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만난 하나님] 교회는 왜 여성의 ‘홀로서기’ 신앙을 싫어할까?

왜 ‘홀로서기’ 신앙이 ‘강성’이 되었나?

45년의 신앙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교회나 신학교에서 “여자가 ‘강성’이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때마다 ‘그래 내 성은 강(姜)씨니까!’라며 스스로 위로하곤 했다. 위키백과를 보니까 “‘강성’(stiffness)이란 변형에 저항하는 성질”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강성’은 줏대와 소신이 있다는 의미로서 좋은 뜻인데, 왜 교회는 여자가 ‘강성’인 걸 싫어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강성’이 되었을까?

내가 ‘강성’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마도 중학교 1학년 때부터인 듯하다. 친구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를 포함한 집안 식구들의 거센 반대 속에서 신앙을 지켜내야 했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무섭게 나를 핍박하였다.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해 교무실에서 손들고 벌을 서기도 했으며, 학교 다닐 차비가 없어서 일곱 정거장 되는 거리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 다녀야만 했다. 걸어서 통학하다 보니 운동화가 쉬이 닳아, 비가 오는 날이면 양말이 흠뻑 젖곤 했다. 어느 날, 운동화를 사달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괘씸했던지 “네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한테 사달라고 하지, 왜 나한테 사달라고 해!”라며 혼을 내셨다. 그날은 아버지가 야속해 하루 내내 울었다.

그래도 나는 명랑하고 씩씩한 성격을 지녔다. 교회에서 문학의 밤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어느 날 아침, 식사 준비를 돕다가 국자가 넓적하게 퍼져있는 걸 발견하곤 “엄마 이 국자 모양이 왜 이래?”라고 물었더니, 엄마는 “아버지가 교회 다니는 걸 그렇게 반대하는데도 기어코 교회를 다니며 늦게 들어오길래 내가 화나서 이 국자로 너를 때렸는데, 기억 안 나니? 에휴!”라며 울먹이셨다. 그제야 엄마가 지난밤에 국자로 내 어깨를 때렸던 게 생각이 났을 정도로 말이다.

아버지가 등록금을 주지 않아 중학교 졸업도 하지 못할 뻔했지만, 전교에서 한 명 뽑는 3년 장학생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전교 4등으로 졸업하여 상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중고등시절 내내 아버지는 예수 믿는 내가 미웠던지 경제적,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심지어는 통금이 있던 시절인데도 늦은 밤에 나를 내쫓곤 문을 잠궈버렸다. 엄마를 비롯한 언니, 오빠, 남동생 모두는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문을 열어주지 못했다. 내가 갈 곳은 오직 교회 뿐이었다. 춥고 깜깜한 밤에 예배당에서 기도인지 넋두리인지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하며 눈물, 콧물을 흘리고 그 밤을 보냈다.

자료사진ⓒ기타

그런데 아버지와 가족들의 핍박과 냉대보다도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내 안에 끝도 없이 일어나는 신앙적 의심이었다. 불신자 가정에서 홀로 예수를 믿으려니 내 안에 신앙을 거부하려는 ‘옛 자아’가 요동쳤던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등록금을 벌면서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일반 학문을 접하자 신앙적 의심은 더 심해졌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아 아버지의 핍박을 왜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모르겠는 혼돈과 의심의 풍랑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치 외줄을 탄 상태로 신앙의 미로에 갇혀버린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아버지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또는 내면적 의심으로 끝도 없는 어두운 터널을 헤매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고 ‘홀로서기’의 신앙으로 이끄셨음을 깨닫게 된다.

어쩐 일인지 교회와 신학교는 여성의 편이 되어주지 않더라!

이처럼 예수를 믿느라 외롭고 힘든 시간을 뚫고 지나왔는데, 어찌된 일인지 교회는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이제 결정해라. 하나님 아버지를 선택할지, 나를 선택할지!”라며 추궁하셨다.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자, 아버지는 나를 끌고 교회로 향했다. 마침 수요 저녁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이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배웅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목사님을 보더니 “얘는 내 딸이 아니니, 당신이 키우시오!”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홀로 집으로 가버렸다.

그러자 목사님은 “당분간 교회에 나오지 마라”며 훈방조치를 했다. 그 후로 예배당 종소리가 울릴 때면, 성경책과 찬송가를 펴들고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나자, 주일마다 나를 감시하던 아버지가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나는 이때다 싶어 실내화를 신고 부리나케 교회로 달려가 예배를 드렸다. 목사님은 회중 가운데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곤 “우리 교회에 신앙 좋은 학생이 있어요”라며 자랑하듯 설교했다.

목사님의 칭찬이 별로 달갑지 않았던 건, 하마터면 목사님 때문에 영영 교회를 다니지 못할 뻔했는데도, 남의 일처럼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 다음부터, 나는 ‘목사의 말이라고 순종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신앙적 줏대를 키워온 것 같다. 감사하게도 결혼 후, 아버지는 나와 함께 살고 싶다면서, 당시 내가 사역하던 교회에 등록하고 세례도 받으셨다.

