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북 구미시의회에서 조금은 황당한 논쟁이 벌어졌다.
“힘들게 살 때 노동을 한다고 하면 ‘아따 막노동이다’, 외래어 일본말을 써서 좀 그렇지만 ‘완전 노가다 판이다’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트랜드가 (바뀌어서) … 노동~ 노동~ 하는 것보다 ‘근로’라고 하는 게 조금 더 뭐라 할까요. 이미지상 유지하는 게 맞지 않겠나 생각” - 윤종호 국민의힘 구미시의원
“전 세계적으로 ‘근로자’란 말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전부 노동자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 신문식 열린민주당 구미시의원
구미시 담당 공무원이 ‘경제기획국’을 ‘경제노동국’으로 바꾸는 조례 일부개정안을 들고 오자, 국민의힘 일부 시의원들이 ‘노동’이란 단어가 들어간 명칭에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윤 의원은 ‘노동’이라는 단어가 몸으로 일하는 힘든 노동현장을 떠올리게 한다며 “시대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신 의원은 ‘근로’(勤勞)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짚으며 “노동자란 말이 정당한 말”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근로자라고 할 때, 이 ‘근’이 ‘부지런할 근(勤)’자이고, ‘노’가 ‘일할 노(勞)’자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부지런히 일해라, 일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며 “일하는 사람이 판단해서 하면 될 일을 꼭 부지런히 일하라는 건 잘못된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노동계 ‘근로자’ 단어 쓰지 않는 이유
“노동의 가치 손상시키는 단어”
일제 강점기 시절 용어라는 설(說)도
‘근로자’라고 할 것이냐 ‘노동자’라고 할 것이냐는 꽤 오래된 논쟁이다.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서는 1997년 제정될 때부터 ‘근로자’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다 보니 관계부처 등 정부 기관도 ‘근로자’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해 왔고, 다수의 언론도 ‘노동자’보다는 ‘근로자’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했다.
하지만 노동계에서는 ‘근로자’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근로자라는 단어가 ‘일하는 자를 사용자와 대등한 관계로 보지 않는 말’로 해석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왜 노동자에게만 부지런해야 한다는 의무를 추가하느냐는 것이다.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노동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의미가 있어서 근로자라는 단어보다는 노동자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며 “그래서 근로자의 날이 아닌 ‘노동절’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용어에 내포된 의미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수진영에선 ‘근로’를, 노동계 또는 진보진영에서는 ‘노동’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굳어졌다.
반공 이데올로기적 이념 때문에 ‘근로’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정설이 아니다. ‘조선농업근로자동맹’ 등 북한에서도 ‘근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이념적으로 ‘노동’을 먼저 사용했기에, 남한에서는 ‘근로’를 사용하게 됐다는 설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다.
그보다 노동학계에서는 ‘근로정신대’처럼 일제 강점기 시절 사용하던 단어가 법률 제정 과정에서 별다른 숙의 없이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최근에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처럼 정부 기관·부처 등에서도 ‘노동’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서울시는 노동기본권 등을 살피는 노동민생정책관을 두고 있고, 경기도에서는 아예 노동국을 두어 노동정책과·노동권익과를 운영하고 있기까지 하다. 지난 12일 구미시의회 기획행정위원회에서도 ‘근로자와 노동자 중 어떤 말을 더 많이 사용하느냐’는 국민의힘 윤 의원의 질문에, 구미시 담당 공무원은 “근로자라는 말을 쓰는 데가 없고, 어감이 좀 그렇다”라며 “우리 기관에서는 노동을 더 많이 쓴다”라고 답했다.
노동법을 연구하는 박귀천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근로’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 등을 이유로 “노동자로 단어 사용을 통일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정작 노동부는 ‘근로’란 단어에 집착
ILO 협약 원문 해석도 ‘근로자’라 표현
하지만 정작 고용노동부는 ‘노동’보다 ‘근로’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노동’이란 단어를 아주 간혹 사용하긴 하지만, 여전히 약속이라도 한 듯 ‘근로’라는 단어를 주되게 사용한다.
올해 3월 22일부터 4월 22일까지 한 달 동안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 공개된 보도자료는 총 114개인데, 이 중 본문에서 근로자 대신 노동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보도자료는 총 14개이다. 그런데 이 중 10건은 고용노동부 산하 안전보건공단·장애인고용공단 등이 배포한 보도자료이고, 고용노동부가 배포한 보도자료는 단 4건이다. 4건 중에서도 2건은 근로자와 노동자라는 표현을 번갈아 사용했다. 한 달 동안 딱 2개의 보도자료에서만 ‘노동자’란 표현을 사용한 셈이다.
지난 21일 보도자료에서는, 근로자로 번역하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는 단어까지 ‘근로자’로 표기했다. 고용노동부 국제협력담당관이 낸 ‘국제노동기구와 3개 핵심협약 비준서 화상 기탁식 개최’ 보도자료를 보면 “제98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협약은 ‘근로자’의 단결권 행사에 대한 충분한 보호와 자율적인 단체 교섭을 장려하는 협약이다” 등의 문장과 같이 ‘근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ILO 핵심협약 원문 해석에서도 ‘노동자’ 대신 ‘근로자’를 쓴 것인데,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인수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지난 15일 기자간담회에서 ‘모든 노동자는 단결권 및 단체행동권 등 결사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취지를 짚으며 “(ILO 핵심협약 원문을 번역할 때) 근로자보다는 노동자가 적절하다”라고 말했다. ILO 핵심협약 취지를 방해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일하는 자’라는 의미가 내포된 근로자보다 특정한 견해가 섞이지 않은 노동자란 단어가 적합하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 국제협력담당관 관계자도 “의식해서 ‘근로자’로 쓴 건 아니다”라며, ILO 핵심협약 원문에서의 워커(Worker)를 번역하자면 ‘근로자’가 아닌 ‘노동자’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개인적인 입장을 밝혔다.
한편, ILO는 협약 원문에서 노동자란 단어로 무엇을 사용할지 신중을 기했다. 핵심협약 원문에서, ILO는 사용자에 대한 단어로 임플로이어(Employer·고용인)를 사용하면서 노동자를 뜻하는 단어로는 워커(Worker)를 사용했다. 임플로이어의 상대 단어가 종업원의 의미를 가진 임플로이(Employee)라는 점을 고려하면, 워커가 아닌 임플로이를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의도적인 것으로, 단체행동권 등 결사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할 노동자가 사용자와 종속관계에 있는 종업원(Employee)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특수고용직 등 종업원 형태가 아닌 다른 고용형태의 노동자는 배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노동자에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살리기 위한 세심한 단어 사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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