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갑의 수요뮤직] 분노가 들끓는 시대, 슬랜트의 선동

하드코어 펑크 밴드 ‘Slant’의 첫 정규 앨범 [1집]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칠 뻔 했다. 훨씬 늦게 음반을 들었을 수도 있다. 지인들과 2021년 1/4분기 국내 음반들 가운데 어떤 음반이 좋았는지 이야기 하는데, 두 록커가 입을 모아 이 음반을 거론한 덕분에 한 달여 만에 음반을 챙겨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밴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내 온라인 음악서비스에서 스트리밍 하지도 않았다. 다행히 애플뮤직과 밴드캠프에서 음반을 들을 수 있었다. 10곡의 수록곡이 담겨있지만 17분밖에 되지 않았다. 하드코어 펑크 밴드 슬랜트(Slant) 1집 이야기다.

이 음반을 들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지층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그동안 퇴적된 음악의 자갈과 모래와 진흙과 화산재가 얼마나 겹겹이 쌓여있는지. 그 중에서도 한국 인디음악 초창기부터 꾸준히 이어온 하드코어 펑크의 뿌리가 얼마나 굳건하게 뿌리내렸는지.

천둥벌거숭이 같았던 이들의 열정은 오늘도 꺾이지 않았다. 게토(ghetto) 같은 그들만의 신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갇혀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인기 차트만 따라듣는 보통 사람들일지 모른다. 한국 대중음악은 다양하지 않다고 투덜대고, 옛날 노래가 좋았다고 푸념하면서. 수 십 년 전의 명반들만 반복 재생하면서.

하드코어 펑크 밴드 Slant의 첫 정규앨범 '1집'ⓒ사진 = bandcamp 홈페이지

슬랜트의 1집은 그 모든 게으른 리스너들에게 보낸 지뢰처럼 폭발한다. 여기 슬랜트가 있다고, 하드코어 펑크에 슬랜트가 있다면, 다른 장르에는 또 다른 슬랜트가 있지 않겠냐고. 바쁘고 마음이 분주해 음악을 못 듣는 건 이해하지만, 요즘 들을만한 음악이 없다는 말만은 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음악이 터진다. 음악의 파편은 심장에 꽂히고 온 몸을 휘감는다.

슬랜트는 2018년 밴드 캠프에 6곡을 담은 데모 음반을 공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2019년에는 EP [Vain Attempt]를 내놓았고, 2021년에서야 비로소 정규 앨범 ‘1집’을 발표했다. 이들은 2019년에는 일본 투어를 다녀왔고, 이번 정규 1집은 미국의 아이언 렁 레코즈(Iron Lung Records)에서 발매했다.

슬랜트의 멤버들은 한국의 하드코어/펑크 신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다. 지비엔 라이브 하우스를 운영하며 고어그라인드 밴드 설사에서 활동하는 이유영(Yuying, 기타), 스컴레이드에서 활동하는 베이시스트 이동우(Candy Lee), 개러지 록 밴드 크롤러에서 활동하는 이건희(Gunny, 기타), 타투이스트 임예지(Yeji, 보컬), 드러머 개럿(Garrett)이 슬랜트의 멤버이다.

정규 1집에 담은 곡들은 짧고 거칠다. 또한 빠르고 강력하다. 2분을 넘는 곡은 마지막 곡 ‘Casualty’ 한곡 뿐이다. 1분 30초 남짓한 길이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싶지만, 하드코어 펑크 장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렉트릭 기타는 까칠하게 징징대고, 드럼은 투박한 2박의 리듬을 빠르게 반복하며 확장한다. 보컬은 항상 맹렬하게 뇌까린다. 대부분의 곡들은 명확해 시원시원한 리프를 앞세우고 전진한다.

가사를 공개하지 않아 노래마다의 정확한 의미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적(
Enemy)’, ‘정체(Stagnation)’, ‘희화화(Travesty)’, ‘감옥(Prison)’, ‘난폭한 마음(Violent Minds)’이라는 제목들에 붙어 있는 19세 이하 청취 불가 딱지는, 이 음반의 수록곡들이 분노에서 멀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밴드의 악기들과 보컬이 뿜어내는 사운드의 질감과 속도만으로도 이 음반이 평화라든가 화합, 안식 같은 주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슬랜트는 짧은 곡 안에서 매번 몰아친다. 예의 거친 사운드만이 슬랜트의 전부가 아니다. 슬랜트가 제시하는 일렉트릭 기타 리프와 드러밍은 담대하고 호쾌한 난폭함으로 듣는 이를 매료시킨다. ‘Enemy’가 명확한 반복으로 역동성을 만들어낸다면, ‘Terminal’은 드러밍을 부각시키고, 두 대의 기타가 펼치는 속도감 넘치는 변주로 활력을 더한다. 그리고 ‘How Did It Feel?’은 일렉트릭 기타와 보컬, 드럼, 베이스 모두의 맹렬함으로 질주하면서 경쾌함과 화려함까지 더해 슬랜트의 에너지를 과시한다. 드럼이 주도하는 ‘Stagnation’ 같은 곡을 들으면 슬랜트나 하드코어 펑크의 어법이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 인정해야 한다.

슬랜트는 순식간에 타오르고 난폭하게 타오른다. 때로는 장엄하게 타오르며 휘황찬란하게 타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타오른다. 주도하는 악기를 바꾸고, 백 비트를 바꾸고, 연주를 배합하는 방식을 바꾸면서 선이 굵은 연주로 끌고 가는 장르 특유의 어법을 고수해, 마력 같은 장악력을 발산한다. 그래서 곡의 중심에 흡입당하고, 반복과 변형의 드라마에 넋을 잃게 된다. 느슨하지 않은 것은 사운드와 비트만이 아니다. 리프는 번번이 압도적이고, 곡의 에너지는 끝까지 자신만만하게 발칙하다.

음악을 듣고 있으면, 음반 한 장 안 사고 공연 한 번 안 보는데 이렇게 근사한 음악을 내놓는 이들에게 미안해진다. 특히나 지금처럼 분노가 들끓는데 자꾸만 무력해지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세상 무엇과도 싸울 수 있고,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존재이며, 기꺼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주문 같은 음반을 들으며 투지를 다져본다. 지지 않겠다. 포기하지 않겠다. 물러서지 않겠다.

민중의소리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후원회원이 되어주세요.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정기후원은 모든 기자들에게 전달되고, 기자후원은 해당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응원하기

많이 읽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