총신대학교ⓒ기타

결혼 후엔 아들 손자를 바라는 시부모님의 염원을 담아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연이어 딸을 출산했다. 그래서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절망이 나의 마음과 감정, 신앙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활발하고 씩씩했던 성격은 사라졌고, 끝도 헤아리기 힘든 우울과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엄습할 때, 이를 벗어나고자 하루에 8시간씩 성경을 읽었다. 그 당시는 우울증약을 처방받는다는 건 상상조차 하질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염원이 일어났다. 6세와 3세인 두 딸을 옆에 끼고, 합동 교단에 속한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고자 10개월 동안 시험을 준비하였다. 갑자기 입학시험 날짜가 궁금해 합동 교단에서 발행하는 ‘기독신문’을 보았는데, 세상에나! 입학시험 날짜가 일주일밖에 남질 않았던 거였다. 그 순간 아찔했지만, 일주일 동안 대학 졸업 증명서, 담임목사 추천서 등 여러 서류를 급하게 채비하여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만일 그때 시험 기일을 놓쳤다면, 신학 공부를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극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에 대한 경험들은 신학을 공부하는 내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막상 공부를 시작하게 되자, 시부모님을 비롯한 교인들 심지어 신학교에서조차 여성의 신학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히게 되었다. 원로장로셨던 시아버님은 아들(남편)이 고생할까 봐 반대하셨고, 교인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강성 며느리’로 여겼다. 또, 몇몇 신학대학원 남학생들은 나더러 “집에 가서 애나 볼 것이지, 여자가 뭐하러 신학교에 와서 남자 전도사들 밥줄을 빼앗으려 하냐?”며 야단치듯 대하였다. 설상가상, 새로 부임한 총신대 총장은 ‘여성 안수 반대’를 교단 정치 이슈로 잡아, 여성에게 호의적이었던 교수 3인을 ‘자유주의 신학자’로 몰아 학내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지나는 듯했다.

힘들고 흔들렸던 신앙을 다잡아 보려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학교 역시 성경과 신학을 들먹이면서 여성의 독립적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 해서 나는 총신대학교에서 박사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마침내, 신학한 지 10년 만에 “교회 여성리더십”이라는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총신대에서 “현대사회와 여성”을 강의하게 되었다. 여성학과 실천신학을 접목하여 사회와 가정, 그리고 교회에서 복음적 사명을 위한 여성의 주체성과 정체성, 그리고 여성 리더십을 강의하였다.

2017년 열린 예장 합동 총회장 앞에서 여성안수 허용을 요구하는 총신대 여동문회 회원들. 사진 제일 오른쪽이 강호숙 박사.ⓒ기타

그런데 2016년 2월 총신대에서 7년 간 강의해온 “현대사회와 여성” 과목을 개설 유보한다는 통보가 왔다. 그리고 강의를 할 자격이 박탈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후에 어느 교수가 전화를 걸어 “강 박사는 너무 강성이야!”라고 한 말에서, 내가 왜 총신대에서 쫓겨났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속했던 합동 교단과 총신대는 남성이 필요할 때만 여성을 인정해 줄 뿐, 정작 여성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건 용납하지 않았던 거였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게 참 서럽고 쓸쓸한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교회야말로 여성의 ‘홀로서기’ 신앙을 인정해야!

줏대와 소신으로 믿음을 지켜왔는데, 정작 교회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순종과 침묵하는 여자가 믿음이 좋다”라면서 여성의 주체적인 신앙을 정죄한다면, 이는 교회 스스로 신앙공동체임을 부인하는 꼴이 된다. 우리가 현재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건 기독교 초기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핍박과 순교로써 신앙을 지켜낸 선진들 덕분이 아니던가. 초기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원동력은 유교 신분제와 ‘남녀칠세부동석’을 강조한 가부장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안방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했던 전도 부인의 헌신 덕분이 아닌가. 기독교 부흥을 이끈 존 웨슬리의 “혼자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을 “여성의 ‘홀로서기’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로 바꿔 말하고 싶다.

여성의 주체적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서 어떻게 진리로부터 나오는 자유와 평화를 말할 수 있는가? 해마다 종교개혁을 기념한다지만 16세기 루터와 칼빈이 가졌던 가부장적인 여성관을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대로 답습하는 개혁교회의 모습에서 선한 게 나올 리 만무하다.

오히려 여성의 ‘홀로서기’ 신앙을 인정해주며, 필요할 때 남성과 여성이 서로 협력하는 모습에서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면모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각자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신앙의 하모니도 이뤄지는 게 아닌가. 자녀들 각자가 자신만의 특별함을 드러낼 때 부모가 기뻐하는 것처럼, 여성이 체험한 하나님의 신비와 독특한 은혜를 맘껏 드러낸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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