 않는 캐릭터로 시청자 기억에 남아있다.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그는 영화 '세자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82년생 김지영' 등 스크린을 통해서도 관객을 만나왔다. 필모그래피는 셀 수 없이 많다.

드라마·영화 등 영상 매체를 종횡무진 중인 이봉련 배우는 사실 오랜 기간 연극 무대에서 뿌리를 단단하게 다져온 연극배우다. 2005년 뮤지컬 '사랑에 관한 다섯 개의 소묘'로 데뷔했으니 관객의 생생한 호흡과 피드백으로 내공을 쌓아온 시간만 17년이다.

'런온'과 '스위트홈'으로 시청자들을 만나던 비슷한 시기에 이봉련은 카메라가 아닌 무대에 섰다. 맡은 역할은 해군 장교이자 공주인, 햄릿이었다. 젠더프리 작품이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 원작을 정진새 작가가 각색하고 부새롬 연출가가 연출한 국립극단의 '햄릿'이었다.

공연계에 젠더프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더 활발하고 다양하게 상연화되고 있다. 최근엔 김성녀 배우가 괴테의 대작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박사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봉련은 2018년 두산아트센터에 올랐던 '내게 빛나는 모든 것'에서 성별에 상관없는 젠더프리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그다음 젠더프리 작품이 바로 '햄릿'이다.

국립극단 온라인극장 연극 '햄릿'ⓒ국립극단

해군 장교이자 공주인 '햄릿'
420년 전 원작에 2021년 현실을 반영

"저도 역할에 대한 편견이 있잖아요. 그걸 여자가 할 거라는 생각을 딱히 안 하고 있었어요. 이 사회에서 적응해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뭔가 문제제기를 하기보다, 어떤 것에 대해선 편견에 많이 갇혀 있죠. 그건 당연히 누군가가 해왔던 일이고 저한테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안 한 거죠. 그러다 보니까 (캐스팅됐을 때) 조금 흥미롭다, 내가 하면 어떤 것이 될까, 그런 기대는 있었죠. 자신감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나라는 사람이, 나라는 배우가 가진 색깔로, 라는 놀라움은 있었어요. 분명히 나였으면 좋을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런 것에 대한 기대죠, 설렘이고요."

정진새 작가는 셰익스피어가 남겨놓은 원석은 살려두면서도 고전 연극의 말투나 어조는 과감히 벗겨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나 시적 대사들도 대거 수정했다. 또한 오늘날 시선에선 여성 혐오로 비칠 수 있는 부분도 덜어내고 재해석했다. 부새롬 연출가도 아버지의 죽음, 삼촌과 어머니의 결혼, 왕의 승계 문제 등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집요하게 파헤쳐 무대화했다.

천장과 바닥이 텅 빈, 우주처럼 표현된 무대 위에 작은 인간 이봉련이 섰다. 권력 앞에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한 인간의 공포, 나약함, 두려움이 무대를 흔들었다. 축축한 비가 나약함을 증폭시키고, 흙무덤에선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햄릿'은 젠더프리로 화제를 모았지만, 단순히 남자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맡았다는 것만으로 주목받은 것은 아니다. 1년 이상 창작진들이 톤을 맞추고 조율해 시대를 반영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작품 속엔 처음부터 던져진 큰 고민거리가 있잖아요. 햄릿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요. 아버지가 죽었고, 삼촌이랑 어머니가 결혼했고, 왕위 서열도 밀린 것, 이거 세 가지예요. 햄릿은 그 고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인물인데요. 원작에서도 햄릿은 그만큼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데, 국립극단 '햄릿'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다만 원작이 사람들에게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고 잘 안 와닿는 이유는 극 중 배경이 덴마크의 어떤 곳, 중세의 어느 시기,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 등 이런 것들이 우리랑 너무 멀잖아요. 근데 (극 중 시기와 배경이) 현대의 어느 지점으로, 동시대 사는 어떤 사람이라면 관객이 조금 더 따라가기 쉽지 않을까 생각해요. 국립극단의 '햄릿'은 각색되어지기를 '사람이라면 이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부분에 각색을 맞춰놓은 것 같아요."

국립극단 온라인극장 연극 '햄릿'ⓒ국립극단

코로나19로 힘들었던
'햄릿' 준비 기간

햄릿 뿐만 아니라 호레이쇼도 여성 배우(김보나)가 연기했다. 오필리어는 남성 배우(유원준)가 연기했다. 극을 보다 보니 젠더프리라는 개념조차 사라졌다. 이 작품은 남자가 연기해도 여자가 연기해도 상관없는 그냥 인간 이야기였다. '진실 앞에 무력한 인간,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 곧 나와 우리에 대한 이야기'라는 몰입에 빠져들게 된다.

