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언론 “‘조선인 전범’ 구제 외면…일본의 정의는 무엇인가”

ⓒ아사히신문

‘조선인 전범’으로 내몰린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중 마지막 생존자 이학래 옹이 별세한 가운데, 이들을 외면한 일본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일본 언론에서 나왔다.

아사히신문은 7일 자 사설 ‘일본의 정의를 묻고 또 묻는다’에서 지난달 28일 세상을 떠난 이학래 옹을 언급하며 “살아생전 구제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1925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난 이학래 옹은 열일곱 살이던 1942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군 군무원으로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에 동원된 연합국 포로 감시 업무를 수행했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일본군 군무원 신분으로 체포돼 오스트레일리아 관할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후 감형받아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일본에서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조선인 B/C급 전범자와 함께 1955년 ‘동진회’를 결성해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아흔을 훌쩍 넘은 나이까지 투쟁을 이어갔다.

이학래 옹은 ‘지원’이란 이름으로 강제동원됐다. 일제는 1942년 민간인 포로 감시원을 모집했는데,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뒤 각 지역 관리와 경찰이 할당 인원을 동원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징병제가 발표돼 전쟁터로 끌려가기 직전, 월급도 주고 가족도 보호해준다는 포로 감시원 모집은 조선 청년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기도 했다.

포로 감시원은 일본군 최말단이었는데, 직접 포로를 대면했던 이들이 일본군 포로 정책 책임자 대신 포로 학대 책임을 지게 됐다. B/C급 전범으로 유죄 판정을 받은 5천700명 중 148명이 조선인이었는데, 129명이 이학래 옹과 같은 포로 감시원이었다.

‘조선인 전범’들은 고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특히 일본 정부는 일본인 전범과 유족에게 연금과 위자료 등으로 보상했지만,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로 일본 국적을 상실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끝까지 외면해왔다.

이와 관련 아사히는 “불합리하다”라며 “이 나라의 정의와 양식은 무엇인가. 정치의, 그리고 그 정치의 부작위를 간과한 국민의 책임을 묻는다”라고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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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영 기자 응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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