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공연예술계를 뒤흔든 변화들

퀴어, 페미니즘 등 ‘생각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들 더 나오길

연극 ‘달걀의 일’ⓒ창작집단 푸른수염 제공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는 공연예술계 지형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대표적인 대면 예술인 순수예술과 연극·뮤지컬은 '비대면'으로 관객을 만나야 했다. 배우들은 관객의 호흡이 그립다고 했다. 관객은 배우의 땀방울을 보고 싶다고 했다. 코로나19는 언젠간 끝나겠지만, 이미 바뀌어버린 지형으로 인해 일부 창작진은 새로운 플랫폼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코로나19가 공연예술계를 흔든 첫 번째 변화는 아니다. 코로나19는 굳이 따지면 두 번째 물결이다. 코로나 이전에 다른 이유로 공연계에 큰 변화가 있었다. 2018년 본격적으로 일어난 '미투 운동'으로 공연계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중요한 점은 '이 이야기를 해도 되나?'라고 망설였던 사람들마저도 용기를 얻고 자신의 목소리를 꺼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난 2월 임신중지 비범죄화 관련 연극을 올린 강윤지 연출가는 극단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2017년만 해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걸어도 되나? 지원서에 써도 되나? 떨어뜨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많이 했다"면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걸고 공연을 하면 사람들이 찾아와서 달걀을 던지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이기도 했고 좀 무서웠다"고 떠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2018년 미투가 터진 이후에 극단을 소개해야 할 때 페미니즘 하는 극단이라는 쓴 워딩을 내보낸다"고 달라진 점을 말했다. 현재 강 연출가의 극단Y 소개란에는 "페미니즘 연극을 만든다"라는 내용이 쓰여있다. 극단 Y는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해 고찰한 '미의 기준' 시리즈를 포함해 '344명의 썅년들', '퍽킹젠더' 등 젠더 질서에 꾸준히 질문을 던지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연극 '344명의 썅년들' 초연 당시 한 장면.ⓒ극단Y

이 밖에도 남성 신화를 여성 신화로 다시 써 내려간 안정민 작가 겸 연출가의 '달걀의 일'도 있었고, 성소수자의 나이 듦에 대해 이야기하는 김비 소설가의 '물고기로 죽기'도 있었다. 작년과 재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레라미 프로젝트', '이갈리아의 딸들' 등 더 많다.

민간극단이 아닌 국립극단에서도 변화가 엿보였다. 국립극단은 최근 고정관념을 깬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젠더 프리 캐스팅을 통해서다.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명동예술극장에 올랐던 괴테의 '파우스트' 역할을 김성녀 배우가 맡았다는 점이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햄릿' 역시 이봉련 배우가 열연했다. 특히 연극 '햄릿'은 햄릿이 엄마를 '창녀'라고 부르며 공격적인 발언을 하거나 여성 혐오적인 장면을 대거 덜어냈다. 국립극장도 최초의 여성 감독인 박남옥을 무대화했다.

대형극장의 변화를 끌어낸 것은 사실 민간극단이다. 민간극단에서 낸 용기의 목소리가 물꼬를 트고, 그 물꼬에 용기를 얻은 다른 목소리가 더 다양한 문화 생태계를 구현시켰다. 이전에 없었거나 보기 힘든 이야기들이 나오며 공연계 생태계는 더 울창해졌다. 생태계가 울창해 지면 사람도 건강해진다.

1회부터 3회까지 '페미니즘연극제'를 이끌어온 나희경 PD는 "저희가 항상 주제를 정해둔 다음에 작품 공모를 받았으니까, 주제에 대해선 딱히 이야기할 만한 건 없을 것 같다"면서도 "하지만 3회 때는 좀 놀랐다. 마임, 무용도 들어오고, 연극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들어왔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과거보다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곤 하지만, 더 다양해져야 한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특히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년층 등에 관한 이야기가 많길 바란다. 사회적 '약자'로 수식되는 이들은 사실 사회의 '중심'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 나 PD 역시 연극계에 더 필요한 것에 대해 "주류에서 하지 않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2019년 독일의 샤우뷔네(Schaubühne) 극장에서 연극 '레닌'이 상연된 적 있다. 여기서 레닌 역할을 여성 배우 우르지나 라디(Ursina Lardi)가 연기했다. 우르지나 라디는 병들어 쇠약해져 가는 레닌의 말년을 인상 깊게 표현했다. 실존 인물인 레닌에 대한 호불호는 있겠지만, 그리고 레닌을 남자 배우가 연기해도 상관없지만, 우르지나 라디가 연기한 레닌은 정말 멋졌다. 레닌을 입은 우르지나 라디의 얼굴은 3년이 흐른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독일에서 레닌 공연을 볼 거라고 생각도 못 했지만, 레닌 역할을 여성 배우가 할 것이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도 잘못된 편견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생각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가 더욱 나오길 고대해 본다.

국립극장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국립극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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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운 기자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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