"죽느냐 사느냐" 내적 독백을 수시로 길게 토해내는 원작 햄릿보다, 이봉련의 햄릿은 훨씬 담백하고 과감해 보인다.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폴로니어스가 자리를 떠났을 때 욕을 시원하게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소용없다. 사랑하는 오필리어부터 애증 하는 어머니까지 햄릿을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 모함, 부조리가 그를 옥죈다. 이봉련 배우는 햄릿을 가장 괴롭히는 것에 대해 이와 같이 답했다.

"아버지가 죽고, 왕위 서열도 밀렸는데, 주위에서 자꾸 은폐시키고 감추고 덮으려고 했던 게 햄릿을 가장 힘들게 만들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내가 복수를 못 해서 라기 보다, 이상한,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이 모든 것들이 없었던 일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어느 날이 되는 게 햄릿에겐 힘들지 않았을까요."

햄릿이 진실 은폐로 힘들어했다면, '햄릿'을 준비한 창작진들은 코로나19 때문에 힘들었다. 당초 '햄릿'은 지난해 11월 27일부터 한 달간 공연 예정이었지만, 공연이 상연되기로 한 명동극장에 화재가 나서 연기됐다. 이후 화재 보수를 마무리하고 12월 17일부터 열흘간 회차를 줄여 진행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불발됐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2.5단계(수도권)로 격상됨에 따라 12월 18일까지 국립문화예술시설 운영이 중단된 것이었다. 결국 햄릿은 올해 2월 '온라인' 상으로 관객을 만났다.

이봉련 배우는 "코로나19라는 상황이 햄릿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 좀 힘들게 한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라며 "왜냐면 언제 관객을 만나게 될지 불투명하기 때문에요"라고 떠올렸다.

"'햄릿'은 철저하게 대면 공연을 위해서 준비됐던 프로덕션이었어요. 단 1회라도 대면 공연을 위해 준비되고 제작된 공연이고요. '공연 중단' 바로 전날까지, 전날 드레스 리허설이 밤 10시에 끝났는데, 그때까지 내일은 관객을 만날 수 있다고 기대하고 했던 공연이에요. 오픈을 앞두고 그날 밤 드레스 리허설하고 공연이 중단됐기 때문에 다들 정말 애쓰셨죠."

이봉련 배우ⓒ씨제스엔터테인먼트

이봉련이 만난 햄릿
그리고 앞으로의 이봉련

햄릿은 삼촌과 어머니에게 보여줄 연극을 준비한다. 연극을 되새김질하며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그들이 밉다고 말하지만 말로만 미운 게 아니냐. 행동하지 않는 너는 아버지를 살해한 놈들과 한패다." 이어 햄릿은 복수자로 나선다. 그리고 철저히 실패한다.

"햄릿은 진실을 파헤치는 데 실패한 사람이에요. 결국 정의는 칼이라고 할 만큼, 마지막엔 이 사람도 계속해서 변해가고 복수가 변질돼 가요. 진실을 파헤치겠다는 마음이 전부다 변질되서 칼로 모든 걸 써 내려가고 모두가 파국에 치닫게 되잖아요. 어떤 사람이 혼자서 정의롭게 가는 게 아니라, 이 사람도 실수한 거죠. 진실을 파헤치는 데 실패한 사람, 제가 연기한 햄릿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쓸쓸하고 외롭고 초라한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이봉련 배우는 2015년 민중의소리와 인터뷰에서 "제일 어려운 거라고 선배들이 그러는데요. 오래 연기할 수 있는 배우요. 오랫동안 하고 싶다는 뜻은 오랫동안 필요한 사람이 돼야한다는 뜻인 것 같아요"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마음이라고 했다.

"극단을 사랑하니까 극단 골목길 작업이 있으면 언제든 함께 와서 놀고 싶어요. 드라마랑 영화도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안 해봤던 것들이어서 좀 낯선 부분이 있었는데 자꾸 해보니 이것도 연기하는 일이더라고요. 물론 메커니즘은 다르죠. 근데 연기하는 배우에게 이 모든 게 같은 선상에서 이뤄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더 들어요. 어느 날은 이것이고 저것이지, 앞으로 뭘 더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지난번 했던 말처럼 꾸준히 대사 외울 수 있는 날까지만, 남에게 민폐 되지 않은 날까지는, 길게 잘 배우로 지내고 싶어요."

이봉련 배우는 지금도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극단 골목길과 함께 하는 연극 '코스모스:여명의 하코다테'에서다. 이 공연은 오는 28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이봉련의 무대는 공연이든 영상이든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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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련 배우ⓒ극단 골목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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